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 톨스토이 1500쪽 대작 영화화
19세기 러시아 사교계 사랑·불륜 그려
차이콥스키 교향곡으로 분위기 고조
비극으로 치닫는 안나 이야기 '비창'해
소설로서 이미 그 가치가 증명된 작품들을 영상화한다면 문득 쉬울 듯하여도 무척이나 고달프고도 위험한 작업일 것이다. 이미 안정적인 플롯을 지니고 있어 약간의 각색과 대본작업으로도 걸작이 탄생할 수 있으니 매력적인 재료로 다가오겠지만 오직 글로써만 가능한 뉘앙스를 어떻게 화면으로 표현할 것인가. 직전 소개한 영화 <프라하의 봄> 역시 그 시도는 존중 받았으나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지닌 간결한 문체와 철학적 깊이를 오롯이 담아내었는가에 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이처럼 어렵다 할 작업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어떤가? <전쟁과 평화>와 더불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Tolstoy·1828~1910)의 대표작이자 근대소설의 최고봉. 톨스토이가 탐탁지 않았던 도스토옙스키마저도 그를 예술의 신이라 칭송하게 만든 걸작. 게다가 한글 번역본으로 1500쪽이 넘는 이토록 방대한 서사를 어찌 2시간 남짓의 짧은 영상으로 녹여낼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해도 녹록지 않을 이 작업에 의외로 많은 도전자들이 나섰다. 영화로만 5번, TV 드라마까지 포함한다면 무려 30여 편에 이른다. 이 중 가장 최근의 영화라면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2012년 버전으로 익숙하겠지만 여기서는 1997년 버전을 추천한다. 분명 컬러영화임에도 마치 흑백처럼 느껴지는 영상들은 더욱 러시아적 감성에 빠져들게 하며 그 시절 그 장소로 데려다 놓는다. 더불어 안나 역을 맡은 '소피 마르소'의 절정의 미모를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심(私心)일지라도 빼놓지 않겠다.
◇ 4명의 교차되는 사랑과 불륜 이야기
영화는 레빈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며, 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대비를 이룬다. 불륜과 사랑, 비극과 희극이다.
모스크바의 눈부신 날, 얼음의 나라답게 강은 얼었고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레빈의 눈에는 오직 키티뿐. 레빈은 착하고 순결한 그녀를 사랑하며 고백의 순간을 재고 있다.
브론스키는 촉망받는 군인이자 귀족, 게다가 미남이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를 마중 나간 모스크바역에서 우연히 마주한 어느 여인에게 마음을 뺏겨 버린다. 바로 안나다. 하지만 그녀는 고위직의 남편과 8살 아들을 둔 유부녀다.
레빈이 용기를 내어 키티에게 청혼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녀의 마음이 브론스키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론스키의 심장엔 이미 안나가 자리했으며 이를 무도회에서 목격한 키티는 슬픔에 빠진다. 한편 안나는 브론스키의 끊임없는 구애가 버거워 급히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일정을 재촉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따라나선 브론스키의 열정에 그녀의 마음이 열리고 둘의 사랑이 시작된다. 잠시 멈춰 선 기차에서 내려 서로 마주하는 장면은 너무도 아름답다.
아예 거주지를 안나가 살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버린 브론스키. 서로의 사랑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이제 둘의 관계는 사교계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은 둘의 관계를 의심하며 정숙을 요구하지만 안나를 향한 사랑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흠집이 날까 두렵다.
그러던 어느 날, 장교들의 경마에서 안나는 자신의 본심을 공공연히 드러내 보이고 만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남편과의 관계는 파행으로 치닫고 그렇게 사교계뿐 아니라 남편과의 관계도 끝이 났지만 사랑에 자유를 얻는다.
이제 그녀에게는 이 사랑만이 전부다. 하지만 남겨진 현실은 잔혹하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렇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자유로이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괴로우며 브론스키와 가진 딸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몸마저 상했다. 아름답던 그녀는 초췌해져 가고 나날을 약물로 견뎌가는 와중 이젠 정신마저 온전치 않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안나. 과연 그녀의 삶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 차이콥스키 '비창' 불길한 결말 암시
모스크바 강변을 배경으로 레빈의 모습을 비추며 그의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때의 장면을 배경으로 흐르는 선율을 듣자니 이 영화의 마지막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첫 대면한 기차역에서도 다가올 미래가 들려온다. 인부 하나가 기차 바퀴에 끼여 사망하였고 이를 목격한 안나는 '불길한 징조'라 읊조린다. 이 장면에서도 같은 곡의 선율이 흐른다. 이 모두가 음악으로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 것이라니 도대체 어떤 곡일까?
바로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 (Pyotr Tchaikovsky·1840~1893)가 남긴 교향곡 6번 '비창'(Symphony No. 6 B minor 'Patheque')이다. 제목에서도 보이듯 절망으로 치달아 마침내 나락으로 침잠하는 비통한 정서로 가득한 작품이다. 하니 어찌 기쁜 결말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저음의 현악기들과 목관악기 중 가장 우울한 바순의 음색이 화면을 감돌며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선율로 제1악장의 제1 주제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악상이 잠잠해지면 사랑을 호소하듯 애절한 선율이 등장한다. 1악장의 제2 주제로 글렌 밀러(Glenn Miller)에 의해서 1942년 'The Story Of A Starry Night'란 제목으로 발표되어 인기를 끌었던 선율이기도 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가 멈춘 사이 잠시 내려선 안나가 그녀를 따라나선 브론스키를 발견, 서로를 바라보던 장면에서 흐른다. 이때 브론스키의 표정은 '당신의 사랑이 없다면 나의 목숨도 없는 것입니다'라 말하는 듯 하니 참으로 장면과의 상성이 절묘하다 할 음악적 선택인 것이다.
영화의 중반에 이르면 제2악장의 선율이 등장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탈리아 여행 장면에서다. 함께 누렸던 짧은 행복의 순간. 러시아 춤곡의 양식을 취하고 있어 교향곡 '비창'의 악장들 중 그나마 밝은 기운이 서렸지만 이마저도 불안하여 휘청거리는 리듬이 마치 그들의 불안한 심정을 들려주는 듯하다.
그리고 비극의 응축 제4악장, 구축된 절망이 마침내 심연을 향해 치닫는다. 비통한 현악의 울음이 악장 전반을 휘감는 가운데 어쩌다 운명에 대항하여 울부짖어 보지만 이 또한 부질없이 추락, 더욱 깊은 나락으로 꺼져 내릴 뿐이다. 이러한 선율이 배경이 되어 안나는 몸을 던진다. 브론스키를 처음 만났던 역, 기차가 들어서는 철로 아래로.
◇ 러시아 대표 예술가 작품 만나 시너지
이처럼 영화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두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그것도 대표 작품이 엮였다. 이야기로 그리고 음악으로. 일면 이게 무슨 만용인가 싶지만 그 효과는 놀랍다. 마지막 밀려오는 비통함과 허무함, 절망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아니 엉금엉금 가는 어느 인생이 장면으로 보이는 동시에 음악으로 들린다. 이 중 하나만이라도 아연할 터인데 눈과 귀를 동시에 파고드니 어찌 비창하지 않을까.
"꺼져가는 촛불, 스러져가는 더블 베이스의 피치카토."
/심광도 시민기자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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