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련마을-천하마을 15.6㎞ 5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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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해바래길 '3코스 구운몽길'은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길이 아니다. 환경보호와 안전문제로 한려해상국립공원 쪽과 협의가 잘되지 않아서다. 그래서 공식적인 안내판이나 이정표가 없다. 게다가 코스 대부분이 깊은 숲을 지나고 있어 길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코스 중간중간 낭떠러지 주변은 위험한 곳도 적지 않다. 그래서 '제대로 탐방로가 조성되지 않았기에 탐방을 권장하지 않는다'가 한려해상국립공원 쪽의 공식입장이다. 남해군도 이를 고려해 3코스를 계획구간 또는 미개통구간으로 표시하고 있다. 안전문제를 생각한다면 3코스 전체 예정 코스는 공식적으로 탐방로가 개설된 후 걷는 것도 좋겠다.

남해군 상주면 벽련마을에서 시작

남해바래길 3코스 구운몽길(미개통 구간)은 남해군 상주면 벽련마을에서 시작한다. 마을 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국도19호선에서 바로 마을 입구로 길이 연결된다. 그러니까 마을 입구가 마을보다 제법 높다. 이곳에서 노도를 바라본다. 노도는 조선 후기 문인이자 소설가인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유배와 살다가 죽은 섬이다. <구운몽길>과 <사씨남정기>가 이 섬에서 태어났다. 바래길 3코스(미개통 구간)의 이름이 구운몽길인 까닭이다. 노도는 마을과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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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도 19호선에서 바라본 벽련마을과 노도. / 이서후 기자

벽련마을 입구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체력과 시간을 아끼려면 국도19호선을 그대로 따라 다음 두모마을까지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바래길 탐방센터는 아예 대량마을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안내한다. 고민 끝에 벽련마을 산길을 그대로 걷기로 한다.

마을 해안 오른쪽에 벽련항이 있다. 이곳에서 노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벽련항을 지나치고 나서 찻길이 끊어진 곳에서 걷기 시작한다. 바래길 시작점이라는 표시는 없다.

바람이 불지만 바닷물은 잔잔하다. 길이 산 초입 숲으로 접어들자 바람이 잦아든다. 우거진 나무들이 바람을 막은 것이다. 문득 남해섬 마을 곳곳에 있는 방풍림이란 게 이런 역할을 하는구나 싶다. 오르막을 조금 오르면 곧 길이 정겨워진다. 숲이 깊어 산속에 푹 안긴 느낌이 든다. 숲 속에서도 파도 소리와 배 엔진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숲 길은 바다를 향한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게 한다. 그렇게 묵묵히 걷는 길이다. 드문드문 앞서 길을 걸은 사람이 남긴 산행 표시 리본이 나타나 길동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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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에서 만나는 산행 표시 리본은 좋은 길동무가 된다. / 이서후 기자

몸이 좀 풀렸다 싶을 때 즈음 내리막이 시작된다. 정면에 있던 노도는 어느새 오른쪽으로 바짝 붙어 있다. 그리고 다시 완만한 경사로 오르막이 이어진다. 오르막이 힘들다 싶을 때 송전탑이 하나 나온다. 윙윙 소리를 내며 고압 전류가 노도를 향하고 있다. 송전탑을 지나면 갑자기 급경사 내리막이다. 곧 건너편으로 두모마을 선착장이 보인다. 바다는 두모마을 앞까지 깊이 들어와 있는데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긴 모래사장을 벌이고서야 바다와 만난다. 멀리서 봐도 물이 맑은 게 선명하게 보인다. 마을 뒤편으로는 금산이 우뚝하다.

마을로 들어선 길은 하천으로 내려간다. 다리를 따라 하천을 건넌다. 바로 조그만 공원이 나오는데 화장실도 있으니 힘들면 쉬어 가도록 하자. 공원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선착장을 향해 간다. 그러다 왼편으로 처음 나오는 오르막 샛길로 접어든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다. 샛길 초입에 산행 표시 리본들이 있으니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오르막에서 뒤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마을 앞 모래사장 건너편으로 펼쳐져 있다. 오르막길 주변을 낡고 정겨운 집들이 듬성듬성 풍경을 이루고 있다. 주변 밭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겨울초를 수확하고 있다.

잠시 후 시멘트 왼편으로 나있는 흙길로 들어선다. 길이 좁고 풀이 우거져 있으니 조심하자. 길가의 펜션을 지나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해안도로에 닿는다. 이 주변에서 길을 잃을 가능성이 큰데 무조건 이편 도로 쪽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방향을 잡자. 소량마을로 향하는 도로는 차선도, 갓길도 없어 조심해야 한다. 그나마 지나는 차가 적은 게 다행이다. 고개를 넘으면 아담하고 정갈한 어항이 보인다. 소량마을이다. 설렁설렁 내리막을 걷는다. 그대로 도로를 따라 마을을 가로질러도 되고, 시간을 내 선착장 쪽으로 둘러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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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도로를 따라 소량마을로 들어서다. / 이서후 기자

만만치 않은 길

소량마을에서 도로를 따라 다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대량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해안도로는 여기에서 끊어진다. 군내버스는 이곳까지 들어온 후 왔던 길을 되돌아 소량마을로 향한다. 정류장을 지나 바닷가를 향한다. 마을 선착장에 가 닿을 때쯤 왼편으로 난 도로를 따라 오르막을 오른다. 돌아보니 이제 노도의 뒤통수가 보인다. 길이 가팔라 숨이 차다. 오르막이 참 끈질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 경사가 잦아들면서 길이 평평해진다. 곧 아스팔트 포장이 사라지고 시멘트 길이다. 그리고는 이내 흙길로 이어진다. 흙길로 접어들자마자 오른쪽 샛길로 들어가야 한다. 길을 잃기 쉬운 곳이니 주의하자.

다시 본격적인 산행이다. 산길 자체는 힘들지 않지만, 숲이 깊고 인적이 드물어 으스스한 기분마저 든다. 숲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바다 풍경은 목마를 때 마신 물처럼 후련하다. 중간중간 갈림길이 많으니 잘 살펴 길을 찾자.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문득 능선을 따라 걷게 되는데 바로 옆으로 바닷가 암벽이 펼쳐져 있어 아찔하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벼랑길과 숲길을 한참을 걸어야 겨우 상주마을에 닿는다. 대량마을에서 상주마을에 이르는 6㎞ 숲길은 한번 들어서면 중간에 빠져나올 수가 없으니 너무 늦지 않도록 시간 안배를 잘해야 한다.

숲길을 빠져나오면 아스팔트 도로를 만난다. 도로를 따라가면 상주 하수종말처리장과 남해특성화연구센터를 지나 곧 상주해수욕장이 한눈에 보인다. 상주해수욕장에서는 모래사장을 걷든, 송림을 걷든 모두 즐겁다. 물론 여름 피서철에는 엄청난 인파에 시달릴 것이다. 길은 상주중학교 앞을 지난다. 모래사장을 에돌아 유람선선착장에 거의 닿을 즈음 왼편 산길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다시 숲 속이다. 상주해수욕장의 은빛 모래사장이 아직 눈에 잔상으로 남은 탓에 숲길은 외려 어떤 비밀 장소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숲길은 곧 임도를 만난다. 임도의 끝에서 다시 숲길이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오르락내리락 해안절벽을 지나는 길이다. 양지바른 무덤가를 지나면 한결 편안하고 너른 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고개를 하나 넘으면 금포마을이다. 고개 정상에는 근처 해안이 과거 간첩침투지역이라는 내용의 안내판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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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아찔한 벼랑길이라 조심해야 한다. / 이서후 기자

고개를 넘자마자 금포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등성이를 따라 황토밭이 가지런하게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길은 황토밭 사이를 여유 있게 돌아서 마을로 들어간다. 무언가 풍성하고 정겨운 것이 제대로 시골길을 걷는 맛이다. 길을 따라 그대로 동네 안으로 들어간다. 고샅을 따라 바닷가로 빠져나와 몽돌해변을 따라 걸으면 곧 천하마을이다.

바래길 3코스 마을 고샅고샅

"330년 전 꼿꼿한 선비에게 이 길은 한없이 멀었다. 한양에서 경남이 먼 땅이었고, 남해는 경남 땅에서 떨어진 섬이었다. 노도는 섬에서 또 떨어진 섬이다. 예나 지금이나 물살이 거칠었던 바다는 섬과 섬 사이를 더욱 벌려놓았다. 동력선으로 10분이지 돛에 의지하는 배는 꽤 시간을 들여 눈앞에 있는 섬에 닿았을 테다. 선비는 섬 언덕배기 한쪽에 초가를 지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솔잎을 넣은 피죽과 자신이 파놓은 샘뿐이었다. 왕에게 미움받은 선비는 살림도 마음도 가난했다. 우리 문학사에서 손꼽는 귀한 자산은 외롭고 척박한 삶에서 솟았다." <경남의 재발견>(도서출판 피플파워, 2013)

남해 노도에는 '노자묵자할배'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에 노도 동쪽 큰 골짜기에 어떤 노인이 와서 초가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만날 하는 일 없이 놀고먹고 하며 먼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하여 사람들이 그를 노자묵자할배라 불렀다. 노인은 섬에 온 지 이태 만에 죽었는데, 섬사람들이 큰골 산등성이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이 노인이 조선 대표적인 글쟁이 서포 김만중(1637~1692)이다. 노도는 서포의 마지막 유배지이자, 생을 마감한 곳이다. 남해바래길 3코스 구운몽길(미개통)은 이 노자묵자할배 전설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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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도와 벽련마을을 오가는 노도호. 건너편으로 벽련마을이 보인다. / 이서후 기자

◇노도

노도는 3코스가 시작하는 벽련마을 벽련항에서다 배를 타고 가야 한다. 노도에 적을 둔 12명 정원의 여객선 '노도로' 한 척이 매일 시간을 정해 왕복 운행한다. 오전 9시에 벽련항을 출발하면 정오에 나오는 배가 있어 노도에서 3시간을 있어야 한다. 12시 30분에 출발하는 것을 타면 오후 2시에 나오는 배가 있어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된다. 둘을 비교해 적당한 시간에 배를 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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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련마을에 있는 노도행 여객선 시간표. 뒤편으로 노도가 보인다. / 이서후 기자

배가 도착한 곳은 노도 북쪽 마을이 있는 곳이다. 13가구 17, 8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북쪽에 마을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섬 동쪽 큰 골짜기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유일하게 민물이 나는 곳이어서다. 지금도 큰골 아래 해안에 상수도 시설이 있다. 김만중이 살았던 움막도 동쪽 골짜기에 복원돼 있다. 움막 주변은 온통 동백나무다. 움막 옆으로 김만중이 스스로 팠다는 샘터도 남아 있다. 옛 움막에서는 아마 바다 건너편으로 두모마을이 보였을 것 같다. 서포 김만중을 묻었다는 곳은 계단을 따라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데 '허묘(虛墓)'라고 한다. 김만중의 시신이 이곳에 두 달 정도 묻혀 있다가 가족들이 와서 가져갔기 때문이다. 노도 전설은 이를 '노지나묏등'이라 전한다.

노도는 옛날에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만중 유배지로 유명하지만 볼락, 농어, 감성돔이 잘 잡혀 낚시꾼들에게 인기 많은 섬이기도 하다.

◇벽련마을

마을이 연꽃을 닮았다 혹은 마을 앞 노도가 연꽃을 닮았다 해서 연화(蓮花)라 불렸다가 훗날 벽련(碧蓮)이라 했다. 혹자는 벽련이 3000년마다 피는 푸른 연꽃, 우담바라를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남해섬 동쪽 해안을 따라 근사한 풍경을 선사하는 국도19호선이 마을 위를 지난다. 마을은 앵강만의 끝자락을 안고 있는데 노도가 바로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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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련마을 입구. / 이서후 기자

서불과차 이야기를 먼저 하자. 금산 중턱에 서불과차라 새겨진 고대 암각화가 유명하다. 양아리 석각이라고 불린다. 중국 진시황(秦始皇) 때 불로초를 구하러 떠난 서불(徐市)이 남해섬 금산에서 한동안 머물며 사냥을 즐기다가 떠나면서 남긴 것이라 한다. 벽련마을 입구에도 비슷한 시대 암각화가 있다. 도로 주변에 있는데 표지도 없고 그냥 바위만 덜렁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바위에는 사람이 새긴 것 같은 문양이 있다. 거북이 등껍질 문양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서불을 연구하는 중국 고고학자 중에는 이 벽련마을 암각화가 서불과차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하여 마을 초입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마을 간판에는 암각화가 있는 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두모마을

옛날에 마을을 지나던 도사가 마을 이름을 '두모(豆毛)'라 하면 잘 살 것이라 해서 두모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모양이 콩처럼 생긴 까닭이다. 혹은 큰 항아리 같은 바닷가라는 뜻으로 '드므개'로 불렸다가 '두모'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드므'는 궁궐같이 중요한 건물, 네 모퉁이에 불이 나면 급히 가져다 쓰라고 두는 큰 항아리를 말한다. 실제 바래길 초입에서 바라보면 두모마을 앞 모래사장이 큰 항아리처럼 펼쳐져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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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모마을 전경. / 이서후 기자

마을 뒤편으로 금산이 우뚝하다. 동쪽으로 솟은 게 상사바위, 서쪽으로 솟은 건 부소대다. 부소대 아래 서불과차 암각화가 있다. 북쪽으로 부소대에서 시작한 계곡, 동쪽으로 천황산 계곡, 서쪽으로 벽련산 계곡이 합쳐져 두모천이 되어 바다로 흘러든다. 지난 2008년 환경부장관지정 자연생태우수마을로 선정될 만큼 친환경 농법으로 유명하다. 시기가 맞으면 쌀농사나 시금치 캐기 등 농사체험과 갯벌 바지락 캐기 등 바다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을 뒤편으로 대규모 유채꽃 단지가 있는데, 매년 4월이면 두모유채꽃축제가 열린다.

◇소량마을, 대량마을

약 400년 전 경기도 임진강 주변 양아리라는 곳에 살던 사람들이 남해섬으로 옮겨와 정착했다. 이들은 마을을 이루면서 양아리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양아리는 후에 여러 마을로 나뉘었는데, 벽련마을, 소량마을, 대량마을 등이다. 노도에서 바라보면 더블유(W) 형태 해안선에 포구가 두 개 보이는데 '양아개'라고 부른다. 이 중 작은 양아개는 소량, 큰 것은 대량이라 불리게 됐다.

소량마을은 이름 그대로 작고 소박한 마을이다. 지난 1991년에는 범죄없는마을로, 2004년에는 어촌종합소득마을로 지정되는 등 옛날부터 이웃 간의 정이 좋고 성실하고 착한 이들이 사는 곳이다. 소량 출신 향우회의 고향 사랑도 대단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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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겨운 소량마을 해변. / 이서후 기자

대량마을은 9.3㎞에 이르는 남해섬 남쪽 해안 절벽이 시작되는 곳이다. 정면으로 바다 한가운데 바로 보이는 섬이 소치섬이다. 마을 앞바다에서는 톳, 미역, 청각 등 해초와 전복, 해삼, 고동, 성게 등 해산물이 많이 난다. 바위투성이 해안선과 소치도에는 볼락과 감성돔이 많이 잡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상주마을, 금전마을, 임촌마을

상주해수욕장은 맑고 깨끗한 옥색 바다와 은빛 결 고운 모래사장,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진 남해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이다. 부채꼴 모양으로 2㎞에 이르는 해수욕장을 해안으로 금산 아래 넓은 들판에 4개 마을이 모여있다. 이중 해수욕장을 공유하는 마을이 세 곳이다.

바래길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전마을이다. 옛날에 밭이 많아 금전(金田)이라 했다. 지금은 펜션이 많이 들어서 있다. 금전마을 뒤편 들판에 있는 상주한려체육공원은 잔디 축구장을 여러 개 두고 있는데, 겨울철 축구팀 전지훈련장으로 인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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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철 전지 훈련장으로 인기인 남해상주체육공원. / 이서후 기자

금전마을에서 금전천(金田川)을 경계로 상주마을이 이어져 있다. 마을이 형성된 모양이 한자 상(尙)을 닮아 상주라 했다고 한다. 현 상주초등학교 주변으로 옛 상주보성 성곽이 일부 남아있다. 왜구를 막으려고 만든 평지석성이다. 지금은 그냥 담벼락 일부이거나 밭, 담 일부여서 자세히 살펴야 찾을 수 있다.

임촌마을은 상주마을과 금양천(錦陽川)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다. 송림 등 수목이 울창해 임촌(林村)이라 했다. 원래는 상주마을에 속했는데, 인구가 늘고 관광지로 발전하면서 독립해 나왔다. 민박집이 많다.

해수욕장 끝에는 유람선선착장이 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세존도까지 다녀올 수 있다. 세존도까지는 왕복 3시간 거리다. 하지만, 워낙 경치가 빼어나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한다. 특히 일몰과 일출 장면이 유명하다.

마을 앞바다 모래 속에 검은 쇳가루가 많이 섞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쇠 금(金)과 바다 포(浦)를 써서 금포다. 순 한글로 '쇳개'다. 마을 주변에 금 광맥이 있었는데, 이것이 마을 이름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전에는 금을 채굴해 연금(鍊金)까지 했다고 한다. 마을 끝 펜션 주변에 금을 캐던 동굴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흑연을 채굴하기도 했는데, 경제성이 없어 폐광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금포마을은 또 물메기로 유명하다. 바다에서 물메기를 잡아 올리는 통발을 처음 만든 곳이 금포마을이라고 한다. 물메기는 마을주민들의 주 소득원이다. 겨울 두 달 동안 물메기를 잡아 일 년 치 생활비를 모두 번다고 한다. 남해에서도 부촌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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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포마을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물메기 통발. / 이서후 기자

◇금산과 보리암

남해 제1경, 금산은 소금강, 남해금강으로 불릴 만큼 절경을 자랑하는 명산이다. 산은 해발 681m로 높다고 할 수 없지만 기암괴석으로 덮여 풍경이 남다르다. 바위 형상을 중심으로 모두 38경이 볼거리로 지정돼 있다. 금산은 애초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산속에 보광사를 지으면서 보광산으로 불렸다. 그러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서 백일기도를 한 끝에 조선 왕조를 건국하게 됐다. 이성계는 산신에게 감사하다는 뜻에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두르겠다 약속했고 그래서 비단 금자를 써서 금산(錦山)이 됐다고 전한다.

금산 정상에 조금 못 미치는 곳에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 하나인 보리암이 있어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보리암에서 정면으로 넒은 들판과 상주해수욕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보리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유명한 금산산장(옛 부산여관)이다. 옛 시절 보리암을 찾은 신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인데, 지금은 절경을 끼고 막걸리 한 잔의 운치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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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 하나인 남해 금산 보리암. / 이서후 기자

<바래길에서 만난 사람들>

남해 부촌 금포마을 어민들

바래길 3코스 중 금포마을에서 어슬렁거리다 포구 앞에서 어민 두 분을 만난다. 너른 콘크리트 바닥에 그물을 널어놓고 손질을 하고 있다. 창고 안에 켜둔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성인가요 메들리가 요란하다.

"이 그물로 뭐 잡는기라예?"

"이거는 고기를 직접 잡는 게 아니고 유도 그물! 고기를 유인하는 기라."

"그라믄 배가 끌고 댕기야겠네요."

"아이지. 이건 고정이고. 고기는 앞에 장애물에 부딪히면 무조건 깊은 데로 가는 습성이 있다고. 잡는 그물은 깊은 쪽으로 또 설치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아. 유도그물, 잡는 그물이 따로 있구나~."

"노는그물도 따로 있어.

"노는그물은 또 뭡니꺼?"

"운동장."(지금껏 아무 말씀 없으시던 다른 어민이 딱 한마디 거들며 한 말이다. 그러고 그는 다시 말이 없다.)

"운동장처럼 고기들 그 안에서 좀 움직이그로 하는 거."

"아아."

"요즘 고기는 물고기가 똑똑해서 그물코를 세고 다닌다고. 하나 둘 셋 넷."

"진짜요?"

"하하하. 그 정도로 영리하다는 이야기라."

"이 동네 물메기 많이 난다 카던데요."

"그렇지, 그렇지."

"이 그물로 물메기 잡는가요?"

"아니 아니, 물메기는 저거, 저기 통발로!"

"아아."

"타지역은 모르겠고 적어도 남해로 봐서는 이 동네가 최초로 만들었거든. 통발을. 그분이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셨으면 90이 넘으셨을 기라. 그 영감이 새끼줄을 꼬아서 통발을 만들어 봤거든. 그러니까 고기가 잡히더라 이기라. 이 동네 나름의 그런 전통이 있다 보니까, 저 앞에 보이는 배가 전부 물메기 잡는 배라."

"전부 다요?"

"전부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은 두 달 동안 작업하면 경비 빼고 일 년 쓸 돈이 나와. 딱 그것만 하고 안 하지. 고마 농사나 짓고."

"농사도 제법 잘 짓는 것 같던데요. 오다 보니 여기 밭에 마늘이 참 좋던데요."

"마늘도 좋지. 금포마늘 하면은 밭마늘이기 때문에 단단하다고."

"마늘이 남해에서 여기 품질이 제일 좋아." (아까 한마디 거들던 그 어민이 이 대목에서 다시 한마디 거들었다.)

"다른 데는 다 논마늘인데 여긴 밭마늘이라."

"이야~ 좋은 동네네요."

"우리 동네니까 내가 자랑 좀 더해야겠다. 겨울이 되면은 일조량이 여기가 제일 많다고. 그리고 여기는 눈이 안 와. 상주에는 와도 여기는 안 와."

"금산 때문에요?"

"그런 면도 있지만, 내가 오지 마라 그랬지!"

"하하하."

유쾌한 대화가 끝나고 우리는 잠시 바다를 같이 바라본다. 성인가요 메들리는 더욱 신이 나서 쿵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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