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포함 전국서 시위 일어
도내 5.18 관련·유공자들
한목소리로 "모두 기억을"
시위 참여자 '빨갱이'로 보는
인식 바뀌어야한다는 지적도

 

경남에도 5.18이 있었다 (중)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

(상) 5.18 민주유공자가 말하는 그날

(중)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

(하) 갈 길 먼 국가유공자 예우

‘서울의 봄’은 짧았지만 시민의 기대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민주 정부 수립을 향한 열망은 1980년 봄을 맞으면서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가 국가 권력에 의해 모진 수모를 겪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때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지금도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진주 대학가에서 터져 나온 민주화 열망 = 경상대(현 경상국립대) 낙농학과 77학번 박홍기(68) 씨는 1980년 5월 12~13일 학교 안팎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이전까지 시위 참여 경험이 없었지만 어수선한 시국에 불만을 느껴 대열에 합류했다.

“칠암캠퍼스 안에 들어가면 그때는 무리 지어 전두환 군부를 규탄하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어요. 최루탄도 학교에 날아오고 그러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지요. 여학생들은 최루탄 가스 때문에 울부짖고 남학생도 힘들어하면서 욕하고. 그런 시대상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을 밖으로 나오게 했어요.”

그는 시위 과정에서 10여 명과 함께 교내에 서 있던 ‘유신버스’를 정문 밖으로 밀어냈다. 이 버스는 점차 속도가 붙더니 교문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춰 섰다. 당시 전투경찰 20여 명이 교문 주변에 서서 시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칫 누군가 다칠 수도 있었지만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경들이 교내에 진입하지 않아 마찰도 없었다.

“10인승 이상 되는 유신 버스라는 게 있었는데 시위 때 그걸 보니까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저거부터 없애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 같이 그걸 밀어내게 된 거예요. 버스가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철문이 박살이 났어요. 그러고 나니 주변 학생들이 ‘와~ 이분을 받들자’라고 하는 거예요. 이를 계기로 전선에 서게 됐어요.”

경상국립대 학생들이 1980년 5월 진주 시내에서 거리 시위를 하고 있다. /경대뉴스(경상국립대 학보사)
경상국립대 학생들이 1980년 5월 진주 시내에서 거리 시위를 하고 있다. /경대뉴스(경상국립대 학보사)

◇진주 시내를 목적지 삼아 거리 행진 = 오전 10시쯤에 시작된 학내 시위는 학교 바깥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는 학생 1500여 명이 참석한 총학생회 시국성토대회가 열리던 때이기도 했는데 그 당시 참석자들은 비상계엄 즉시 해제를 비롯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노동 3권 보장, 경찰 중립 유지, 군부 정치 간섭 배제, 유신 남은 세력 처벌을 강조했다. 특히 부각했던 것은 과도정부를 향한 민주화 요구였다.

“다들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시위에 나섰어요. 그러다 진주 시내로 진출을 시도했어요. 진주교를 넘어가야 하는데 전경들이 버티고 있더라고요. 제가 이끌던 시위대는 30~40명 정도 있었는데 갈 수가 없었어요. 결국은 안 되겠다 싶어서 학교로 돌아왔어요. 전경에게 붙잡히지도 않았어요.”

박 씨와 다른 무리에 있던 학생 중에는 수심이 얕은 학교 동쪽 남강을 건너 시내 진입에 성공한 이도 있었다. 시청에 도착해 ‘유신잔당 완전 청산’ 등을 소리 높여 외쳤고 20여 분간 농성하다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철야농성도 했다. 전투경찰과 충돌해 학생과 교수, 전경 일부가 다쳤다.

박 씨는 이 시위가 끝나고 나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1년 6개월 정도 지난 뒤에야 징계가 풀렸고 1982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기간 지명수배 대상이 돼 하동에 있는 고향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경찰에 잡힐까 봐 서울에 사는 친형 집에 숨어 살았다.

“다행히 잡히지 않아 저는 큰 문제는 없었어요. 그러다 정학 문제도 해결되고 수배가 풀려서 학교로 돌아갔는데 경찰이 졸업 전까지 2년간 날마다 쫓아오더라고요. 저에게 모임도 만들지 말라고 하고, 3인 이상 있는 자리도 만들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밖에서 5명이랑 술을 마시려고 하면 경찰이 뒷자리에 앉아서 모이지 말라고 했어요. 같이 가도 2명, 3명씩 따로 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박 씨는 지난 연말 8년 만에 재개된 8차 5.18민주화운동 관련 피해 보상을 신청했다. 보상 여부는 미지수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바람이 있다.

“매년 5월 18일 즈음이 되면 그 시절을 회상하는 사람이 많지만, 너무 광주만 부각되는 것 같아요. 그 시절 광주에서만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한 게 아니에요. 경남을 포함해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시위에 나왔다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어요.”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박홍기 씨가 16일 오후 하동군 진교면의 한 공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민주 정부 수립 열망한 남해 출신 유공자 = 5.18 민주유공자 김두식(82) 씨는 1980년 전후로 고향인 남해와 서울을 오가면서 반정부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신민당에 적을 두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한번 갈 때마다 일주일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당원들과 함께했다. 서울에서 접한 실정은 지역 당원, 지인들과 공유했다. 결혼식을 가장한 시국선언 발표와 같은 단체 활동은 주로 서울에서만 했다. 고향에서는 여건이 되지 않아 할 수 없었다. 집과 1시간 거리인 순천·진주 버스터미널을 이용해 지역을 오갔다.

“저는 김대중 열성 지지 당원이었어요. 당적을 얻은 뒤로 반정부 활동을 꾸준하게 했어요. 특히 박정희 정권 때 3선 개헌으로 장기 집권 길이 열린 뒤로는 ‘군인은 정치하면 안 된다’고 느껴서 더 활동적으로 움직였어요.”

그는 정당인으로 지내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셨다. 비서로 6개월 정도 일한 적도 있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80년 5월 17일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혐의로 붙잡히자 그 역시 체포 대상에 올랐다. 김 전 대통령보다 두 달 늦은 7월 19일쯤 잡혔다. 신민당은 김 전 대통령이 잡혀간 뒤로 해산됐다.

“서울에 있는 와중에 어느 날 아내가 전화로 경찰들이 찾는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안 가고 여기저기 머물렀어요. 나중에는 부산 쪽으로 도망치려고 했어요. 서울고속버스터미널(경부선)에 갔는데 거기서 저를 잡으려고 올라온 남해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됐어요.”

5.18 민주유공자 김두식 씨가 16일 오전 진주시 옥봉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내란 꾸민 거 아니냐” 잇단 보안사의 추궁 = 김 씨는 마산보안사로 끌려가 2주 정도 구금됐다. 일주일가량 폭행이 밤이고 낮이고 계속됐다. 포승줄에 팔이 묶인 채 각목과 야구방망이 같은 것으로 온몸을 셀 수 없이 맞았다. 몸이 시퍼렇게 멍들었다. 주로 때린 사람은 경찰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이 보안사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창피를 당했어요. 같이 잡힌 사람이 경남 사람 10명 정도였어요. 김대중 열성 지지 세력이었지요. 지금은 하동, 남해, 양산에 1명씩만 있고 나머지는 다 죽었어요. 그때 수사관들이 ‘너희 뒷산에 묻어버리면 아무도 모른다’며 협박을 했어요, 잠도 못 자게 하기도 하고, 욕하고, 때리고.”

수사관들은 “너희 또 뭉쳐서 제2의 광주 사태 만드는 거 아니냐”, “김대중 내란 수괴 부하 아니냐”, “너희 북한 갔다 오지 않았느냐”, “김대중이 내란 수괴이니 너네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수시로 김 씨를 불러 괴롭혔다. 자신이 한 활동은 반국가가 아닌 반정부 활동이라는 답변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저는 김대중 지지자이자 5.18 지지자거든요. 민주화 운동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흐름이었어요. 제가 이렇게 당해야 할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래서 너무나 분해요. 그때 생각하면 창피하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싫고. 떠올리는 게 힘들어서 집에도 그 이야기를 안 해요.”

김 씨는 갖은 수모를 겪고 나서 1995년 5.18특별법을 제정한 김영삼 정부 때 5.18 민주유공자가 됐다. 그러나 유공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없다. 고통스러운 과거에 발목 잡힐 때가 잦아서다. 지금도 ‘언젠가는 민주화가 이뤄질 텐데 굳이 내가 왜 나섰을까’라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민주화 운동에 나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제가 겪은 일은 후진국에서 정치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국가나 어느 개인은 원망하지 않아요.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하면 빨갱이 취급하는 사람이 지금도 많아서 인식이 달라지면 좋겠어요. 광주뿐 아니라 전국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있었는데, 그런 점도 많이 알려지고 잘못된 생각도 바로잡히면 좋겠어요.”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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