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짝 같은 침상·화장터·가스실
나치 학살극 참상 온전히 전달
학살 뉘우치지 않는 일본 상기
국군 베터남전 학살도 반성돼
전운 높아가는 남북 안타까워

7월 2일부터 15일까지 독일의 여러 지역과 기구에서 에너지와 정치, 생태 공동체를 살펴보고 온 전희식 작가의 탐방기를 여섯 차례 싣는다. 전 작가는 후쿠시마 핵 발전소 폭발 직후인 2012년에도 열흘 동안 독일의 탈핵 프로그램을 취재하여 본보에 연재한 적이 있다.

심리학에서 시행한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조금 변용해서 소개하자면 이렇다. ① 강제로 동굴 속에 가뒀다가 한 시간 뒤에 풀어준다. ② 한 시간 뒤에 꺼내줄 거라고 말하고 동굴에 가둔다. 물론 한 시간 뒤에 풀어준다. ③ 중요한 실험이니, 한 시간 동안 동굴 안에 있다가 나오라고 하면서 정 나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와도 된다면서 문이 열리는 자동 스위치를 준다. 

세 번째 사람은 기대했던 대로 1시간 머물다 나왔다. 세 사람이 동굴 속에서 보낸 한 시간이 각각 어떠했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생사여탈의 선택권을 빼앗기고 희망이 없을 때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희망이 있으면 어떤 악조건도 견딘다.

독일 다하우 수용소 정문에 있는 시체를 표한한 조형물. /전희식 작가
독일 다하우 수용소 정문에 있는 시체를 표한한 조형물. /전희식 작가

내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가서 이 심리학 실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수용소 시설에 갇힌 사람들의 목제침상과 화장터, 가스실 등을 보며 당시의 공포와 절망이 너무 생생해서다. 생체실험실 도구들과 그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얼굴 사진도 봤다. 다하우 수용소의 정문에 지금도 원형 그대로 보존된 ‘노동은 신성하다’ 또는 ‘일하라. 그러면 자유로울 것이다(ARBEIT MACHT FRE)’라는 문구가 기가 막혀서다.

7월 8일 오전 일찍 우리는 베를린 외곽에 있는 숙소에서 걸어 나와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여행자들의 여유가 한껏 묻어나는 행렬이었다. 자유시장이 열리는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독일 일반 가정에서 가져온 골동품과 수제품들을 신기한 듯 구경할 때만 해도 곧 직면하게 될 나치의 강제수용소 실상을 상상하지 못했다.

전전날에 자유 시간이 있기에 나는 일행 몇 명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남쪽에 있는 유대인 학살 추념 공간에 갔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크기의 콘크리트 관이 2700여 개나 설치되어 있다. 뒤쪽으로 갈수록 관 모양의 추념비는 점점 커져서 사람 키보다도 커진다. 가슴이 철렁한다. 관 숲에 갇힌 느낌이다. 새까만 관 기둥들 속에서 일행을 잃는 순간이 많았다. 

줄을 서서 한참 기다렸다가 지하 전시실에 들어갔다. 지하의 전시실에는 사진과 입체영상으로 나치 학살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담고 있다. 바닥과 벽면, 천장이 한 덩어리로 당시의 참혹함을 웅변하고 있다. 베를린 도심에 이런 공간을 설치한 독일이다. 독일 나치는 유대인, 집시, 장애인, 포로,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원 등을 총살, 계획적인 영양실조, 생체실험, 가스실, 강제노동의 방법으로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그런 역사를 낱낱이 까발리는 나라 역시 독일이다. 빛이 바래고 귀퉁이가 찢긴 손 편지도 전시되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서 고향 집 새끼 고양이의 안부를 묻는 내용은 차라리 읽는 이에게 고문이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은 일본은 지난달에 야당 의원의 진상조사 의향 질문에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진상조사나 보상할 계획이 없다”라면서 “그런 유언비어(조선인 학살)가 떠돌지 않도록 단속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런 일본 정부를 보며 나는 더 주의 깊게 다하우 수용소를 둘러보았다. 

다하우 수용소의 중앙대로도 압도적 위용을 드러낸다. 20여m 되는 중앙로 양옆으로 거대한 가로수가 서 있다. 중앙로 좌우편에는 막사들이 있다. 아침마다 중앙로에 모여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공간과 시설물은 통제와 심리 압박에 효과적으로 구축되었다고 한다. 

3.1 만세 운동 때 일본은 최대 7500여 조선인을 살해했다.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 8년간 30만 군인을 파병해서 최대 9600여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판박이다. 지난 2월 한국 재판부가 “한국군의 명백한 불법행위로 민간인을 죽였다”라면서 “원고인 베트남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지만, 한국 정부는 “우리 군이 가해자임을 입증할 수 없고, 게릴라전 특성상 정당 행위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일과 독일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벌인 반인도주의 범죄를 최고 수준으로 반성하고 시정한다. 그래서 다하우 수용소를 샅샅이 돌아보았다.

날이면 날마다 미국 핵 항공모함과 핵 투발기를 한반도 상공에 끌어들이고 핵미사일 실험을 하는 남북한을 보며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치 독일의 범죄는 한 국가나 집단이 너무도 쉽게 집단 최면상태에 들어 잔악 행위를 번제 드리듯이 해내는 끔찍함을 보여준다. 기후재난에 처하고 팬데믹을 겪었으면서도 하는 짓을 보면 지금의 인류도 어떤 최면상태가 아닌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한 지식인은 말했다. “한국은 북한 문제에 관한 한 거대한 정신병동 같다.”라고. 어디 북한은 안 그러랴.

독일 가기 전에 각종 자료를 뒤져가며 공부했는데 <존 라베>라는 영화도 충격적이었다. 열렬한 나치 당원인 주인공이 1937년 난징 학살 사건이 터졌을 때 자신의 안전과 지위, 목숨까지 걸로 일본군으로부터 난징 인민들을 15만 명이나 구해내는 실화 영화다. 폴란드에 오스카 쉰들러가 있다면 중국 난징에는 존 라베가 있었다. 

영화에는 고귀한 인도주의자인 미국인 의사보다 악랄한 맹렬 나치주의자인 존 라베가 더 희생적으로 사람들을 구해낸다. 사람이 어떤 때에 잔혹하고 어떤 때에 자비심과 헌신을 발휘하는지 정말 수수께끼 같다. 

내가 사는 장수에 소녀상 건립 운동이 벌어졌을 때 나는 제주도 강정마을처럼 소녀상과 베트남 피에타상을 나란히 세우자고 했다. 일제의 잔학행위를 언급하면서 한국의 민간인 학살을 같이 기억해야 우리는 전쟁과 침략의 굴레에서 벗어나겠기에 그랬다. 물론 성사되지 못했다. 

기억의 전쟁.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이다. 전쟁의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전쟁. 자기 결정권. 자기 결정권은 성 주체성에 관한 얘기로 한정할 수 없다. 국방, 안보, 남북 교류, 통일에 우리는 온전한 자기 결정권을 손에 쥐어야 하리라. 희망을 일구며. 

 


 

학살자의 실명을 또박또박 적어 넣은 다하우 수용소

“‘국가 안보를 위해’ 체포된 수많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위해 강제수용소를 세울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나치 친위대 중앙위원이자 경찰국장인 Heinrich lmmler가 말했습니다.”

수용소 전시관 안의 커다란 직립 걸개 안내판에 적혀 있는 글이다. 이처럼 희생자들의 사진 옆에는 학살자들의 실명이 또박또박 적혀 있다. 오죽하면 가스실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나체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진 옆에도 당시의 지휘관들 이름이 죽 붙어 있었다. 놀랍고 놀랍다.

학살자 이름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는 모습. /전희식 작가
학살자 이름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는 모습. /전희식 작가

집시와 장애인과 유대인과 공산당원과 노동조합원들을 인체 실험하는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전시된 곳이었다. 독일군 조종사가 추락하여 바다에 빠졌을 때, 몇 시간 안에 구조해야 생명을 건질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생체실험이었다. 차가운 겨울 바다와 같은 얼음 통 안에 사람을 집어넣고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실제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내판에는 온도와 염도, 날씨 등의 조건을 달리해 가면서 실험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 사실 못지않게 이를 공공연히 폭로하는 그 전시실도 소름 돋게 놀라웠다.

비행기가 고공으로 올라가서 기압이 내려가고 산소가 희박해지면 조종사가 버티는데 한계치가 어떤지 생체 실험을 하는 사진들도 있었다. 의사들이 죽어가는 피험자들을 둘러싸고 계측치를 검사하는 사진이었다. 나는 구글 이미지 번역기로 모두 한글 사진을 찍었다.

독일 최초의 나치 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비판적인 정치인과 종교인들이 체포되어 감금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유대인을 잡아들였다. 폴란드와 소련에서 온 죄수들과 유대인들을 수용하면서 20여만 명이나 이 수용소를 거쳐 갔다. 전염병인 발진티푸스가 이 수용소를 휩쓸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 수용소의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 벽면 위로 철골 구조물로 만든 추념 작품이 있다. 시신들이 마구잡이로 널려 있는 작품이다. 우리를 안내한 분은 유재현 님이다. 베를린 근교에서 유기농장을 경영하는 예술기획자다. 독일로 유학 와서 정착하신 분이다. 1일부터 서울 망원동의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에서 전시회도 한다. 

/전희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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