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재발견-진해]콩 하나 빵 하나에 담은 진해 이야기

중원로터리 주변은 지난 시간을 끼고 있다. 색바랜 건물·가옥이 곳곳에 버티고 있다. 1900년대 초·중반 들어선 것들이다. 오늘날 식당이 그 공간을 제법 차지하고 있다.

'일본식 가옥 거리' 뒤편 골목에는 근대문화유산이 있다. 1930년대 일제 목조가옥이다. 일본해군병원장 관사였던 곳이다. 지금은 곰탕전문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삐걱대는 복도 바닥은 옛 시간을 고스란히 뿜어낸다.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괘종시계·축음기·전화기도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여전히 생명이 남아있는 것들이다. 매시 정각 '땡 땡'하는 괘종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진해구 중원로터리.

인근에는 1920년대 것으로 전해지는 3층 팔각누각이 있다. '뾰족집'이라 불리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 초소로 활용됐다. 이후에는 요정 공간이었다. 지금은 식당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은 외관상으로는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는다. 주거용으로 세 놓기 위해 보수를 했기 때문이다. 건립 당시 중원로터리 건너편에도 같은 건물이 하나 더 있었지만, 남아있지 않다.

일제시대 초소로 쓴 팔각누각.

'뾰족집' 길 건너편에는 중국음식점이 있다. 6·25 전쟁 참전 중 포로가 된 중공군이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1956년 어느 화교가 물려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원해루'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나이 지긋한 이들은 '영해루'라 부르기도 한다. 건물 정면에는 간판 두 개가 있다. 위에 달린 것은 아주 낡았다. 1956년 때 쓰던 간판이다. 이 중국음식점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걸음 한 곳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2〉 촬영지이기도 하다.

1955년 문을 연 '흑백다방'은 이 지역 사랑방이었다. 이제는 마실거리를 팔지는 않는다. 문화공간으로 바뀌어 정기적인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름도 '흑백다방' 아닌 '문화공간 흑백'이다.

원해루와 흑백다방.

이 지역 먹을거리 특산품에서 '진해콩'이 빠지지 않는다. 191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생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밀·메주콩 가루를 반죽, 구운 후 잘게해 설탕을 입힌 과자다. 간식거리 없던 시절에는 다른 지역에서도 그 맛을 알 정도로 유명했다. 1930년대부터 제조공장을 운영한 이정제(57) 씨 집안은 지금까지 그 세월을 잇고 있다. 경화동 주택가 간판 없는 공장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진해콩'에서 덧붙는 이야기가 있다. 천리교 경남교구 안에는 주춧돌이 하나 있다. '백칠령 공양지탑'이라 적혀 있다. 1930년 진해만 요새사령부에서는 큰불이 났다. 어린이 영화상영 도중이었다. 모두 107명이 목숨을 잃었다. 106명은 일본인이었지만, 한국 사람 한 명도 있었다. '진해콩'을 만드는 일본인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한국인 소녀였다.

진해 특산품 '진해콩'

이곳 '벚꽃 고장'은 먹을거리에도 그 향을 쏟아낸다. 벚꽃 진액을 팥소에 넣은 '벚꽃빵'이다. 벚꽃 모양인 작은 빵을 한입에 넣으면 입안에 향이 퍼진다. 2009년 군항제 때 처음 나왔는데, 반응이 좋았다. 어느새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만들어낸 곳은 진해제과다. 1947년 문을 연 곳이다. 어렵던 시절에는 때때로 돈 받지 않고 해군들에게 빵을 내 주기도 했다 한다. 빵집 건물 2층은 외박 나온 해군과 그 가족이 하룻밤 지낼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꽃향이 퍼지는 벚꽃빵.

부산과 경계를 이루는 용원동은 해산물 집산지다. 이곳 봄 도다리 역시 식객을 불러모은다. 용원 인근 바다는 모래 아닌 자갈이 많다. 물살이 거칠다는 얘기다. 이에 단련된 놈들이라 그 맛이 다르다고 한다. 진해에서는 '벚꽃 피고 질 무렵 도다리 맛이 제일 좋다'는 말이 있다.

용원에서는 흔치 않게 '졸복회'를 내놓는 횟집이 여럿 있다. 졸복 크기가 작아 한 마리당 회 두 점이 나온다. 그 쫄깃한 맛에 반해 만만찮은 가격도 아깝지 않다는 이들이 많다.

마리당 두 점밖에 나오지 않는 졸복회.

그 옛날 진해가 웅천으로 불리던 시절, 용원 인근 가덕도는 대구 산란지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났지만, 일본인들은 이곳 대구 맛 때문에 쉽게 발걸음 옮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늘날 진해만에서 잡힌 대구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바다가 조용하고 산란하기 알맞은 환경 덕이겠다.

진해에서 잡히는 전어는 속살이 붉다. 이름도 '떡전어'라 붙여져 있다. 살이 떡처럼 통통하고 고소하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유래가 있기는 하다. 이 고을에 부임한 어느 지방관이 "그 유명한 이곳 전어 맛을 보자"고 했다. 하지만 이생원이라는 자가 "산란기라 어린 전어는 절대 잡아서는 안 된다"고 버텼다. 화가 난 지방관이 목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지금의 웅천 괴정마을 앞바다에서 전어들이 피 튀기며 뭍으로 올라왔다. 죽은 전어들은 하나의 글자를 나타냈다. '德(덕)'이었다. 그리하여 '덕전어'라 불리던 것이 '떡전어'로 변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오늘날 들어서는 가을이 되면 어민들이 해군 통제수역에 들어가는 '전어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진해는 피조개양식도 많이 한다. 파도가 잔잔하기 때문이다. 채취는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다. 1970년대부터 일본으로 대부분 수출했다. 정작 이곳에서는 맛보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진해 피조개는 특히 일본에서 유명하다.

안골마을에는 생굴 내놓는 곳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과거에는 좀 더 마을 안쪽에 횟집도 즐비했다. 하지만 신항 개발로 횟집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진해는 개발·매립으로 바다가 망가졌다. 바다에서 나는 먹을거리가 예전만큼이길 바라는 것은 무리겠다.

매립으로 진해바다 먹을거리는 그 명성을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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