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너소사이어티, 인생 최고의 후회 없는 선택이 될겁니다"

★아너소사이아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데…. 돈이 많거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저 고향에서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면서 내가 받은 것을 어떻게 돌려줄까 고민하는 그 정도입니다. 뭐 나눔에 대해 깊은 생각이 있거나, 남 앞에 나서서 설득할 뚜렷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하려니 쑥스럽습니다."

한철수(64) 회장. 그는 경남아너소사이어티 5번째 회원이면서 아너소사이어티를 모으고 관리하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 밖에도 고려철강을 운영하는 대표이자, 창원상공회의소 마산지회장이라는 직함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직책에서 알 수 있듯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한 회장. 그가 꿈꾸는 함께 어울려 사는 나눔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구김 없이 자란 유년시절

한 회장은 스스로 마산 토박이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 잠시 서울에서 있었을 뿐 마산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마산에서 살면서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마산 중성동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지금 백제삼계탕 근처 그쪽 동네라고 보면 돼요. 지금은 1남 3녀 장남인데…. 어릴 때 남동생이 죽었어요. 그때는 퇴비 증산한다고 풀을 베오라고 학교에서 시키고 그랬어요.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북마산 파출소 아래로 흐르는 하천에 가서 며칠 풀을 벴는데 동생이 따라다녔죠. 그때 하루는 모기에 심하게 많이 물렸는데 그러고는 동생이 시름시름 아프다가 죽었어요. 뇌염이라더군요. 그래서 아직도 죄책감이 있어요. 그 기억 외에는 별일 없이 유복하게 유년시절을 보낸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마산공고 선생님이셨죠. 그리 잘 사는 집은 아니었어요. 그냥저냥 밥걱정은 안 하는 그 정도 형편이었습니다. 대학 때 빼고는 모두 마산에서 살았네요. 그러니 제게는 특별하고 고마운 곳이죠. 이곳에 태어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먹고 살게 해줬으니까요. 허허."

한 회장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곧잘 했다.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 엘리트 코스라 불리던 마산중학교,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진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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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철수 주식회사 고려철강 대표이사./박일호 기자

"아버지 별명이 냉장고라고 꽤 엄한 분이었어요. 외할아버지가 독립투사 죽헌 이교재 선생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도 올곧고 꼼꼼하고 엄한 편이셨어요. 특히 어머니가 공부에 애착을 많이 보이셔서 제가 어릴 때부터 숙제나 공부하는 것을 꼼꼼히 챙기셨죠. 그 덕에 공부는 잘했어요. 허허. 그런데 중학교 갈 때는 재수를 해서 들어갔습니다. 시험을 치다 한 과목 실수를 해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성호초등학교를 1년 더 다녀서 7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을 수줍음을 몹시 많이 타는 소심한 성격의 소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 성격이 바뀐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반장을 한 것이 계기였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반장을 했어요. 그때는 학생들이 선출하지 않았고 담임선생님이 지목하는 방식이었죠. 반장을 하라고 하는데 잠을 못 잘 정도로 진짜 스트레스였어요. 얼마나 소심한 성격이었으면 그랬겠어요. 그런데 반장을 하면서 남 앞에 나서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고, 자신감이 붙었어요. 그 뒤로 완전히 성격이 바뀌었죠. 아니 원래 제 성격이 외향적인 것을 그때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죠. 아무튼 그게 아마 제 인생 첫 번째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대학, 새로운 세상을 접하다

그는 기계공학과 선택은 실수였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대학생활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이공계 쪽 학교를 다닌 영향으로 아무 생각 없이 기계공학과로 진학했습니다. 고려대 기계공학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담임선생님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셨답니다. 원서 넣고 한두 달 미친 듯이 공부해서 합격했죠. 그때가 한창 산업화가 시작하는 시기여서 기계공학과 나오면 바로 취직되던 때입니다. 아버지 바람대로 아무 이견 없이 진학한 거죠. 그런데 수업이 너무 재미 없어서 못 하겠더라고요. 제도하고 설계하고 이런 것이 전혀 적성에 안 맞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는 인문학 계열이 적성이 맞아요. 나중에 친구들과 이념서클에 가입을 했어요. 청년문제연구회라고. 실제 학교생활 기억은 서클 활동했던 게 더 많아요."

하지만 1학년을 마친 그는 건강이 악화해 휴학을 하게 된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더 힘든 시기를 보냈을 것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1학년 마치고 겨울 방학 때 마산에서 지냈어요. 방학이 끝나가는 때인데 기침이 계속되고 얼굴도 그렇고 몸이 영 안 좋아 진찰을 해봤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결핵으로 폐가 한쪽이 완전히 구멍이 나 있었어요. 바로 가포 결핵병원에 입원했죠. 병원에서는 상태가 안 좋아 폐 한쪽을 잘라내자고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3대 독자인 제 몸에 손을 댈 수 없다고 거부해서 그냥 치료만 하기로 했어요. 병원에서는 쉽게 치료가 안 될 거라고 했는데…. 6개월 만에 기적같이 싹 나았어요. 의사도 놀랐죠. 어머니가 개소주부터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챙겨주시고 돌봐주시고…. 지극정성으로 아들 완쾌되길 빌고…. 그 덕에 나았어요. 완전히 싹 나아서 나중에 군대도 문제없이 갔죠. 물론 3대 독자라서 6개월 방위로 근무하다 제대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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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철수 주식회사 고려철강 대표이사./박일호 기자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그는 4학년이 되면서 청년문제연구소 서클 회장이 된다. 당시 유신 시절이라 계엄령이 내려지고 대학가에서는 연일 집회가 열리던 시기였다. 한 회장도 이러한 현실에서 비켜설 수는 없었다.

"서클 활동을 하면서 선배들이 대학생으로서 그 시대에 고민해야 할 것들을 많이 깨우쳐줬죠. 그때부터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었어요. 사실 그전에는 온실 화초처럼 공부만 하면서 어려움 없이 자랐으니 세상을 잘 몰랐죠. 야학 선생도 해보고 또 노동현장도 경험하면서 세상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죠. 힘들게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노고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요. 또 그때 한참 데모를 많이 하던 때라 서클 선후배들이 많이 잡혀가서 구속되고 그랬죠. 설훈 의원이 마고 동문이고 같은 서클회원인데 설 의원도 그때 구속됐죠. 저도 경찰에 여러 번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지만 구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서클 회장을 맡았지만 구속되지 않은 것은 제가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교직에 계시니 아버지에게 악영향이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제가 3대 독자다 보니 집에서 걱정을 많이 하셨고요. 저도 심려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짙었어요. 어떻게 보면 비겁했죠. 참 그때 심적인 갈등이 말할 수 없이 심했죠. 그때 고민하고 미안해하는 저를 보고 설훈 의원을 비롯해 선후배들이 '나중에 준비가 되면 그때 세상을 위해 나서면 된다. 성공해서 열심히 돈 벌어서 세상을 위해 보람있게 사용해라. 그러면 된다'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고 그랬죠. 그때 그게 부채의식으로 남아 제가 나눔을 실천하는 한 계기가 된 것이라 생각해요."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장 취직했다. 당시 창원공단이 들어서던 때라 창원에도 대기업이 속속 입주하고 있었다. 그는 기아기공에 입사해 구매업무에 배치된다. 그것이 인연이 돼 철강유통 분야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됐다.

"78년도였으니까 제가 27살 때일 겁니다. 기아기공은 졸업 전에 1월 1일부터 출근하라고 하더군요. 그때 처음 발령받아서 근무한 데가 구매부서였습니다. 탱크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철강과 특수강을 구매 주문하는 부서죠. 이게 계기가 돼서 아직도 철강 분야에서 밥을 먹고 있습니다. 허허. 운명인가 봅니다. 딱 3년 다니고 퇴사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려고 대학원 진학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안 되면 차선책을 철강유통 회사를 차릴 생각을 했습니다. 철강 유통 마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좀 쉴 틈도 없이 다른 사람이 이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이 급해졌죠. 부랴부랴 교수하겠다는 꿈을 버리고 사업에 뛰어들었죠."

1981년 그는 고려철강이라는 이름으로 철강유통회사를 설립한다. 직원이라고는 한 회장 혼자밖에 없었고 회사 집기라고는 책상과 전화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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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철수 주식회사 고려철강 대표이사./박일호 기자

"지금의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고속버스 터미널 뒤쪽에 남의 사무실 한쪽에 전화 하나 놓고 더부살이로 시작했어요. 기아기공하고 거래했죠. 점점 성장하면서 1985년에는 자유무역지역 정문 맞은 편에 60평 사무실을 사서 이전했습니다. 그때는 화물차를 사서 직접 운전해서 배달 다니기도 했고요. 급할 때는 경리 아가씨랑 둘이서 직접 철근을 싣고 내리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1991년 봉암공단에 250평 규모 공장을 지어서 이전했습니다. 그때 매출이 처음으로 100억 원을 돌파했습니다."

고려철강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신촌리 진북일반산업단지 내에 공장을 두고 있다. ㈜세아베스틸(옛 기아특수강), 세아창원특수강(옛 삼미특수강), 한국철강㈜의 대리점으로 자동차·산업기계·공작기계 구조용강, 방위산업용 특수강과 파이프 등 철강·특수강을 취급하는 유통업체다. 철강·특수강 생산업체로부터 원자재를 받아 수요자 요구에 따라 1차 가공 후 공급하는 방식이다. 2010년에는 특수강 유통회사인 고려스틸을 별로도 설립해 사업을 확장했다. 전화 하나로 시작한 회사는 지난해 매출이 700억 원가량이며 현재 3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동안 사업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기업 대부분이 그렇지만 고려철강 역시 IMF 외환위기가 부도와 직면했던 가장 힘든 시기였다.

"초창기에 우리가 부품을 장착한 제품을 공급했는데 문제가 생겨서 4억 원에 가까운 손해 배상을 한 경우가 있었어요. 그때 초창기였으니까 4억 원이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지인에게 보증을 섰다가 제가 대신 다 갚아야 하는 일도 있었죠. 한 5억 원 정도였는데 그때도 휘청했어요. 두 번 다 힘들게 견뎠죠. 가장 힘들었던 때는 뭐니뭐니해도 IMF 외환위기입니다. 그때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나면서 이후 외환위기가 찾아왔지 않습니까. 저희 주거래업체가 기아그룹입니다. 기아그룹과 거래하는 업체는 모두 위기였죠. 동종업체 절반은 부도가 났어요. 저도 부도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돈은 없고 어음은 돌아오고 진짜 너무 힘들어 며칠을 고민했어요. 부도를 내고 다시 재기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버티느냐를 두고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폐결핵 이후에 한 30년 만에 그때 담배를 피웠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밤에 부도가 나서 힘들어하는 꿈을 꾸다가 얼마나 많이 깼는지…. 다시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사실 부도내고 다시 재기하는 것이 금전 손실이 더 적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죠. 고향이 여긴데 토박인데 불명예스러운 짓을 해서는 되겠느냐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버텼죠. 기업에서 신용이 생명인데 신용을 버리면 다시 회생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그가 위기를 넘을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쌓아온 신용 덕이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기는 데는 대략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신용이 좋아서 한 20억 정도 외상으로 물건을 주는 곳도 있었고요. 은행 대출도 받고 또 보증 섰다가 대위변제 해줬던 친구가 재기하면서 도와주고 그러면서 어렵게 버텼죠. 제가 사업하는 데 인덕이 있어서 그런지 주위에서 많이 도와줘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행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 최고의 후회 없는 선택

한 회장은 비교적 일찍 경남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2010년 7월 다섯 번째 회원으로 이름 올렸다. 더 놀라운 점은 도내 네 번째 부부회원이라는 것이다. 한 회장 아내 최선자(60) 씨는 2014년 4월, 1억 원 기부를 약정해 34번째 회원이 됐다.

"그전에 회사 차원에서 어려운 이웃집 고쳐주기를 자체적으로 하기도 했고, 회사 이익이 생기면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기탁도 자주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인 부탁으로 7년 들었던 적금이 만기 됐는데 9500만 원이었어요. 어디에 사용하겠다는 목적 없이 들었던 적금이라 고민이 되더라고요. 저는 평소에 '저승에 10원도 못 가져갈 것 쌓아두면 뭐하나' 그런 이야기 자주 하거든요. 그래서 내 삶의 흔적 하나를 세상에 남기자는 생각에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결정했어요. 그것이 오래 남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사람도 그런 마음에 동조해서 가입했고요. 자식이 셋인데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나중에 스스로 돈을 벌어서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으면 하는 기대도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다는 것, 그것도 멋진 일이잖아요."

그가 나눔을 실천하게 된 계기는 대략 두 가지라고 추측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는 아버지의 주문과 대학 선후배들에 대한 부채의식.

"아버지께서 교육자 집안 자식으로 그리고 독립투사 피를 물려받은 사람으로 남에게 베풀고, 부끄럽지 않게 살라고 가르치셨어요. 대학교 때 선후배들과 같이 세상을 바로잡는 고민을 했고, 그들은 실천하다 구속되고 했지만 저는 제가 처한 현실 탓에 앞장서지 못했죠. 나중에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했고 그걸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남들은 저를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그나마 이 정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다 주변 도움 덕분입니다. 부모님 덕에 힘들지 않게 공부하고, 지인들 도움으로 부도 위기를 몇 번 넘기면서도 망하지 않고 돈을 벌고 있고…. 다 주변 사람들과 고향 마산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그는 나눔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이 때문에 그는 2014년부터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가 회장이 된 후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급격히 늘었고, 매년 사랑의 온도계 모금액도 꾸준히 늘고 있다.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국민 성금을 모으고 그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사용하도록 관리·운용하고자 설립된 기관입니다. 나눔 문화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최선봉에서 일하는 기관이죠. 제가 이 기관 경남 대표를 맡은 것은 뭐 딱히 특출나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제가 영업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맡기지 않았을까요. 허허. 회장이 되고 제가 잘 아는 기업인에게 각각 성향을 분석해서 자필로 편지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업에도 편지를 보냈고요. 꾸준히 설명하고 홍보하고 다닙니다. 제가 회장으로 취임할 때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34명이었는데 2년 만에 74명으로 늘었습니다. 성과라면 성과인데 남은 기간에도 꾸준히 홍보를 해야죠."

나눔 확산, 인식개선과 교육이 중요

한 회장은 나눔 문화가 제대로 정착하려면 인식 개선과 교육이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기부 결정을 꺼리는 이유 중에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는 사람이 많아요. 대부분이죠. 하고 싶어도 남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이죠. '주변에는 못하면서 돈 자랑 하려고 저런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하는 걱정이죠. 외국처럼 명예롭게 봐주지 못하고 시기질투 하는 점이 걸림돌이죠. 이런 문화가 개선돼야 합니다. 그리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여러 사람이 알고 또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생겨야 나눔 바이러스는 확산합니다. 저도 똑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할까 봐 익명으로 기부하려다 주변 권유로 실명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그런 고민은 필요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칭찬과 격려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참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면서 뿌듯하고 보람차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에게도 권유했고요.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걱정 벗어 버리고 저지르세요. 인생 최고의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겁니다. 그리고 기부하고 나누는 것도 익숙하지 않으면 잘 못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교육이 필요합니다. 자녀 이름의 통장에 매달 5000원씩 적립해 나중에 그 돈을 기부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좋은 교육입니다. 큰 금액이 아니라 소액기부도 아주 소중합니다. 재능기부도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부모가 최고의 스승입니다. 솔선수범으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회장의 나눔은 책임감과 부채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지향하는 것은 함께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사실 세상은 공평하고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또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타고난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죠. 저는 좋은 부모 만나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또 주변 사람과 지역 사회 도움으로 이 정도라도 살고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지금 행복합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주변 덕분이지요. 그런데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누리는 것들을, 제가 느끼는 행복을 느낄 여유가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지요. 제 작은 나눔이 많은 이의 동참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길 바랍니다. 혼자 잘살면 무슨 소용입니까. 함께 잘 살아야 더 좋은 세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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