일본 국보 된 진해 웅천 막사발
지역 도자기 문화 명맥 잇기를
진해 웅천 사기(도기)는 주로 생활사기였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다 보니 밥그릇 모양도 나오고 찻잔 모양도 나왔다. 그래서 웅천 사기를 '막사발', '사발'로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 진해 웅천 사기장들이 일본에 끌려갔지만 일본의 웅천 사기 약탈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다. 평온한 웅천에 왜구 침입이 고려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면서 웅천지역 사발도 계속 약탈 되어왔다. 약탈이든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 개항 이후 거래에 의해서든 웅천 사발은 일본으로 넘어가 귀하게 대접받아 '이도다완'이라는 일본 국보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침입한 왜장들이 조선에서 차 도구의 약탈과 사기장의 납치에 혈안이 된 이유는 다도의 세계에 깊이 빠져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영향이었다. 웅천 도공 납치에 가장 힘을 썼던 이는 히라도의 성주(영주) 마쓰라 시게노부였다. 그는 뛰어난 사기장을 보내어 히데요시의 환심을 사려 한 것이다. 이렇게 납치한 인원은 사기장을 포함한 125명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웅천 사기장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일본으로 끌려가 웅천 가마에는 모든 불이 꺼졌다. 웅천 사기장들은 대마도를 거쳐 하라도로 끌려갔다. 남원에서 끌려간 심수관의 선조들은 일본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으나 웅천에서 끌려간 도공들은 대부분 힘든 삶을 살았다. 히라도에서의 삶은 동굴에서 시작되었다. 동굴에 가둬 놓고 다기만 제작하기를 강요당했다. 이후 점차 땅을 주어서 농사를 짓게 되고 작은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이후 사세보시의 미카와치 마을에 자리를 잡아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그곳에서 사기를 만들고 있지만 화려하거나 유명하지는 않다.
히라도와 미카와치 마을을 둘러본 진해문화원 답사 일행은 이후 가고시마로 발길을 옮겼다. 남원에서 끌려간 박평의와 심당길 등이 만든 단군신사인 옥산신사, 심당길의 14대 손 심수관의 도예지, 공주에서 끌려가 일본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불리는 이삼평을 기리는 아리타에 있는 도산신사를 참배했다. 그리고 여러 지역 조선 도공들이 끌려갔던 이마리 도자기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 주차장 맞은편 너머에는 포로로 끌려가 중노동만 하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880명의 조선 도공들의 비석을 모아 탑을 만든 '도공무연탑'이 있었다. 일행들 모두 숙연한 마음으로 무연탑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이 작은 마을에 조선 도공들을 몰아넣고 일본 도자기 문화를 완성하게 했을 터였다. 6~8월에는 이 마을에서 '도자기 풍경축제'라는 세계적인 도자기 축제를 연다고 한다. 조선도공들의 넋이 서린 마을에서 일본 도자문화를 알리는 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다시 발길을 옮겨 아리타의 '규슈 도자기 문화관'에서 일본 도자기의 발전상을 둘러보며 웅천 선조 도공의 자취를 찾는 답사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창원시 진해구 웅천은 일본의 국보 '이도다완'이 탄생한 곳이다. 백성이 사용하던 막사발이 일본으로 가서는 국보로 모셔졌다. 반면 우리나라는 고대, 중세 귀족과 양반들이 사용하거나 소장했던 도자기와 가마터만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한 도공의 노력으로 웅천 가마에 불은 다시 피어 올랐으나 그 명맥을 이어가고 지켜나가려면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웅천 사기와 도요지를 여주, 이천의 도자기 문화처럼 널리 알리고 융성시키고자 계속 노력해 나가겠다"는 진해문화원 우순기 원장의 말처럼 선조의 서민 문화도 우리의 일상에서 빛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끝> /안호영 지역사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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