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한 위대한 문학가의 사망소식이 들려왔다. '밀란 쿤데라',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문화 예술 중심지 브르노에서 태어나 시대의 격류에 휘말리며 1975년 망명, 프랑스인으로 살아갔던 개혁자. 삶과 존재에 관한 성찰을 담은 이야기를 철학적 문장으로 녹여낸 소설가. 어느 예술가이든 세상을 떠난다면 다시 한번 그의 작품이 재조명, 현재 그 가운데 있으며 많은 이들이 추모하듯 서점으로 향하고 구석에 숨었던 그의 글들이 매대의 중앙을 차지했다.
'이런 작품들이 있었나?' 송구스레 들여다보던 가운데 한 제목만은 너무도 친숙하다. 제목만으로도 이미 명작의 향기를 풍기는 작품들이 있지 않은가. 소설로는 <깊이에의 강요>, <어린 왕자> 등이며 최근의 영화로는 <놉>과 <헤어질 결심> 등이 떠오른다.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제목만큼은 주워들었을 현대 소설의 명작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프라하의 봄>은 어떤가. 1968년 프라하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자 소설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필립 코프먼'이 감독한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의 원제 역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국내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란 제목으로 1989년 개봉하였다.)
◇세 남녀의 삶을 뒤흔든 소련군
1968년의 프라하. 외과의 토마스는 사비나라는 매력적인 애인을 두었음에도 자유로운 섹스에 거리낌이 없다. 소위 말해 바람둥이. 사비나 역시 못지않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둘의 관계는 속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방으로 출장을 간 토마스가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테레사에게 반해 작업에 나선다. 하지만 실패, 여지만 남겨둔 채 프라하로 돌아온 토마스에게 며칠이 지나 테레사가 찾아온다. 둘은 사랑의 격정에 휩싸이지만 토마스의 여성을 향한 집착은 멈추지 않는다. 이를 참다못해 뛰쳐나온 테레사 앞에 펼쳐진 공포스러운 장면.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로 밀려온 것이다. 흑백의 다큐멘터리 양식으로 장면이 지나며 그녀는 손에 든 카메라로 궐기에 나선 시민들의 모습을 담아내며 참상을 고발하려 한다. 하지만 소련 당국에 의해 저지. 더 기가 막히는 건 그녀가 찍은 사진들이 시위 참가자를 체포하는 증거자료에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아연해진 토마스와 테레사는 스위스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미 와있던 사비나와 재회, 둘은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토마스는 육체적으로 테레사는 예술로.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 역시 적응하지 못한 채 다시 체코로 돌아온다.
이미 달라진 정세에 토마스는 의사로 복귀하지 못하고 창문닦이로 전락한다. 그러다 자신을 유혹한 여성과 하룻밤을 들켜버리고 이에 절망한 테레사는 자신 또한 하룻밤을 충동으로 내던진다. 이제 모든 것을 거두어 한적한 시골로 향하는 두 사람. 미국으로 건너간 사비나는 이런 둘의 소식을 우편물로 접한다. 가벼움에 흩날리다 평온을 찾아 떠난 두 사람. 과연 그들은 행복을 찾았을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깊이로의 삶으로 스며들었을까? 아니 가능하긴 한 것일까?
◇야나체크 '생략의 미학' 쿤데라 소설과 잘 어울려
만약 감독이 이 영화에 어떤 음악을 가져다 쓸까를 고민했다면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op.135'가 먼저였을 것이다. 소설 속에 곡의 제목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자필 악보에 쓰인 '그래야만 하는가?' (Must it be) '그래야만 한다'(It must be)는 지금도 음악사에 수수께끼로 남았고 그 모호함으로 인해 여러 해석이 가능해 소설의 품은 주제적 은유로도 해석될 수 있다. '가벼울 수밖에 없는가?' '가벼울 수밖에 없다.'
이런 좋은 재료를 두고 영화가 선택한 작곡가와 곡은 체코 출신의 '야나체크'(Leos Janacek·1854~1928)이며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음화(音化)한 '잡초가 우거진 오솔길에서' (On an Overgrown Path)이다. 곡은 영화의 음악적 순간을 상당 부분 차지하는데 원작자 밀란 쿤데라의 강력한 권유였다. 왜 그랬을까? 먼저라면 전하려는 메시지, 그리고 스타일에서의 적합성 때문이다.
사실 쿤데라가 글로 이루어낸 것을 장면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문구들, 그리고 베일 듯 날카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생략의 문체를 어떻게 영상으로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선택은 야나체크였고 수필적이며 간결한 곡상이 그 이유였다.
다음은 작가의 개인적 선호다. 자신의 고국과 관련한 미학적 유전자가 야나체크의 음악에서 왔다고 피력했을 정도다. 쿤데라의 예술적 양분은 음악으로부터 기인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실력 또한 상당했다. 젊은 시절 그의 꿈은 소설가보다는 음악가였으며 작곡에도 몰두했다. 아버지 루드비크 쿤데라는 브르노 음악원의 원장을 지낸 저명한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였으니 괜한 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바로 야나체크의 제자였고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 예술적 뿌리로 깊이 자리 잡았다.
쿤데라는 야나체크의 음악으로부터 '생략의 미학'을 배웠다고 피력했으며 배운 것은 그대로 자신의 문체가 되었다. 생략은 본질로 향해 가는 지름길이라고, 그리고 이러한 것이 야나체크의 음악에 담겼다고 그는 생각했다. 단순함의 미학을 내세운 프랑스의 작곡가 '에릭 사티'가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러한 음악적 스타일의 정점에 '잡초가 우거진 오솔길에서'가 있다. Book 1의 10곡, Book 2의 5곡, 총 15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는 Book1의 10곡만이 자주 연주된다. 1901년에서 1908년에 걸쳐 작곡되었으며 20대에 써둔 스케치를 바탕으로 하며 아름답던 순간의 회상,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을 표현한다. 한마디로 피아노로 써 내려간 자전적 수필인 것이다.
이 중 영화에 등장하는 곡은 무려 Book1에서만 5곡이며 전곡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리고 Book2의 13번까지 한다면 모두 6곡이다. 이 중 가장 많은 장면에 등장하는 곡이라면 제4곡 '프리데크의 성모마리아'(The Madonna of Frydek)다. 테레사가 수영을 하거나 잠들었거나, 그리고 토마스와 재회하는 장면에 걸쳐 등장하는 소위 테레사의 테마인 것이다. 소설 속 테레사는 깊이와 무거움의 은유요 의인화이다. 그래서 이름도 테레사이며 주제곡 역시 성모마리아다.
◇무의미를 사랑하게 된 밀란 쿤데라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은 이러한 문장들로 시작한다.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쿤데라는 그의 마지막 소설 <무의미의 축제>(2014)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제 나에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다르게, 더 강력하고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이죠,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우리는 그 무의미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도 모른 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아름답지 않나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가벼움을 참을 수 없던 쿤데라, 삶의 끝자락에서 무의미를 사랑하게 된다.
/심광도 시민기자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관련기사
잠깐! 7초만 투자해주세요.
경남도민일보가 뉴스레터 '보이소'를 발행합니다. 매일 아침 7시 30분 찾아뵙습니다.
이름과 이메일만 입력해주세요. 중요한 뉴스를 엄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