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이유로 쫓겨난 볼쇼이악단원들
가짜 악단 꾸려 파리 초청 공연 모의해
한 동료 이름 듣고 의지와 실력 되살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피날레
당연히 러시아 영화인 줄 알았다. 배경이 러시아의 볼쇼이인 데다 등장인물 모두 러시아어로 대사를 날리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화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을 보며 영어 대사가 흘러나옴에도 첫 배경이 인도의 뭄바이라 인도영화인가 보다 했으니, 이보다도 더한 변명거리를 확보한 셈이다. 근데 이 영화 참 이상하다. 그쪽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코믹하다. 러시아라고 어찌 코미디와 위트가 없을까만 지닌 편견으로는 회색빛이 감돌아야 할 것 같았다. 영화는 이런 나의 편협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좌충우돌로 흘러가는 가운데 캐릭터 하나하나 사랑스러워 흐뭇한 웃음을 빚어낸다. 하지만 음악 영화가 지녀야 할 미덕에 기대를 걸었던 관객이 많았나 보다.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해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다며, 긴 세월 호흡을 맞추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좋은 연주를 하냐며 감상평들이 곱지 않다. 너무도 유명한 곡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것과 주인공의 어설픈 지휘 동작도 이러한 혹평에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다. 무협이나 스포츠 영화에서나 봤음 직한, 흩어졌던 고수들이 다시 뭉쳐 영광을 재현하는 순간의 통쾌함이 있다. 음악을 소재로 영화에 말이다. 그러하기에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콘서트 장면에서의 감동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이 순간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의 명곡이 담겼다. 러시아 영화로 착각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급조된 악단으로 떠나는 파리 연주 여행
영화가 시작되면 아름답고도 귀에 익은 선율을 유려히 지휘해 나가는 손동작이 보인다.
"균형을 잃으면 안 돼. 바순은 부드럽게…."
하지만 이러한 도취도 잠시 주인공 안드레이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콘서트홀의 말단 청소부가 현재 그가 지닌 위치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전 볼쇼이의 촉망받던 지휘자였다. 하지만 자리에서 쫓겨난 상황. 도대체 왜? 이유는 유대인을 오케스트라에서 배제하라는 당국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무려 30년 전의 일이며 참담한 시절의 희생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리 샤틀레 극장 측에서 보내온 오케스트라 초청 팩스를 마주한 안드레이는 너무도 황당한 계획을 벌인다. 볼쇼이 대신 연주 여행을 떠난다는 과감하고도 엉뚱한 계획, 그것도 30년 전 흩어진 멤버들을 규합해서 말이다. 더 이해가 불가한 것은 자신의 지휘봉을 꺾었던 KGB의 가브릴로프를 단장으로 세운 것이다. 분명 사정이 있어 보이는 가운데 이를 수락한 가브릴로프는 파리의 극장 측으로 전화를 걸어 뻔뻔하게도 여러 조건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연주하는 곡의 협연자는 반드시 '안네 마리 자케'여야 할 것. 이 또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가운데 이젠 흩어진 단원들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가 문제다.
다행히 생선가게, 채소가게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악기를 불어대거나 거리에서 연주하며 구걸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옛 동료들이 하나둘씩 의기투합한다. 또 하나의 걸림돌이었던 여행 경비는 재벌 트라키아킨이 해결해 주기로 하지만 조건은 아마추어 첼리스트인 자기를 단원으로 데리고 가라는 것. 턱도 없는 실력이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안드레이와 역전의 용사들이 드디어 우당탕퉁탕 파리로의 연주 여정에 오른다. 준비가 한참이나 모자라지만 파리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볼 요량이다.
24시간이어도 부족했을 예행연습을 한 번도 없이 시작한 연주회. 오랜만에 하는 연주이니 손가락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고 자신의 파트가 어디인지도 헛갈리는 진땀 나는 상황에서 펼쳐진 그들의 사운드는 어땠을까? 한마디로 엉망, 도대체 일류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없는 역량에 청중들은 당황하고 악평을 준비하던 평론가는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방문에 표는 일찍이 매진되었고 객석은 빈자리를 찾을 수 없는 상황. 이대로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인가 하는 바로 그 순간, 바이올린의 독주가 시작되고 그나마 음악이라 할만한 연주에 모두가 매료되어 간다. 그런 가운데 가장 감명을 받은 이는 단원들인 듯하다. 이제 굳었던 손가락, 아니 음악적 기량이 복원되었다. 30년 전의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13분 채우는 차이콥스키
이때의 감동적인 장면을 이끌어 가는 음악은 무엇일까? 바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1840~1983)의 '바이올린 협주곡'(Concerto for Violin and Orchestra in D major, Op.35)이다.
1878년 봄, 제자였던 코테크가 스위스 제네바 호수 근교의 클라렌스에 머물던 차이콥스키를 찾았다. 당시 작곡가는 파경에 이른 결혼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 긴 요양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코테크는 악보 하나를 보여주었고 차이콥스키는 창작의 열정에 휩싸인다.(코테크가 보여준 악보는 스페인의 작곡가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으로 교향곡이란 제목을 달았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의 형식을 지녔다.) 이때 받은 음악적 착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그를 후원하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늘 나는 불타는 영감에 한없이 타올랐답니다. 지금 작업하는 이 곡은 가슴을 파고드는 강렬한 음악이 되리란 예감입니다."
"지금 작업하는 협주곡은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끌렸으며 하루 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작업은 순조로웠지만 세상에 등장하기까지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작곡의 계기를 만들어 준 제자 코테크에게 먼저 초연을 부탁하였지만 일단 실력 자체가 부족한 데다 스승과의 스캔들이 두려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차이콥스키는 당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초연을 부탁한다. 악보를 받아 든 아우어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초연을 약속했다. 하지만 2년이 넘도록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너무 어려워 '연주 불가능'이라는 것이며 전체적으로 손을 봐야 한다는 이유였다. 확신을 가졌던 곡이기에 더욱 애정이 담겼을 곡에 이러한 평가라니 작곡가로서 상당히 불쾌했겠고 피아노협주곡 역시 비슷한 연유로 초연이 거부되었단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협주곡 분야 초연자 찾기에 차이콥스키는 참으로 운이 없다. 하지만 곡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차이콥스키에게 손을 내민 이는 '브로드스키'였다. 당시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였던 그는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1881년 12월 마침내 초연을 이루어 낸 것이다.
"미친 듯이 연습에 매달렸고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물론 쉬운 작품은 아니지만 노력하였고 이제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느꼈을 때 초연을 결심하였습니다."
이토록 힘겹게 이루어 낸 초연이지만 평론가들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시 빈 음악 평론계의 핵심이었던 한슬리크는 심한 러시아적 악취가 풍긴다고 하였다. 막스 칼베크는 청중을 유혹하는 괴이한 음악이라고도 평했다. 하지만 곡에 대한 브로드스키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이뤄진 연주회를 통해 보란 듯 성공을 이루어 낸다. 당연히 애초 예정되었던 헌정자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곡이 헌정되었고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언급하며 그의 이름은 빼놓을 수 없는 역사가 되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하였음에도 아무도 나타나질 않는다. 단원들은 돈벌이하며 그리고 파리의 정경을 즐기며 이곳에 온 목적인 콘서트에 관심이 없다. 그런 그들에게 안드레이는 한 통의 짧은 문자를 보내었고 이를 본 단원들이 하나둘 공연장으로 모여든다.
"레아를 위하여."
레아는 누구일까? 누구길래 단원들의 발길을 돌리게 하였을까? 그렇다면 독주자로 지목한 안네는 누구일까?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에서 도대체 무엇을 찾았고 느꼈기에 단원들은 각성했던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13분, 들려오는 선율만큼이나 안타깝다고 슬픈 사연이 밝혀진다.
/심광도 시민기자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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