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으로 본 세상 - 판결문 속 차별적 용어

언어는 힘이 세다. 차별적인 용어는 우리 사회에 편견을 심고,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판결문 용어가 보편적인 사회적 기준보다 훨씬 예민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1월 50대 남성이 살인예비죄로 법정에 섰다. 그는 지난해 9월 창원시 의창구의 한 마트에서 흉기를 사면서 “사람을 죽이겠다”고 직원과 손님을 위협했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판결문에 그의 직업은 ‘노동’으로 표기됐다.

판결문에서 노동은 일용직·육체노동 등에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사무직 노동자는 회사원, 다른 업종은 해당 직업명을 그대로 표기한다. 피고용인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노동’ 개념이 특정 직군의 하위개념처럼 쓰인다는 것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사무직 노동자는 회사원으로, 생산직은 노동자로 표기하는 정서는 사무직과 생산직의 임금 격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북유럽 나라처럼 청소원이나 용접공의 소득이 대학교수나 의사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사회가 되면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창원지방법원 전경. /경남도민일보DB
창원지방법원 전경. /경남도민일보DB

판결문 속에 신체장애를 비하하는 용어도 남아있다. 창원지방법원은 지난해 4월 5일 주민등록법을 위반한 피고인의 범죄 사실을 적시하면서 ‘피고인이 농아자들과 공모해 사건 범행을 주도했다’고 썼다.

정부는 2014년 ‘장애인 비하 법령용어 개선을 위한 개정령안’을 발표했다. 14개 법령안에 담긴 장애인 비하 용어를 순화해서 사용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이에 따라 맹인은 시각장애인으로, 간질장애인은 뇌전증 장애인, 농아자는 청각 및 언어 장애인으로 바뀌게 됐지만 판결문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서지은 장애인인식개선교육 강사는 “신체장애 비하 용어는 장애인끼리도 삼가고 있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언론에서 올바르지 않은 장애 비하 용어 등을 바로잡아야 하고 사법부가 관련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성폭력 사건 판결문에 자주 등장하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도 문제다.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는 2022년 3월 법무부에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을 중립적인 법률 용어로 대체하라고 권고했다. 성적 수치심은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성적 수치심’은 가해자의 편을 든다. 2021년 4월 60대 남성은 사천의 한 공원에서 미성년자였던 피해자에게 5만 원권 지폐를 보여주면서 “너는 몸매가 예쁘고 키가 크니까 준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법정에서 “기분 나쁘고 무서웠다”, “불쾌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무서움과 불쾌감은 성적 수치심과 다르다고 봤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놨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는다.

지난 15일 기준 최근 3년간 창원지방법원에서 쓰인 판결문에서 ‘성적 수치심’이 쓰인 사례는 252건에 달했다. “불법촬영 범행은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야기한다”(2월 6일 선고), “피해자는 적지 않은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1월 25일 선고)는 등 최근까지도 사용되고 있었다.

윤소영 경남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스쿨미투가 일어나고 나서 교육청은 성별영향분석평가를 받고 있다. 사업 집행 과정에서 성인지감수성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며 “사법부도 성별영향분석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법부는 국회에서 법을 만들 때까지 손을 놓고 있다. 선제적으로 변화하려고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현철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법률 속 차별 언어 개정을 위한 과제>(2021) 연구 보고서를 펴냈다. 그는 상시로 전문가가 검토하고 국민 의견을 수렴해 잘못된 용어를 개선해야 한다고 짚었다.

강 연구위원은 “차별적인 용어 사용으로 판결이 왜곡되거나 잘못될 가능성도 있다. 언어로 상하관계를 책정하거나 소수자와 관련된 부분에서 편견이 반영되는 용어를 쓴다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판결문 속 언어는 법령에서 쓰이는 용어가 많기에 법령에서 차별적인 용어를 먼저 바꿔야 한다”며 “법령에 없는 단어는 판사 본인 판단으로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다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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