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재발견-마산] 예향·민주성지·경남 1번지…누가 '옛 명성'이라 하는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과 성산구 귀산동을 잇는 다리는 '마창대교'다. 2008년 7월 개통한 이 다리는 접속도로를 포함한 길이 8.7㎞, 수면에서 상판까지 높이는 68m에 이른다. 귀산동에서는 거대한 교각과 마산만을 가로지르는 상판을 바로 아래서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눈여겨볼 것은 늠름한 다리보다 그 밑을 흐르는 바닷물이다. 만을 끼고 도는 항구도시에서 바다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곳은 뜻밖에도 드물다. 게다가 물밑이 훤히 보여야 하는 곳이라면 더욱 귀하다. 그 조건을 마산 땅으로 한정하면 성산구 귀산동을 벗어나 갈 곳은 마산합포구 가포동 너머 몇 곳과 구산면 저도(猪島) 정도다. 이 때문에 마산 어디서든 가까운 바다는 그 거리만큼 살갑지는 않다.

마산은 바다를 메운 땅 위에서 덩치와 살림 그리고 자존심을 키운 도시다.

일찍부터 사람과 물산이 몰렸던 곳

마산 전체면적(330.7㎢) 가운데 경지 면적(44.9㎢)은 13.5% 정도다. 이마저도 1995년 옛 창원군이었던 내서·진동·진전·진북·구산면 등 5개 면이 통합되면서 늘어난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예부터 마산에서 들판이라 할 곳은 별로 없다. 마산은 무학산(761m), 대산(727m), 광려산(752m), 팔용산(328m) 등에서 뻗은 비탈이 채 들판으로 펼쳐지기 전에 바다와 만난 땅이다. 땅 생김새가 이렇기에 농업은 마산이 내세울 산업이 못 된다. 그렇다고 여기 사람들이 눈앞에 두루 펼쳐진 바다에서 나는 수산물을 살림 밑천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일찍부터 바다를 메워 넓힌 땅에는 물류가 드나드는 항구나 공장이 먼저 들어섰다. 소규모 근해어업이나 미더덕·오만둥이·홍합 양식이 바다를 낀 도시 체면을 세울 뿐, 오늘날 어업 가구는 농가 수보다 훨씬 적다. 그럼에도, 마산이 경남을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저력은 2·3차 산업에서 찾는 게 맞다. 마산은 낮에 기계와 씨름하던 사람들이 밤에 흥을 마음껏 쏟아낼 때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그리고 그 바탕은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은 어촌에 사람이 붐비기 시작한 것은 1760년 조창이 생기면서다. 바닷길이 이어지는 목마다 설치했던 조창이 들어서면서 마산은 중·서부 경남 물산이 몰리는 곳이 됐다. 그리고 사람과 물건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시장이 들어섰다. 오늘날 경남을 대표하는 수산시장인 '마산 어시장'도 이맘때 그 모양새를 갖춘다. 이때 사람들이 모여 이룬 마을이 창동·오동동·동성동·서성동·중성동 등 오늘날 마산 원도심에 해당한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마산회원구 합성동, 경남대가 있는 마산합포구 월영동과 더불어 여전히 마산을 대표하는 소비지역이다.

하지만, 일찍 번성한 포구는 1900년대 들어 이웃 나라를 삼키려는 열강들이 내뿜는 입김이 유난히 빨리 닿은 곳이기도 했다.

이빨을 먼저 드러낸 나라는 제정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중국 여순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거점으로 마산항을 탐냈다. 그리고 기어이 1900년 마산항 한쪽을 얻어낸다. 이에 일본은 지금 창원시 진해구를 거점으로 삼아 기회를 엿본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서둘러 마산항을 제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땅을 대륙을 넘보는 전진 기지로 활용한다. 느닷없이 진행된 왜곡된 근대화는 그 과정에서 떨어진 부산물 같은 것이었다. 평온했던 마산만을 흙으로 메우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바다를 내주고 커진 도시

1970년 정부는 양덕동 일대 갯벌을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했다. 외국 기업을 끌어들여 나라 살림을 불리려던 시도였다. 외국 기업은 세금 부담 없이 제품을 생산·판매할 수 있었다. 정부는 대신 고용을 늘리면서 노동자들이 선진 기술을 익히도록 할 참이었다.

수출자유지역은 한일합섬, 한국철강, 무학과 더불어 마산 제조업을 이끌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마산 전성기는 수출자유지역 없이는 불가능했다. 출·퇴근 시간 거리를 가득 메운 노동자들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산 번영을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오늘날에도 여기 사람들이 마산 전성기를 자랑할 때면 빼놓지 않는 장면이다.

수출자유지역 70년대 모습.

거리를 메운 노동자 행렬은 잠시 흩어진 듯했다가 다시 모여들곤 했다. 창동·오동동·어시장 등 원도심 소비지역은 늘 사람으로 붐볐다. 마산은 많이 만들고 벌고 쓰면서 생기가 돌았다. 지금은 듣는 이들이 웃고 넘기는 '전국 7대 도시' 수식은 그때까지만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넘치는 활기가 드리운 짙은 그림자도 있었다. 지역은 물론 나라 살림을 불린다는 마산지역 노동자 중에는 그 격려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마산에 넘치는 활기와 벌이가 이곳 노동자들 살림에 두루 미치지는 않았던 셈이다. 게다가 열악한 작업환경, 몰상식한 처우 등은 흉흉한 사건을 낳기도 했다. 산업화 시대가 요구하는 희생은 종종 가혹했다. 그래도 억척스러운 노동자 중에는 벌이와 학업을 병행하는 근성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살림살이는 제각각이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저마다 노는 가락은 있었다. 마산은 그런 유흥이 허락되는 곳이었다. 씀씀이가 헤퍼서는 안 될 사람들은 막걸리 한 잔에 목청껏 뽑는 노래 한 자락으로 고달픈 일상을 서로 달랬다. 노래 장단에 맞춰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면 어느덧 설움은 잦아들었다.

이른바 '니나노집'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이었다. 조금 여유가 생긴다면 어시장에서 마산만을 끼고 앉아 회 한 접시 정도는 안주로 삼을 수 있었다. 지금은 어시장과 바다 사이에 땅이 생기면서 '홍콩빠'라고 부르던 그 이국적인 모습은 볼 수 없다. 여기 사람은 물론 바깥사람들도 아는 이들끼리는 흐뭇하게 추억하는 풍경이다.

'통술'은 쉴 새 없이 나오는 안주 값을 이미 술값에 붙여 셈하기에 주머니가 두둑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드나들 기회가 더 귀한 자리였다. 그리고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이들은 요정을 기웃거렸다.

오동동 통술거리.

하지만, 이 같은 활기도 1990년대 들어 눈에 띄게 사그라진다. 이는 마산 경제를 이끌었던 제조업 상황 변화 흐름과 일치한다. 수출자유지역 입주기업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한일합섬과 한국철강이 차례로 마산에서 사라지면서 마산 전체가 풀이 죽는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는 많이 만들고 벌고 써야 돌아가는 도시를 더욱 주저앉혔다. 그나마 수출자유지역이 가까스로 지역 제조업 한 축으로서 역할을 유지하며 체면치레를 하기는 했다.

오늘날 '마산자유무역지역'으로 불리는 수출자유지역은 여전히 지역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2012년 현재 99개 업체가 가동 중이며 고용인원은 6400여 명으로 마산지역 제조업 전체 종사자(2만여 명) 가운데 32%를 차지하고 있다.

예술인들의 고향 마산

조각가 문신(1923~1995)은 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8년 일본 동경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귀국 후 1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61년 프랑스 유학을 통해 추상 회화와 조각을 시작해 1970년부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이후 유럽 곳곳을 돌며 전시회를 열던 문신은 1980년 마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94년 합포구 추산동에 '문신 미술관'을 열었다. 이듬해 문신이 숨지고 나서 미술관은 고인 뜻대로 마산시에 기증됐다. 마산시는 2004년 '마산시립문신미술관'으로 다시 연다.

조각가 문신 드로잉.

추산동 언덕에 있는 미술관에서 내려다본 마산만은 먼 풍경으로는 제법 매력 있다. 문신은 어렸을 때 마산만을 보며 영감을 얻곤 했다고 한다.

'마산은 예향(藝鄕)'이라는 여기 사람들 자랑에는 두 가지 뜻이 섞여 있다. 마산 출신 예인들과 더불어 마산을 거쳐 간 예인이 많다는 것이다. 김상옥·김남조·김춘수·나도향·임화·지하련·이영도·구상·김지하·서정주 등 마산에서 한철을 보낸 문인과 작곡가 조두남 정도만 나열해도 한참 이어진다. 자랑은 대개 문신을 비롯해 권환, 이은상, 작사가 반야월 등 이 지역 출신 예인까지 덧붙이면서 매듭지어진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산이 유명한 문화·예술인들 '사랑방'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는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 마산 사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마산은 나라에서 6·25 전란을 피한 몇 안 되는 지역이다. 마산에서 가장 가까운 전선은 함안이었다. 여항산에서 인민군과 대치한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기어이 방어선을 지켜냈다. 덕분에 마산은 안전지대였고 피란민들은 마산으로 몰렸다. 문화·예술인들 역시 전쟁 통에서는 피난민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1946년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들어선 '국립마산결핵요양원'(현 국립마산병원)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젊은 문인들은 유행병처럼 결핵을 앓았다. 그리고 마침 마산에는 제대로 된 요양시설이 있었다. 마산서 한철을 보낸 문인 대부분은 요양원 환자였다. 피란민이고 환자였던 그들이 안정을 되찾았을 때 둘러본 마산은 노는 모양새 하나는 제대로 갖춘 도시이기도 했다. 왜색 섞인 유흥가는 새로운 것에 굶주린 문화·예술인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름깨나 알려진 문화·예술인들은 마음에 드는 집을 단골 삼았을 테고 사람은 다시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서로 영감을 주고받곤 했다.

창동예술촌./박민국 기자

독립운동가와 진보정치인 그리고 3·15

두 줄로 나란히 솟은 무덤은 8기다.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산자락에 있는 이 무덤들 앞에는 '삼진 독립 의거 기념비'가 서 있다. 1919년 3월 28일과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의거에는 진전·진북·진동 3개 면 주민들이 참여했다. '삼진 의거'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이 의거를 이끌다 목숨을 잃은 이들이 김수동·변갑섭·변상복·김영환·고묘주·이기봉·김호현·홍두익 등 8명이다.

순서대로 8의사 묘./박민국 기자

이들과 더불어 마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이교재(1887~1933)와 명도석(1885~1954)을 꼽을 수 있다. 진전면 출신인 이교재는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경상남북도상주대표로 활동했으며 군자금을 구하려고 국내로 입국했다가 잡히기도 했다.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려던 그는 신의주에서 붙잡혔으며 풀려나자 기어이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김구 주석 위임장을 들고 국내에 다시 들어와 활동했다. 그러나 다시 체포돼 갇혔고 이번에는 끝내 살아 나오지 못했다.

마산합포구 중성동에서 태어난 명도석은 1907년 마산노동야학을 운영했다. 1919년 추산공원에서 의거를 일으켰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 마산지회 설립에도 참여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건국동맹에 가담했으며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지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근·현대사에 걸쳐 노동운동과 진보정치 활동을 펼쳤던 노현섭(1920~1991)은 마산합포구 구산면 출신이다.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 전국 자유노조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혁신정당운동에도 참여했다. 1960년 '마산지구양민학살유가족회'를 결성, 그해 10월 전국유족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노현섭은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할 특별법 제정을 꾸준히 요구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15년형을 선고받는다. 노현섭은 8년 정도 복역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하지만, 옥살이 후유증에 시달리다 1991년 숨을 거뒀다.

시시비비를 가려 부당하면 덤벼들 줄 아는 결기는 옛 기록에도 있는 여기 사람들 성정이다. 이른 근대화는 새 문물을 이 땅에 일찍 이식하기도 했다. 6·25를 즈음해 몰려든 지식인들은 평범한 사람들 인식까지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드센 사람들은 점점 야무지기까지 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60년 3월 15일이 다가온다.

3 15 정신 그리고 민주 성지

1960년 3월 15일, 선거를 앞둔 이승만(1875~1965)은 대통령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되는 길을 택한다. 오직 우두머리가 되려는 이에게 민주적 절차나 가치는 아무 의미 없었다.

이승만·이기붕(1896~1960)을 앞세운 자유당 정권은 서슴없이 부정을 저질렀다. 마산에서 일어난 '3·15 의거'는 파렴치한 정권에 대한 가장 극적인 저항이었다. 하지만, 정권은 의롭게 일어난 시민들에게 총을 발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1943~1960)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만에 떠오른다. 아들을 잃은 마산시민은 분노했고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승만은 물러나게 된다.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민주주의를 우습게 여기는 독재 정권에 대한 거센 저항은 1979년에도 이어진다. 박정희(1917~1979) 유신 체제에 대항하며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는 이틀 뒤 마산으로 번진다. 바로 '부마민주항쟁'이다. 박정희는 18일 부산에 계엄령, 20일에는 마산 일대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독재자는 며칠 뒤 10월 26일 부하 김재규(1926~1980)에게 총을 맞는다.

'마산이 일어나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여기 사람들 자부심은 과장 같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마산 앞에는 '3·15 정신'·'민주 성지'라는 수식이 붙었다. 지난 2003년 마산회원구 구암동에는 '국립 3·15 민주묘지'가 조성됐다. 3·15 정신과 민주 성지를 자부하는 이 땅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3·15 의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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