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사람] 임영주 마산문화원장

"마산은 곧 민주정신이지요."

임영주(60·사진) 마산문화원장은 마산의 도드라지는 점에 대해 이렇게 압축했다. 3·15의거·부마민주항쟁, 좀 더 위로 거슬러 가면 삼진의거 같은 것이 그 바탕이라는 것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세종실록지리지는 창원대도호부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추포건송, 즉 거칠고 포악하며 소송을 잘한다는 거지요. 나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탐관오리에 도전해서라도 내 권리는 찾겠다는 기질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마산은 '씨름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체육계 자료를 뒤져봐다 특별한 것은 나와 있지 않아요. 다만, 이렇게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조창이 있던 곳입니다. 곡식을 배에 실으려면 힘센 장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을 장려하고, 또 새로운 이를 발굴하려 했던 것 아닐까요?"

마산어시장은 조선 후기 전국 13대 장시에 들 정도로 번성했다.

"1760년에 조창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사람이 몰렸지요. 당시 유정당이라는 조창 건물이 있었는데, 900명을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큰 장시가 형성됐다는 거지요. 1899년 개항 이후에는 외래 문물이 들어왔죠. 마산은 곧 상업도시입니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셈에 좀 능한 편인 것도 같아요."

마산이 한창 번성했던 시절 얘기는 이렇다. "수출자유지역에서 일 마친 이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죠. 출퇴근 시간에 그쪽으로 갔다가는 사람에 치여 지날 수가 없었어요. 많이 벌어질 때는 남녀 비율이 1대7 정도 됐어요. 1980년대 중반 정도가 마산 최고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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