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늘 아래 탁족 즐겨
까끌한 모시·삼베옷 필수
장식용으로 발 이용하기도
삼국시대부터 목침 사용해
부채·평상·돗자리도 인기
여전히 매미소리가 극성인 한여름이다. 그제로 말복이 지난 터라 기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침 기온은 제법 서늘해졌다. 하지만 곧 아파트 벽면을 사정없이 쏘아대는 햇볕에 창문을 닫고 에어컨 리모컨을 손에 쥔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제법 출근했을 시간이면 자동차를 어디 그늘에라도 옮겨 주차할 생각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선다.
이 여름, 직장이 천국인 사람이 있겠고 그 반대인 사람이 있겠다. 하여간 에어컨은 현대인에게 여름나기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런데 에어컨이 씽씽 돌아가는 실내와 달리 그 건물의 밖은 더욱 더워진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이 얼마나 될까. 문명의 혜택 속에서 현대인은 어쩌면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정도까지 생각이 미치자 살랑살랑 부채만으로도 더위를 견딜 수 있었던 옛사람들의 생활에 호기심이 닿는다.
◇탁족 = 어려운 한자말이다. 濯足(탁족), 말 그대로 물에 발을 담그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즘 사람들 생각으로는 피서법으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행위다. 물에 풍덩 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발만 담가서 무슨 피서가 될까.
그런데 이게 그렇지 않다. 반신목욕법처럼 기의 순환을 이용한 아주 과학적인 방법이다. 발은 모든 신경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발을 식혀 온몸에 찬 기운을 불어넣어 시원함을 느끼는 방법을 옛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옛 선비들의 문인화에는 탁족하는 사람의 모습이 종종 등장하나 보다.
◇부채 = 음력 5월 5일은 단오다. 단오에는 지인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선물이 바로 부채다.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니 부채로 더위를 잘 극복하라는 의미다. 부채는 요즘도 많이 사용되는 여름용품이다.
하긴 요즘 손풍기, 목풍기 같은 아이디어 상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나마 휴대용 바람제조기 부채의 위상이 위태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부채의 면이 여러 면에서 활용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광고용으로 혹은 작품용으로.
부채는 둥글게 된 것을 단선이라고 한다. 둥근부채, 방구부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 단선은 태극문양이 많았는데 이를 태극선이라고 한다. 접는 부채는 접선이라 하고 합죽선으로도 불린다. 휴대하기 좋아 선호했고 선면에 글과 그림을 넣어 예술의 멋을 즐기기도 했다.
◇삼베·모시옷 = 옛사람들은 무더위에 생모시로 된 고의, 적삼 또는 치마를 즐겨 입었다. 기껏해야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등등거리에 모시옷을 입고 장죽을 물고 있던 동네 할아버지 모습이 생각난다. "땡볕에 너무 오래 있지 마라" 하시지만 제대로 할아버지를 쳐다볼 수 없었다. 모시와 등등거리 안에 비친 맨살이 다 보였기 때문이었다.
모시나 삼베옷을 입으면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그 까끌까끌한 촉감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등등거리·등토시 = 등등거리는 등나무 줄기로 만든 배자다. 옷이 맨살이 착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고자 옷 안에 받쳐 입었다. 등토시는 팔에 끼는 용도의 여름용품이다. 한동안 합성수지 제품도 나왔다. 등으로 만든 제품이 비싸다 보니 대체 용품으로 시장에 나오긴 했는데, 그다지 인기가 있지는 않았다. 활동량이 많은 현대인에게 이러한 제품은 불편할 수밖에 없고 또한 옷감의 발달로 몸에 착 달라붙어도 시원함을 주는 제품이 많이 나오기에 이젠 등등거리와 등토시의 역할은 끝났다고 봐도 되겠다.
◇발 = 발의 용도는 방문이나 창문을 열어놓아야 하는 여름, 방의 안쪽을 가려주고 바람을 잘 통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어렴풋하게나마 밖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했다. 발은 대체로 대를 가늘게 다듬거나 갈대를 삼끈이나 실로 엮어 만든다.
대발은 주로 대청이나 큰방에 걸어두었다. 발은 안을 가리고 바람을 통하게 하는 목적 외에도 선비 집안에서는 장식용으로 많이 활용되기도 했다. 대발에 글과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예쁜 매듭을 장식해 멋을 더하기도 했다.
◇돗자리 = 돗자리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강화도 화문석이다. 꽃무늬가 새겨진 자리라는 뜻인데 돗자리는 주로 왕골과 등심초라 불리는 골풀로 만든다. 이것을 잘게 쪼개 만드는데, 매끄럽고 광택이 강한 특징이 있다. 줄기도 아주 질겨서 오래 사용할 수 있으며 여름철 발이 쳐진 방에 화문석을 깔고 낮잠이라도 잔다면 아무리 여름이 밖에서 기승을 부려도 그러려무나 하지 싶다.
◇죽부인 = 낮잠엔 또 죽부인만한 것도 없다.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둥근 통일 뿐인데, 하필 이름을 죽부인이라고 붙이는 바람에 아이들에겐 사용이 금지된 운명의 여름용품이다. 이것을 안고 잠이 들면 특유의 통기성으로 무더위에도 땀을 바로 식힐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어 옛사람들에게 필수품 대접을 받았다.
◇목침 = 나무로 만든 베개.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무의 서늘한 감촉이 목으로 전해지면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어 옛사람들이 애용했던 물건이다. 사각형, 원형, 반월형에 조립식도 있어 형태는 다양하다. 나무가 주 소재지만 재료에 따라서 죽침, 나전침, 도자침 등도 있다.
◇평상 = 평상 용도에 따라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든다. 평상의 바닥은 듬성듬성하게 만들어 바람이 잘 통해야 한다. 물론 집안에서 쓰는 사계절용이라면 그럴 필요 없겠지만. 평상은 주로 정방형으로 제작되며 때로는 두 개를 덧대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 짝평상이라고 한다. 가장자리에는 낮은 난간을 세우는데, 멋도 멋이지만 아기가 놀다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등등거리 받친 모시옷을 입고 죽부인을 겨드랑이에 끼워 목침 베고 태극선 살랑살랑 부치며 여름 한낮을 보내는 모습, 상상만 해도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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