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이어 한 주제 깊이 파고드는 일본
단기 지원으로 눈앞 성과 닦달하는 한국
일본은 전국시대(16세기)부터 서양과 접촉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1603~1863)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다시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현재의 도쿄(에도)를 기반으로 막부를 세우면서 에도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대항해 시대에 뛰어든 다른 서양 국가들과는 다르게 상업에만 관심이 있었던 네덜란드는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가사키를 거점으로 에도 막부와 교류를 유지했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온 서양의 학문을 '난학( 蘭学)'이라고 한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중심이 됐던 지방의 이름이 홀란드(Holland)인데, 이를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화란(和蘭)'에서 난(蘭)을 차용해 난학이라 부른다.
난학을 통해 서양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당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자 기반의 전문 용어들은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던 한국과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난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기관인 '난학숙(蘭学塾)'에서 배출된 학자들은 과학기술 외에도 인문학과 예술 분야 등에서도 활동하며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혹자는 일본이 일찍부터 서구열강과 대등하게 앞서나갈 수 있었던
원인으로 개항(1853년) 이전부터 200년 이상 연구해왔던 난학을 꼽기도 한다.
일본은 노벨상이 제정된 첫해(1901)부터 생리의학상 후보자를 배출했던 나라다. 난학에서부터 비롯돼 오랜 시간 축적된 사회문화적 저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의 첫 노벨상 수상은 이후 반세기 만에 이루어지게 된다. 유카와 히데키가 원자핵 내부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매개하는 중간자를 이론적으로 예측(1935)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1945)했다. 뉴턴 이후의 물리학 연구는 미적분이 기본인데, 뉴턴과 동시대에 세키 다카카즈(1642~1708)라는 에도 시대 수학자가 뉴턴이나 라이프니츠의 미적분과 유사한 계산법을 개발했었다고 전해진다. 학계에서는 당시 일본이 서양 수학계의 최신 연구동향에 교감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석한다.
에도시대의 난학과 비슷한 움직임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것은 병자호란(1636)의 전란을 극복하고도 100여 년이 더 지나서였다. 오랑캐인 청나라가 '중화 문물'을 훔쳐서 지니고 있기에 번영한다고 생각한 조선은 청나라 제도에 반영된 중화 문물을 명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조선에 도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박지원은 <북학의>라는 책을 써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등 실제적인 기술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공학적 실용학문만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기에 원리 탐구의 깊이가 부족해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입장이 실학으로 이어졌기에, 학문 분야별로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하고,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를 강조하며 백과사전식 잡학 지식만 섭렵하는 수준으로 종결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가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세대를 이어 동일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단기 비중복성 지원으로 당장의 성과를 닦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과 한국의 과학기술 분야 노벨상 실적 차이를 수백 년의 문화적 기반 차이로 설명한다면 지나친 역사 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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