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지나 더욱 깊어진 나의 노래 '어슴푸레'

모니터 속 영상을 통해 채민 씨를 처음 보았다. 어두운 카페에서 그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다. 꾸밈없이 뱉어내는 짙은 목소리 뒤로 해가 지고 있는 풍경, 거리를 홀로 걷는 이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지역에서 노래를 해온 구채민(49) 씨는 지난 3월 첫 앨범을 내놓았다. 기타를 잡은 지 30년 만이다. '어슴푸레'라는 곡을 첫 싱글로 선보였고 뒤이어 4월에는 다섯 곡을 담은 앨범이 나왔다.

기타와 노래를 만난 소년, 록밴드에 들어가다

채민 씨가 중학생이던 때였다. 형이 어느 날 기타를 가지고 왔다. '두웅' 하고 울리던 통기타 소리는 어린 채민 씨 마음을 단번에 끌었다.

"형, 누나가 있고 제가 막내였어요. 형이 기타를 치는데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때부터 '아, 나도 치고 싶다. 치고 싶다' 속으로 그러고 있었죠. 형이랑 네 살 차이였는데 형이 사고를 좀 치고 다녔어요.(웃음) 아버지가 화가 잔뜩 나셔서 형 기타를 부수셨어요."

언제 한번 만져볼 수 있을까 기회를 엿보던 기타가 눈앞에서 부서지자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몇 주를 참다 보니 기타 사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결국 그 말을 입에서 뱉고 말았다.

"형 기타를 부수는 걸 봤을 텐데 제가 기타를 갖고 싶다고 하니 아버지가 잠시 할 말을 잃으셨죠. 그리고 눈을 감으시더니 20~30초 있다가 '…얼매고?' 이러셨어요. 아버지가 왜 사주셨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렇게 기타를 사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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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구채민 씨./서정인 기자

그렇게 품에 들어온 3만 원짜리 보급형 삼익기타는 소년의 보물이 됐다.

"기타를 사니 기타 교본을 주더라고요. 그걸 보며 연습하기 시작했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기타로 반주하며 노래를 하는 것이 채민 씨에게는 굉장히 큰 즐거움이었다.

"고3 때 시험을 치고 나니 진주에서 시험 친 학생들이 공연할 수 있는 그런 행사가 열렸어요. 그때 친구 둘과 처음 공연을 했어요. 노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였다고 볼 수 있죠."

86학번으로 경상대학교에 입학한 채민 씨는 교내 동아리 록밴드 '베이비스트링스'에 들어간다.

"농생물학과에 들어갔는데 모든 생활은 밴드와 노래가 중심이었어요. 87년에는 강변가요제 본선까지 올라가서 LP 더블재킷 앨범에 노래가 실리기도 했어요."

2학년까지 밴드 활동에 온 에너지를 쏟다가 휴학 후 1년을 놀고 군대에 갔다. 제대 후에는 밴드를 떠나 혼자 기타를 메고 노래하러 다녔다.

"동아리에서 1학년은 연습하는 학년, 2학년이 주로 활동하는 멤버예요. 2학년이 지나고 나면 그냥 선배가 되어버리죠. 그 뒤로는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90년대 초반쯤인데 그때만 해도 통기타가 아주 인기가 많았거든요. 학교 다니면서 저녁에 두세 군데 아르바이트를 하면 다른 알바에 비해 보수를 괜찮게 받을 수 있었어요."

노래하는 시간은 행복했지만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자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학 시절 내내 공부 말고 다른 곳에 마음을 뺏겼으니 학점이 좋을 리 없었다.

"그때만 해도 졸업정원제라고 해서 학점이 아주 안 좋으면 졸업을 못 했어요. 노래를 그만하고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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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구채민 씨./서정인 기자

채민 씨는 교수님을 찾아가 실험실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제가 좋아하는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교수님이 실험실에 들어오는 건 말리지 않겠는데 왜 음악을 그만두려 하냐고 하세요. 그러면서 본인 얘기를 해주셨어요. 교수님이 대학시절이니 기타가 아주 귀할 때였죠. 그때 클래식 기타를 하셨대요. 진짜 기타는 못 사고 합판으로 기타 모형을 만들어서 줄 그어놓고 손으로 연습을 하셨대요. 일주일에 한두 번 진짜 기타를 만질 기회가 생기면 연주를 하고요. 교수님의 형이랑 같이 하셨는데, 교수님은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에 기타에 시간을 너무 뺏기면 안 될 거 같아 기타 치는 걸 그만두셨어요. 그런데 교수님 형은 다른 일을 하면서도 기타를 놓지 않으셨대요. 시간이 한참 흐르고 보니 형은 지금 사업을 하시면서도 계속 기타 연주를 하신대요. 교수님이 그게 너무 부럽다고 하시더라고요. 저한테도 공부를 하는 것은 좋은데 기타를 놓지는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저녁에 나가서 노래하기 시작했죠. 공부도 하고요. 그렇게 졸업을 했죠."

진주에서는 혁신적이었던 연극 음악 작업, 철공소 운영하며 연극배우로도 활동

스물일곱에 결혼을 하고 나서 시내에서 작은 가게를 할 때였다. 연극을 하는 학교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극단에서 음악을 담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연극 음악을 맡을 사람이 없다고 극단에 한번 와보래요. 저녁에 연습하는 곳에 찾아갔죠. 지하 소극장의 음침하고 습한 기운이 느껴지고, 지저분한 공간이었죠. 거기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는 배우들, 연출진, 스텝들을 보았는데…. 그 진지한 모습들을 보고 나서 연극에 푹 빠져버렸어요."

1974년에 창단해 4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극단 현장'이었다.

"그때부터 제가 하던 노래가 아닌, 연극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죠. 그때는 제대로 된 녹음시설이 없었어요. '워크맨'으로 테이프에 녹음을 하던 시절이었죠. 일본 가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장비를 사고 윈도우가 나오기 전의 컴퓨터로 음악을 작업하고 녹음해서 음향과 음악을 만들었죠. 진주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작업하는 걸 처음 본 거예요. 연극하는 분들도 놀라시면서 아주 좋아하셨죠."

1997년 제15회 전국연극제 최우수상을 받은 '불의 가면'에 참여하기도한 그는 연극판을 다니며 활동을 이어갔다. 이곳저곳 부르는 곳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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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구채민 씨./서정인 기자

"실제 음반 작업이 가능한 녹음실도 만들었어요. 거기서 끝내 제 작업은 못 해봤지만(웃음) 진주에서 운동권 노래를 하는 노래패 '맥박' 1, 2집을 우리 녹음실에서 만들었어요, 진주에서 자체적으로 음반을 만든 건 처음이었죠."

채민 씨는 선배가 하는 사천의 한 극단에 들어간다.

"녹음실도 그때는 정리했고 극단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연기도 하고 연출도 했죠. 연극에 완전 빠져있었죠."

뒤이어 채민 씨 입에서 '몰락'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버지와 형이 사업을 했었는데 그 사업이 망했어요. 부도가 난 거죠. 줘야 할 돈을 못 주는 상태가 됐는데…. 예전에는 가족들이 기본적으로 사업하는 데 필요한 보증을 섰어요. 그래서 저한테도 빚이 생겼고 집안이 몰락했죠. 흔히 말하듯이 풍비박산이 난 거죠."

더 이상 연극판에 있을 수가 없었다. 쉽게 말하면 돈벌이 안 되는 연극 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진주로 돌아와 이런저런 일을 찾던 채민 씨는 후배가 하는 인테리어 일을 도우며 지냈다.

"어느 날 쇠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들어왔는데 그 일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전 따로 형이랑 철공소를 시작했어요. 2004년 정도였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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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활동하는 인디뮤지션 구채민 씨와 카페 부에나비스타 추연철 사장. /서정인 기자

몸을 쓰고 거친 작업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저는 집안일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작업 같은 것, 저를 둘러싼 모든 것에 굉장히 화가 나 있었어요. 되게 거칠어져 있었어요. 조금만 시비가 붙어도 싸우려 든다거나…. 그래서 아마 굉장히 강한 물질인 쇠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에 끌렸나 봐요. 그 일을 10년 이상 했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채민 씨는 여유를 좀 찾았다고 한다. 연극도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극단에서 의뢰가 들어오면 작업을 하고 최근에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극단 가배에서 활동했다. 지난 2015년에는 진주남강유등축제 유등을 만드느라 누구보다 여름을 뜨겁게 보냈다.

"유등 제작할 때 중국 기술에 많이 의존했거든요. 유등 제작할 우리나라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축제 3~4개월 남겨놓고 작업을 했죠. 조형 작업, 배접(천을 포개어 붙임) 작업, 채색 작업, 안에 전기 작업으로 나뉘는데 제 작업은 모양을 만드는 거죠. 모양을 만드는 데 철을 이용하거든요."

어슴푸레한 시간을 지나 깊은 목소리를 얻다

소리를 쭉 밀어낼 때 허스키하게 그을리는 목소리는 그의 노래들, 그의 인생과 닮아있다. 채민 씨는 놀랍게도 원래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전 대학가요제 나갈 때도 맑은 목소리였어요. 그런데 집이 그렇게 되고, 괜히 스스로에게도 화가 솟았던 그때 이후로 노래를 부르면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어요. 먼지 때문일 수도 있어요. 쇠 가공을 하면서 미세먼지를 늘 마셨으니까요. 저녁에 코를 풀면 시커멓게 묻어 나오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어느 음 이상 올라가면 목소리가 갈라졌어요. 그래도 저는 지금 이 목소리를 굉장히 좋아해요. 어떤 영화에 '재즈를 하려면 네 삶이 재즈가 되어야 한다'라는 명대사가 나와요. 저는 노래에서 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부르는 노래에 지금의 목소리가 맞는다는 말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슴푸레 해가 지고/빌딩 너머 긴 어둠이/어설픈 내 얘기도/서투른 내 몸짓도 음 희미해지고/뿌연 거리 위에 춤추듯 헤매이는 사람//서성이는 발길 따라 아쉬움만 깊어가네/환한 불빛 속에 초라한/내 모습은 음 희미해지고/누구든 붙잡고서 긴 내 얘길 해볼까//가슴만 내민다고 내 손을 잡아줄까/흐릿한 환상일 뿐 흐릿한 환상일 뿐/긴 그림자만 늘이며 걸어가는 밤//가슴만 내민다고 내 손을 잡아줄까/흐릿한 환상일 뿐 흐릿한 환상일 뿐/긴 그림자만 늘이며 돌아오는 밤

구채민 1집 1번 트랙 '어슴푸레'는 오래된 노래라고 했다.

"제가 군대 다녀와서 저녁에 알바하러 다닐 때 만든 노래예요. 그때도 이 곡으로 공연하기도 했어요. 지금 하고 곡이 달라진 건 없어요. 곡을 해석하는 내가 달라졌죠. 그때는 외로웠어요. 왜 이리 혼자일 수밖에 없을까. 근데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게 너무 당연한 거였어요. 혼자인 게요. 외로운 건 당연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외로움 때문에 너무 힘들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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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창신 <인생역경대학> 출판기념회 공연 모습./이종현 기자

앨범은 그의 노래를 누구보다 아끼는 친구들이 나서서 만들어 줬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낸 모든 친구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채민 씨 앨범 재킷 마지막 페이지에 새겨진 말이다.

"앨범을 낼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우산'이라는 라이브바를 하는 손정일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의 기타 연주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 친구가 공연을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2015년 연말에 '다원'이라는 카페에서 공연을 했어요. '구채민쇼'라고 이름을 붙였죠.(웃음) 공연을 하고 나니 앨범을 만들어보자고 해요. 또 '우주인프로젝트'라는 앨범을 발표한 후배가 있는데 그 친구가 녹음을 맡아줘서 셋이서 작업을 했죠."

그렇게 하다가 정말로 앨범이 나와버렸다. 노래를 한 지 30년 만이었다. 진주라서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었다.

"제가 여기에 오래 살았고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흘러가는 맥락이 있어요. 좁은 곳이라 그런지 연대가 잘 되어있죠. '뭘 해보자' 하면 그게 가능해요. 돈이 없어도요. 이 카페(부에나비스타)도 그렇고 곳곳에 공연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오픈마이크가 있는 곳도 있고요. 자유롭게 음악 하는 후배들이 많이 생겼으면 했어요. 실제로 활동하는 친구들도 많고요. 서울에서 활동할 생각 없냐는 그런 이야기도 듣죠. 지나가는 소리였을지도 모르지만 저한테는 그게 그렇게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진주에 있으니까 어쩌다 보니 앨범도 나왔잖아요.(웃음)"

채민 씨는 '어슴푸레'를 만들었을 때보다 본인이 내보일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고 했다. 앨범 속 또 다른 자작곡인 '책임'이라는 곡에서 그 말의 의미가 드러난다.

"녹음하는 과정에서 만든 노랜데 제가 '어슴푸레'를 만들었을 때보다 훨씬 나이를 많이 먹었잖아요. 그전까지 곡은 그저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했다면 이제는 친구나, 후배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게 생기는 것 같아요."

채민 씨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지내면 족하다고 말했다. 그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가져온, 속마음이 비치는 글을 조심스럽게 옮겨본다.

'나는 나의 행복(즐거움)을 위해 이기적인 시간을 산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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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창신 <인생역경대학> 출판기념회 공연 모습./이종현 기자

"꾸준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딸이 둘인데 사실 지금은 이혼을 한 상태예요. 그래도 아주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어요. 부모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제가 거의 못했거든요. 애 엄마가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이제 내가 아이들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내 삶을 보여주자는 거죠. 깊은 속은 모르겠지만(웃음) 아빠를 좋아해요. 제가 연극 공연할 때 남자친구랑 와서 보고 가기도 하고. 이기적이라는 건 제가 뭔가를 찾아가고 있는 것, 그게 이기적인 거죠. 저를 위한 거니까요. 근데 제가 그렇게 꾸준하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내 주위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 같아요."

인터뷰 후 어떤 수식어로 그를 표현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가수'라는 말만으로는 그를 담기에 부족한 듯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그를 오랫동안 보고 싶다. 그를 만나고 싶다면 진주 곳곳에서 소박하게 열리는 공연에 집중하자. 기타를 멘 채민 씨가 언제 불쑥 나타나 노래를 시작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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