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부터 넓어지는 강, 은모래 향연도 시작돼

섬진강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11개 시군(진안·임실·장수·순창·남원·곡성·구례·순천·광양·하동·남해)에 걸쳐 있다. 그 길이는 조금씩 달리 나와 있는데, 섬진강 발원지 안내판에는 218.6km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낙동강·한강·금강에 이어 네 번째로 긴 강이다. 나라에서 진행한 '4대강 사업'에는 섬진강 아닌 영산강이 들어간 바 있다.

섬진강은 그 오래전 군사적으로 탐나는 곳이었다. 뱃길을 통한 동·서 진출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섬진강이라는 이름도 이와 관련 있다. 1385년 왜적이 침입했을 때 두꺼비가 울어 쫓았다는 전설에서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 자를 따왔다. 누군가는 이러한 빼앗고 빼앗기는 아픔 때문에 이상향을 그리는 청학동이 하동에 들어섰다고 해석한다.

섬진강 하류인 '하동 섬진강'은 전남 구례군과 연결되는 남도대교 아래서부터라 할 수 있다. 전북·전남에 걸쳐 있는 상·중류는 오밀조밀한 물길이 이어진다. 그 폭이 넓어지며 강다운 강으로 바뀌는 것은 하동서부터다. 은모래 향연도 이곳에서 출발한다. 섬진강이라 부르기 이전에는 모래가람·모래내·다사(多沙)강이라 했다고 하니, 섬진강과 모래는 떼려야 뗄 수 없다. '하동 섬진강'이라 굳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서 시작된다.

소나무 숲인 하동송림(천연기념물 제445호)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동에서 나고 자란 조문환(53) 씨는 은모래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을 이렇게 전한다.

섬진강에서 재첩을 채취하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중학교가 섬진강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체육 시간에 선착순으로 젖은 모래를 가져오고 그랬는데요, 그때 모래를 밟으면 발이 쑥쑥 빠졌습니다. 정말 눈부신 은빛 모래였죠."

이 넓은 모래 위는 곧 생활터전이기도 했다. 옛 시절 마을 사람이 솥단지를 들고 강가로 나와 재첩 끓이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된다. 햇빛 좋은 날 빨래하는 아낙네들로 가득한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동 하면 악양들판이 떠오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농사짓는 땅이 전체 면적의 15%가량이라고 하니 넉넉한 편은 아니겠다. 뒤로 지리산을 두르고 있는 지형 때문이다. 그래서 하동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강에서 찾았다. 고마운 강은 재첩·참게·벚굴·은어·황어와 같은 보물을 내놓았다. 섬진강을 젖줄 혹은 생명선이라 생각하며 강 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마을마을 섬진강을 끼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도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십리길까지 재첩 팔러 다니던, 그 억척스러운 이곳 여인네들 이야기는 함께 따라붙는다.

낙동강은 1987년 하굿둑이 들어서면서 강 모습이 크게 변했다. 섬진강은 1965년 상류댐이 들어섰지만, 하동 쪽 하구에는 둑이 없다. 그 덕에 바닷물·민물 비율이 6 대 4가량 되는 하동 신방마을 같은 곳에서 봄 벚굴을 만날 수 있다.

하동을 마주 보는 전남 광양 역시 강을 끼고 있다. 그럼에도 섬진강과 광양은 하동만치 자연스럽지는 않다.

하동과 달리 광양 생활공간은 섬진강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 광양에서 섬진강을 끼고 차로 이동하면 좀 심심하다. 마을 아닌 산이 주로 자리하고 있다. 사람 있는 곳으로 찾아가려 하면 이내 강은 눈에서 멀어진다. 또한 광양은 어업보다 농업 비중이 높다고 한다. 하동에서 재첩잡이를 하는 주민은 "저쪽은 너른 땅이 많아서 주로 농사를 짓지. 재첩에 눈 돌린 것도 2000년 정도부터다"라고 설명했다. 그때부터 재첩을 놓고 다툼도 있었다고 하는데, 5년여 전부터 경계를 표시해 공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도 있다. 광양에서는 섬진강에서 얻은 것을 하동 쪽 장터로 와서 파는 것이 예사였다고 한다. 그러니 광양에서 잡은 것도 그 앞에 '하동'이라는 이름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섬진강이 내민 손길을 받기만 한 하동 사람들은 오늘날 마음이 편치 않다. 이곳에서는 강 끝이자 바다 시작점을 섬진강대교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위치가 달라지고 있다. 바닷물이 갈수록 상류 쪽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섬진강대교보다 위쪽에 자리한 하동포구공원에서 바라본 물은 강이라기보다 바다에 가깝다. 이렇듯 바닷물에서 살 수 없는 재첩도 계속 위로 향하고 있다. 행정에서 나서 재첩 종패를 상류 쪽에 뿌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는 모래가 줄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까지 모래를 마구 퍼서는 일본으로 대량 수출했다고 한다. 20여 년 전 금지하기는 했지만, 일찍 중단하지 못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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