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말께 영국의 한 가족
이사한 집에서 이이한 일 겪어
닫아둬도 울리는 피아노 소리
효팽의 왈츠 9번 '이별의 왈츠'
슬픈 선율서 쇼팽 생애 떠올려
오늘은 쇼팽의 왈츠를 소개하려 한다. 바로 전 영화 <프로메테우스>로 전주곡(프렐류드)을 소개하였으며 오래전 영화 <그린북>을 통해 ‘연습곡’(에튀드)을 소개한 바 있다. 이렇듯 영화라는 매체에 쇼팽이 창조한 선율의 등장은 빈번하여 일일이 언급하기가 버거울 정도이다. 왜 그럴까? 이유라면 현시대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 서정성 때문일 것이다. 어제 당장 작곡되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피아노라는 감성적인 악기를 통해 번져 나오는 세련된 서정은 시간을 관통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니 현재의 정서를 대변하는 영화라는 장르에서도 그의 음악이 순전히 녹아들며 장면의 감동을 배가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음악 감독들에겐 고마운 음악적 재료요 창고이다.
이런 와중 그 많은 쇼팽의 명곡 중 유독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주 만나볼 수 있는 선율이 있다. ‘빗방울 전주곡’(Preludes Op. 28 No. 15), 연습곡(Etudes)에 속한 ‘이별의 곡’(Op. 10, No. 3)과 ‘흑건’(Op. 10, No. 5), 영화 <피아니스트>의 명장면을 통해 흐르며 마음을 안타깝게 했던 발라드 1번(Ballade No.1), 피아노로 써 내려간 ‘밤의 시(詩)’ 녹턴의 여러 곡, 그리고 오늘 소개할 곡인 ‘이별의 왈츠’다. 쇼팽의 왈츠 중 많은 사랑을 받는 걸작으로 여러 영화의 장면들을 수놓은 곡으로 유명하다. 먼저라면 영화 <연인>(1992)일 것이며 드라마로는 <미스터 션샤인>이 떠오른다. 영화 <연인>에서는 마지막 장면을 통째로 관통하며 노골적으로 아련했고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주인공들의 서글픈 마지막을 암시해 아름다웠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영화는 <디 아더스>(2001)다. 고야 어워드 8관왕에 오른 반전영화의 걸작이다. (고야 어워드는 스페인의 아카데미로 영어 대사로만 이루어진 영화가 이러한 업적을 이룬 영화는 <디 아더스>가 처음이었다)
1945년의 저지섬, 얼핏 보기에도 황량한 배경에 주위는 온통 안개로 둘러싸인 어느 저택에 그레이스(니콜 키드먼 분)와 두 자녀가 살고 있다. 이름은 앤과 니콜라스.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찰스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 후 행방이 묘연하다.
비어있는 듯 고요한 집의 문을 두드리는 세 인물. 면접이 이어지고 이 집에서 일했었다는 그들의 말에 그레이스는 그들을 하인으로 고용, 몇 가지 당부사항을 전달한다. 지나온 문은 반드시 잠글 것,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들이 햇볕에 노출되지 않도록 할 것, 자신 또한 소음에 편두통이 있으니 조심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과의 동거가 시작되고 그레이스는 아이들의 훈육을 열심히 한다. 니콜라스는 겁이 좀 많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지만 누나인 딸 앤이 말썽이다. 특유의 반항기에 말대답이 일쑤인 데다 동생 놀리기가 특기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자꾸 헛것을 보고 엉뚱한 소리를 해 댄다.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정보마저 구체적이라 무섭게 생긴 할머니 유령, 게다가 또래 남자아이 유령은 이름마저 있는 빅터다.
신앙심 깊은 그레이스가 이를 믿을 리 없고 벌로 거짓말을 멈추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러던 중 이젠 그레이스에게도 이상한 일들이 감지된다. 편두통을 유발하는 위층의 소음은 의심했던 하인의 짓이 아니었으며 잠긴 피아노 방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분명 잠갔다고 생각했던 문들이 열려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커튼이 이유 없이 자꾸 열려 있다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사건이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참다못한 그레이스는 신부를 찾아 나선다. 그동안 발길이 끊긴 신부님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가던 숲길의 안개가 깊어지고 길을 잃은 그레이스가 당혹감에 휩싸인다. 이때 짙은 안개 너머에서 다가오는 한 남자. 바로 자기 남편 찰스다. 반가움에 그를 집으로 데려온 그레이스는 이제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리라 희망에 부풀지만, 아이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남편은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다시 전쟁터로 가야 한다며 떠나버리는 찰스.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조마조마한 가운데 이젠 하인들의 행동마저 의아하다. ‘이제 진실을 알려줘야지 않겠냐’며 때를 기다리는 그들. 무엇을 알려줘야 한단 말인가? 이 집과 인연이 있음이 분명한 세 하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앤이 목격했다는 유령은 과연 어떤 사연을 지니고 있을까? 아니 정작 사연을 지닌 이는 누구인가?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가운데 가장 서글픈 것은 남편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흐느껴 찰스를 그리워하는 그레이스. 이때 갑자기 엄격히 금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분명히 잠겼을 피아노다. 어찌 된 일인가? 장총을 부여잡은 그레이스가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방으로 향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지만 아무도 없다. 문을 빼꼼 열었을 때 피아노 소리는 이미 그쳤다. 확인을 위하여 들어온 그레이스는 또 다른 기괴한 일을 겪는다. 방의 문이 저절로 닫혀 버린 것이다. 피아노 문을 급히 잠그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하녀를 데리고 다시 돌아온 그레이스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다. 피아노가 열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괴하고도 서늘한 장면을 지배하며 몽환적으로 들려오던 선율, 바로 쇼팽의 왈츠 중 제9번 ‘이별의 왈츠’(Waltz Op. 69 No. 1), 소위 ‘고별’이다,
쇼팽이 모두 20곡의 왈츠를 남겼는데 그중 7곡은 번호가 붙지 못했다. 유작이거나 출판을 하지 못했거나. 그의 왈츠엔 반려동물을 대표하는 두 동물이 모두 들었다. 4번인 Op. 34 No. 3은 그 지나치다 싶은 경쾌함으로 ‘고양이왈츠’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6번인 Op. 64 No. 1은 ‘강아지 왈츠’라는 제목이 달렸다. 영화에 쓰인 곡들도 많아 3번인 Op. 34, No. 2는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흘러 서글픔을 더하였고 슬라브적 감성이 가득한 7번(Op. 64 No. 2)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 배틀 장면, ‘흑건’에 이어 같은 곡을 활용한 즉흥 변주로 대결이 펼쳐진다.
이처럼 무도가 기반인 왈츠에서조차 서정이 넘쳐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빈의 형식에 슬라브적 우수가 더해져 묘한 정취를 품은 것이 쇼팽의 왈츠다. 누군가가 쇼팽과 친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을 묻는다면 왈츠를 들어보라고 권할 것은 바로 곡 하나하나가 지닌 이러한 서정적 친근함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한 ‘이별의 왈츠’. 이별의 곡과 더불어 상실이 빚어내는 공허함과 슬픔이 절묘하게 밴 작품. 이별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지닌 쇼팽의 곡들은 왜 이리도 애절하여 마음에 스며드는 것일까? 쇼팽이 살아온 인생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별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그의 삶. 젊은 시절 조국을 떠났고 동시에 첫사랑과도 이별하였다. ‘마리아 보진스키’와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어머니와도 같았던 조르주 상드와는 결별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흔도 되지 않아 세상과도 작별하였으니, 상실의 정서가 깊었겠지.
그렇게 ‘이별의 왈츠’는 인생에 찾아온 마리아와의 두 번째 사랑마저 실패한 쇼팽의 상심이자 음악으로 전하는 작별 인사다. 그녀는 이 곡에 제목을 지어주곤 평생 악보를 간직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쇼팽은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유품 중 소중히 간직된 봉투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 속엔 그녀와 주고받았던 편지들과 악보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봉투의 겉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의 슬픔”.
/심광도 시민기자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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