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진해] 벚꽃 뒤에 숨은 진해의 이야기

진해 중원로터리에서 사방으로 뻗은 길은 여덟 갈래다. 남북으로 중원로, 동서로 편백로 그리고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백구로, 서남쪽에서 북동쪽으로 벚꽃로가 로터리를 지난다. 방사형 로터리는 중원로터리에서 위·아래로 하나씩 더 있다. 바늘 시계 중심에 중원로터리가 있다면 10시 지점이 북원로터리, 6시 지점이 남원로터리다. 북원·남원 로터리에서 뻗은 길은 각각 다섯 갈래다. 3개 로터리는 충무동·중앙동·태평동을 끼고 시가지를 이룬다. 도로 사이 적당히 들어선 주택과 상가는 격자형으로 반듯하게 정돈돼 있다.

오늘날에도 흠잡을 게 별로 없는 시가지는 100여 년 전에 조성됐다. 사람이 모여 이룬 시가지가 아니라 시가지를 만들고 사람을 들인 이른바 계획도시다. 하지만, 그 계획은 일본인들 머리에서 나왔다. 1900년, 힘없는 나라는 러시아에 마산항 한쪽을 내준다. 러시아와 경쟁하던 일본은 이를 빌미로 진해 땅을 요구한다. 러시아 앞에서 무른 나라가 일본 앞에서 야물 리 없었다. 일본은 1902년부터 진해를 군항으로 개발한다. 일본 해군은 일찌감치 진해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1910년 이 나라를 완전히 삼킨 일본은 이곳에 마음먹고 시가지를 닦는다.

그 계획이 얼마나 주도면밀했는지 뼈대가 된 방사형 로터리는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제황산 공원'에 있는 진해탑에서 내려다보는 중원로터리는 1920년대 사진 속 풍경과도 얼추 맞아떨어진다. 로터리는 100여 년을 건너뛴 오늘날에도 근대 도시 맵시를 태연하게 드러낸다. 진해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개성이다. 그리고 해마다 4월, 흐드러진 벚꽃은 진해가 품은 매력을 한 번에 터뜨린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진해역사.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진해역사.
군항마을 역사관
군항마을 역사관

1. 산에 머리를 두고 발은 바다에 담근 땅

장복산 중턱을 지나는 고갯길은 창원 성산구와 진해구를 잇는다. '안민고개'다. 여기 사람들은 진해 매력을 잘 모르겠다는 바깥사람들에게 이 고갯길을 먼저 추천하곤 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것 없이 고갯마루에서 도시 풍경을 내려다보라는 것이다. 전망대에서는 진해 시가지와 그 너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서로 길게 뻗은 진해 땅 전체는 위로는 산, 아래로는 바다가 이어진다. 산과 바다까지 거리는 멀어도 2㎞ 안팎이다. 여기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일상적인 공간이다.

산성산(400m), 장복산(582m), 불모산(802m), 화산(798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동서로 길게 뻗은 진해 땅을 병풍처럼 감싼다. 그리고 창원 성산구와 진해구 사이 경계를 이룬다. 산 아래 들판은 걸리는 것 없이 바다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여기 사람 대부분은 땅을 일궈 살림을 꾸리지 않았다. 진해구 전체면적(121.26㎢) 가운데 경지(11.6㎢)는 10%에도 못 미친다. 농가는 1200여 가구로 전체 가구(6만 7000여 가구) 가운데 1.8% 정도를 차지한다. 이곳 사람들이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것도 아니었다. 현재 어업이 생업인 집은 800여 가구로 그 수만 따지면 농업보다 적다. 그 비중도 어획보다는 양식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진해를 2차 산업이 활발한 곳으로 보기도 어렵다. 70년대 들어섰던 진해화학은 이미 사라졌고, 90년대 들어선 대동조선은 2001년 ㈜STX가 경영권을 인수하고 나서 그 실적이 유난히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진해 산업 중심은 1·2차 산업보다 서비스업에 쏠려있다고 보는 게 맞다. 이 같은 산업 구조는 '군항(軍港)'이라는 특수성에서 나온다. 아니, 훨씬 전부터 진해는 나라 밖과 거래를 튼 곳이었다.

속천항 옆 갯벌.바지락 캐기가 한창이다./박민국 기자

2. 일찍부터 열린 항구

예부터 왜구는 골칫거리였다. 제 가진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던 왜구는 끝없이 이 나라 남쪽 지방 뭍과 바다를 헤집고 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다. 세종이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 정벌에 나선 것은 도발에 대한 마땅한 응징이었다. 힘으로 해볼 수 없다고 여긴 왜구는 그제야 교역을 요청한다. 필요한 것을 빼앗을 수 없게 되자 교역을 요구한 것이다. 괘씸한 태도였지만 조정 또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역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왜구는 다시 기를 쓰고 덤벼들 게 뻔했다.

1426년 삼포 개항은 왜구에 대한 유화책이었다. 그 뜻은 거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테니 무리해서 도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웅천 제포(내이포), 동래 부산포, 울산 염포를 묶어 삼포다. 이 가운데 제포가 지금 진해구 웅천 지역에 해당한다. 진해는 조선 초기부터 활발한 대외 무역항구였다. 조선시대까지 진해 중심지는 웅동만, 안골만을 끼는 동부지역이었다. 그 흔적은 오늘날에도 찾을 수 있다. 웅천읍성(진해구 성내동)은 1434년 지어졌다. 원래 900여m 길이로 쌓았으나 지금은 500m 정도 남아 있다. 안골왜성(진해구 안골동)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성은 안골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있다. 교역이 활발했던 항구는 아군과 적군 모두 중요하게 여기던 지역이었다.

나라를 발칵 뒤집은 임진왜란(1592년)이 터질 기미는 일찍 문을 연 항구에서 나타났다. 1510년 일어난 '삼포왜란'이다.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은 삼포를 관리하던 조정 관리에게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다. 왜구는 삼포를 휘저으며 조선 군사와 백성을 무참히 살해한다.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가까스로 제압하나 삼포는 80여 년 뒤 왜구에게 더욱 처참하게 짓밟힌다.

진해 중심이 제포가 있던 동부지역에서 행암만을 낀 서부지역 끝으로 옮겨진 것 역시 배경에는 일본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이 이 일대에 거점을 정하면서 변두리는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진해는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영향이 적지 않게 미친 곳이다. 이 때문에 진해를 아끼는 사람들은 제 지역 자랑 한편에 끼어드는 왜색에 대한 거부감을 종종 드러내기도 한다.

진해루./박민국 기자

3. 진해는 군항

진해 한가운데 있는 진해루(진해구 경화동) 앞에 펼쳐진 바다는 시원하다. 그리고 이 바다는 대한민국 해군을 키우는 요람, 해군교육사령부 앞 풍경으로 걸맞다. 해군교육사령부 앞은 신병들 행렬로 한 달에 한 번 북적인다. 이곳에서 신병들 행렬 못지않게 눈에 띄는 것은 해군교육사령부 앞에 펼쳐지는 천막이다. 신병들에게 필요하다는 물건을 파는 분주한 상인들 모습은 진해 경제가 돌아가는 단면을 은유한다.

일본 해군이 고르고 고른 땅은 우리 군이 보기에도 요충지였다. 게다가 적이 남긴 것이기는 했지만, 진해에 이미 닦인 군 시설 기반 역시 쓸모 있었다. 1945년 손원일(1909~1980)을 중심으로 결성된 '해방병단'이 대한민국 해군 거점으로 진해를 택한 것은 당연했다. 진해는 해군기지사령부, 해군작전사령부, 해군사관학교, 해군교육사령부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해군 기지로서 면모를 갖춘다.

해군은 해방 이후 진해 경제를 떠받친 버팀목이다. 1·2차 산업이 시원치 않았던 진해가 시 단위 행정구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기반은 해군이었다. 식당·다방·술집·숙박업소 등을 차린 상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해군만 바라봤다. 혈기 왕성한 젊은 군인과 씀씀이가 작지 않은 장교는 여기 사람 살림과 진해 경제를 북돋웠다.

수치해안과 STX./박민국 기자

2007년 진해 해군작전사령부가 부산 이전 계획을 발표하자 진해가 뒤숭숭해진 것은 당연했다. 해군작전사령부 이전은 단순한 군부대 이동과 그 의미가 달랐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살림 밑천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이었다. 주민들은 해군작전사령부는 물론 교육사령부, 해군사관학교, 해군기지사령부 안부까지 염려하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결국, 작전사령부 일부 기능만 부산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정리되자 진해 사람들은 그나마 한숨을 돌리게 된다. 이는 진해 경제가 해군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진해 특산품은 진해콩, 벚꽃빵 그리고 해군이라며 그 애정을 감추지 않는다. 더불어 해마다 4월에 열리는 진해 군항제 역시 벚꽃과 더불어 해군이 없었다면 그 매력이 반감됐을 게 분명하다. 진해 사람들에게 해군은 여러모로 어여쁠 수밖에 없다.

진해해양공원에 전시된 군함 '강원함'.내부도 볼 수 있다./박민국 기자

4. 평생 곧았던 시인과 목사

시인이자 한학자인 김달진(1907~1989)은 진해 소사동(창원군 웅동) 출신이다. 1929년 시 〈잡영수곡(雜泳數曲)〉으로 등단했으며 1939년 불교전문학교를 마쳤다. 1940년 첫 시집 〈청시〉를 냈으며 8·15 해방 후 동아일보 기자로 잠시 활동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불경과 한시 번역에 집중했다. 대표작으로는 부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집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1974)와 시선집 〈올빼미의 노래〉가 있다. 또 동양고전과 불경 책도 다수 펴냈다. 1990년 제정된 '김달진문학상'은 평생 정신 가치를 회복하려했던 시인을 기린 것이다. 창원시는 1996년부터 해마다 10월, '김달진문학제'를 열어 전시회, 백일장, 심포지엄, 생가 방문 같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진해구 소사동에 있는 생가 맞은편에는 '김달진 문학관'이 있다.

김달진문학관./박민국 기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목사 주기철(1897~1944)은 웅천 출신이다. 192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25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1년 마산 문창교회(마산합포구 상남동)에 부임해 신앙·계몽 운동을 펼쳤다.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은 재직 중 신사참배를 강요받자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거부한다.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1938년 체포된다.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주기철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44년 순교한다. 1963년 정부는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한다. 주기철이 어린 시절 다녔던 웅천교회(진해구 성내동)는 현재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

5. 통합 창원시 그리고 신항

진해구 남문동에 조성한 '흰돌메 공원'에서는 신항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부산과 진해 경계에 조성한 신항만은 1997년 착공해 현재 북컨테이너 부두가 운영되고 있다. 완공되면 접안 시설인 안벽은 총 14.71㎞로 45개 선석 규모로 개발된다. 연간 수용 가능한 컨테이너는 1325만TEU(컨테이너 1대 단위) 정도로 예상된다. 신항 조성 초기 이름 문제를 두고 경남도와 부산시가 벌였던 싸움은 이제 아련한 기억이 됐을 정도로 이 곳에 대한 여기 사람들 기대는 크다. 진해 사람들은 이 대규모 부두가 빚을 경제효과를 종종 즐겁게 셈하기도 한다. 긴 세월 관광·소비에만 의지했던 지역 경제 구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물론 그 변화는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아직은 일반 시민이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해양생물테마파크./박민국 기자

신항과 더불어 진해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행정구역 통합이다. 2010년 7월 창원시·마산시·진해시를 묶어 출범한 통합 창원시는 진해에 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몰고 올 득실에 대한 셈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다. 거대 도시 일원으로서 자연스럽게 부풀어오를 행정·경제 단위에 대한 기대는 낙관이 되겠다. 하지만, 시 단위 행정구역이 구 단위로 바뀌면서 불거진 가시적·심리적 박탈감 역시 아직은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창원시 행정이 결정될 때마다 '배분'에 예민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통합 효과에 대한 낙관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비관을 지워나가는 일은 창원시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는 하다.

6. 도시와 자연, 과거와 오늘의 조화

진해해양공원(진해구 명동)에 들어서면 '해양솔라파크'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해를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자리매김하려는 듯 그 위용이 당당하다. 돛을 형상화한 높이 136m 탑은 주변 바다와 어우러져 그 매력을 더한다. 탑 전망대에서는 남해안은 물론 부산 신항과 거가대교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주변 섬과 바다를 잘 활용한 공원은 진해가 가진 바다자원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다.

진해내수면환경생태공원(진해구 여좌동)은 여기 사람들이 '도심 속에 쏟아진 느닷없는 축복'이라고 여길 만큼 사랑받는 공원이다.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았던 저수지와 숲, 산책로는 철저한 관리로 찾는 사람들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진해 자연이 품은 매력이 산과 바다에만 펼쳐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벚꽃 만발한 생태공원은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들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는 풍경이다.

김씨박물관./박민국 기자

진해를 감싸 안은 장복산과 불모산 산줄기 역시 근교산으로는 그 매력이 차고 넘친다. 특히 장복산 줄기에서 솟은 시루봉과 천자봉은 바깥사람들도 즐겨 찾는 등산 코스다. 진해는 산, 바다 그리고 그 사이 땅 곳곳에서 제모습을 잃지 않은 자연이 큰 즐거움을 안기는 도시다. 여기 사람들이 주변 마산·창원과 비교해 사람 살기는 진해가 으뜸이라고 여기는 이유다. 그리고 그 조화로움은 단지 풍경에서 그치지 않는다.

100년 세월을 건너뛴 시가지. 그리고 그 곁에서 비슷한 시간을 태연하게 버티고 서 있는 옛 건물. 진해 곳곳에 있는 옛 건물은 보고 지나치는 장식 같은 대상이 아니다. 식당으로 문화 공간으로, 관공서로 오늘날에도 그 기능을 하고 있다. 그 곁에는 또 버젓이 오늘날 지은 건물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진해가 품은 매력은 그렇게 일상에서 다가온다. 진해는 풍경과 더불어 그 시간조차 조화로운 도시다. 그렇기에 진해가 품은 가장 큰 자산은 일상에서 다가오는 조화로움에서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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