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히 흘러나오는 전주 속으로 갈매기 울음과 파도 소리가 어우러져, 한껏 분위기를 더한 노래는 사랑의 슬픔을 고백하는 듯 듣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한때 크게 유행했던 김원중의 '바위섬'을 사랑 노래 정도의 대중가요쯤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겠다. 실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고립된 광주를 바위섬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나타낸 곡이라면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바위섬'은 신군부의 계엄군들에게 포위된 광주를 망망대해 외로운 섬에 비유하여 만든 노래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고 있던 김원중은 광주에서 음악 좀 한다는 젊은이들이 모여 기타를 치며 즐기던 곳에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1회 MBC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은 박문옥, 가톨릭생활성가의 '조용필'로 불린 김정식,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신상균과 조선대를 다니던 배창희를 만난다. 어느 날 함께 지내던 배창희가 '바위섬'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왔다. 그는 전남 고흥 소록도에 갔다가 영감을 얻었는데, 고립된 소록도의 모습이 마치 5·18 당시 광주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 당시 계엄군은 광주를 포위하여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게끔 철저히 봉쇄했다.

5·18 현장을 고스란히 목격했던 배창희는 당시 상황을 음악에 대입시켜 노랫말을 쓰고 곡까지 붙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바위섬'을 또래인 김원중에게 주었고, 김원중도 그의 말에 공감하며 노래를 불렀다.

1984년 광주지역 가수들은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옴니버스 음반을 냈다. 음반의 표지도 자신들이 직접 그릴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만든 최초의 음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원중은 자신을 '국내 첫 지방분권 가수'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음반에 막내로 참가한 김원중은 '바위섬'을 불렀는데 곧 그의 가수 데뷔곡이 되었다.

광주지역에서 마음 맞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만든 음반인 '예향의 젊은 선율'은 대중가요 활동이 서울에 몰려있던 중앙집권에 대한 반기였으며, 차츰 다른 지역의 대중가요 음악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박문옥, 김정식, 김종률과 신상균, 그리고 김원중의 합작품인 '예향의 젊은 선율'에 실린 '바위섬'은 처음에는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우선 지역 라디오방송국에 음반을 돌렸다. 이들의 음반은 운 좋게도 연일 지역전파를 탔고, 특히 '바위섬'은 입소문이 나면서 서울까지 퍼졌다. 덩달아 김원중도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드디어 김원중은 1985년 1월 7일 서울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하면서 공식적인 방송활동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는 첫 방송부터 내놓고 '바위섬'의 의미를 말할 수 없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에서 5·18 광주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어였다. 1981년 MBC대학가요제에서 정오차는 '바윗돌'이란 노래로 대상을 수상했다. TV프로그램에 출연한 그에게 사회자가 '바윗돌'의 의미를 묻자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노래이며,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5·18 민주열사의 넋을 기리는 노래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방송을 탄 셈이다. 이런 연유로 정오차의 '바윗돌'은 바로 금지곡 처분을 받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김원중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 공연이나 사석에서 '바위섬'이 5·18의 광주라고 전하면서, 방송에서도 기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말할 생각이었다. 어느 날 방송에 출연한 그에게 "바위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사회자가 물었다. 그는 "80년 5월 당시 광주의 모습입니다."라고 말했고, 이후에도 몇 차례 바위섬의 숨은 뜻을 전했다. 사회자는 대답을 듣고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바위섬'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김원중은 그때를 회상하며 "당국 관리자들이 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던지, 아니면 저를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 후 '바위섬'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 라디오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며, 1985년 KBS의 '좋은 가사' 후보에 오르는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광주의 아픔을 담은 지역 대표곡으로서 빛을 본 대중가요가 되었고, 나아가 거의 국민가요 수준의 히트를 쳤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김원중은 1987년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빌려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는 문병란(1935~2015) 시인의 '직녀에게'를 노래로 발표했다. 하지만 방송금지처분을 받으면서 방송활동의 제약과 상업적인 가수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3년간 가요계를 떠난다. 김원중은 한동안 칩거를 하면서도 5·18의 참상을 목격했던 아픈 기억을 저버리지 못하였기에, 1989년 전국 처음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길거리 공연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뜻있는 음악인들과 함께하는 '5·18전야제문화공연'을 금남로 도청 앞에서 개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는 민중가수라 불리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문병란 시인의 '직녀에게'는 '5·18광주민주화운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한다. 시인은 '직녀에게'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을 언급한 적이 있다. 통일의 염원을 읊은 서정시 '직녀에게'는 70년대 중반쯤 <심상>이라는 시전문지에 발표한 작품으로 1981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된 <땅의 연가>란 시선집에 실려 있다. 그의 시는 1980년 5월 이후 검거망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윤한봉의 부탁으로 같이 활동하던 작곡가 김형성이 통일 염원의 노래로 작곡했고, 그 노래는 미주와 유럽 등지에서 해외 동포에 의해 불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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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시인이 제3세계 예술제가 열리는 서독 베를린에 들렀을 때, 거기서 뜻있는 해외 동포로부터 이 노래의 악보와 육성으로 부른 테이프를 받아왔다. 그는 이 노래가 국내에서도 불리기를 바라며, 전남대 사대 영문과를 나왔지만 음악이 좋아 방송계로 진출한 애제자 오창규에게 건네주었다. 오창규는 그것을 다시 통기타의 반려자가 된 박문옥에게 전달한다. 해외에서 부르는 노래가 가곡풍인데다 국내 정서와 맞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작곡에 대한 야심이 있었는지 박문옥은 가사에다 다른 곡을 붙였다. 그리하여 새로 탄생한 민중가요 '직녀에게'는 작곡가 박문옥과 깊은 인연이던 김원중을 만나게 되었다.

그 노래는 서서히 반향을 일으켜 '바위섬'의 여운을 이어받는 듯했으나, 작사가인 문병란 시인이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재야운동권세력으로 간주되어 방송금지되는 불운을 맞았다. 참으로 시대의 안타까운 현상이라 하겠다. 하지만 '직녀에게'는 모든 민중가수의 상징적 애창곡이 되어 시대를 대표하는 통일 염원의 노래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그들의 아픔이 승화된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가슴은 뭉클해지고 저미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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