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외침, 메이데이 (3) 1973년생 고현태
사고 후 정신적 트라우마 심각
괜히 내 탓인 것만 같아 괴로워
삼성 사과 받으면 덜 억울할 듯
1973년생. 고향은 경주. 형, 나, 동생 둘.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 계속 살았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현장 일을 하기 전까지는 빵집을 운영했다. 군대를 마치고 셋째 이모 제안으로 제빵을 배웠다. 규모는 작지만 빵집 세 곳을 운영했다. 한 군데 사정이 어려워져서 다른 매장 수익으로 메우다가 같이 힘들어졌다.
사업을 접고 방황했다. 친구가 대우조선해양 현장 배관팀 반장이었는데, 정직하게, 노력한 만큼 벌이가 괜찮다고 제안해서 거제로 갔다. 거제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1차 하청업체 소속으로 바다 위 정유공장이라는 해양플랜트 배관 설치 일을 했다.
업무 강도는 중상 정도였다. 어쨌든 몸 쓰는 일이니까 고됐다. 망치 한번 잡아 본 적 없었는데 일을 배우니 재밌더라. 적성에 맞았나. 2013년 3월 조선소로 들어가 그해 말까지 일했다.
조공(조수)은 급여가 적다. 일당 7만 원이었나. 한 달 벌면 200여만 원. 사업 접고, 빚지고, 개인회생도 했고, 생활비 보내기도 빠듯했는데 배우는 데 욕심도 생겨서 일하는 데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한 업체에서 일하면 정해진 단가가 갑자기 더 오르지는 않아서. 2013년 말 배관팀 반장이 됐다.
거제 조선소에 먼저 자리잡고
어렵사리 형 불러 함께 일해
거제에 자리 잡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낚시를 좋아하는데 갈 데도 많고. 그때 형도 이런저런 사업을 했는데 잘 안됐다. 택배 일을 어렵게 하기에, 내가 자리를 잡은 상황이라 제안했다. 형은 몇 달 고민하다 2015년쯤 거제로 왔다.
중국에 일감을 뺏기면서 조선업 침체기가 왔다. 결정을 잘못했나, 다른 일을 해야 하나. 형과 같이 떠날 고민을 했다. 반도체가 호황을 맞아 옮기려고 했다. 사고가 5월에 났는데, 7월쯤 옮기려 했다.
당시 현장은 굉장히 분주하고 정신이 없었다. 기간을 맞춰야 하니까. 막바지에 혼재 작업이 많았다. 원래 혼재 작업은 안 되는데 다 같이 하는 탓에 먼지가 엄청났다. 휴게실도 모자랄 정도였다. 배 위에는 그곳(메인 덱)밖에 쉴 데가 없었고, 쉬는 시간이면 사람이 많이 몰렸다.
그날은 휴일이었는데, 바쁘니까 출근하라고 독려를 많이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날 형은 집에 가려고 했다더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출근했다.
형과는 멀지는 않았지만 다른 공간에서 작업을 했다. 원래 일할 때는 자기 맡은 일이 있으니까 쉬는 시간에나 연락해서 만났다. 형은 좀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쉬는 시간에도 내가 전화해야 쉬었던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나보다 빨리 쉬러 갔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형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그때 크레인이 떨어졌다. 형이 먼저 나왔는지는 몰랐다. 어디서 작업을 하는지 정확히는 몰랐으니까.
형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형은 사고를 안 당했겠지, 밑으로 내려갔겠지, 대피했겠지. 계속 전화를 거는데 안 받더라. 바로 옆 배 꼭대기에 올라가 형이 있나 찾았다. 멀어서 안 보여 다시 내려왔는데, 팀장이 조용히 불렀다. 형 보러 가자고. 무슨 이야기냐고 했더니 형이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다고, 보러 가자고. 그때 알았다. 오후 4시쯤이었나. 사망자가 6명이었는데, 설마 형이.
휴일에도 등 떠밀려 현장 출근
쓰러진 크레인에 허망한 죽음
너무 안타까웠다. 그날 쉬기로 했으면 그냥 쉬지. 뭐하러 출근해서 사고를 당했나, 왜 하필 그날은 평소랑 다르게 빨리 움직여서 사고를 당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크레인이 떨어지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떻게 그런 사고가 났는지. 다들 너무 놀라 대피하고, 아파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고. 반도체 쪽 일을 하러 평택에 왔는데, 새로 건물이 막 올라가는 곳이라 크레인이 많다. 심적으로 좀. 크레인을 보니까 예민해지더라. 동료와 마찰도 있고.
서울 집으로 와서 두세 달은 일을 못했다. 고용노동부에 문의하니까 트라우마 산재 승인은 지금까지 없었대서, 인정이 어려울 거라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었다. 몇 년 지나 우연히 기사를 본 동생이 트라우마로 산재 신청한 사람이 있대서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이하 산추련)에 연락했다. 2019년쯤 승인을 받았다.
공포감이 너무 심했다. 무기력해서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해도 아무런 생각이 안 났다. 아이와 아내에게 무기력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일을 다시 시작했는데, 건망증이 너무 심해졌더라. 기억력이 좋았는데, 평소 안 하던 실수를 계속하고.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어딜 가려고 했는지를 잊고. 단기 기억 상실 비슷한 경험이 잦았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치료받으면서 트라우마를 알았다.
솔직히 산재 승인을 받으면 심리치료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단순히 의사와 상담하고, 약 처방을 받는 게 다더라. 어느 병원에 가도 절차는 같았다. 직접적인 도움은 안 됐다. 정말 치료받는다는 생각을 못 하겠더라. 그래서 1년 후 추가 신청은 안 했다. 처방약을 다 먹으면 일을 못 하겠더라. 멍해지고, 무기력하고. 그게 너무 싫어서, 그 이후로는 병원에 안 갔다.
2019년쯤 또 대우조선에 일하러 갔다. 심리 치료도 안 되고, 도움 안 될 치료를 받을 바에야 사고 현장 가까운 데서 직접 부딪히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용감했다고 해야 하나, 미련했다고 해야 하나. 처음 한 달은 덤덤했는데, 또 무너졌다. 크레인이 있으면 곧바로 가야 하는데, 항상 크게 둘러 갔다. 더는 못 있겠어서 한 석 달 일하고 떠났다. 다시는 거제는 못 갈 것 같다.
불면증도 심해졌다. 하루 2~3시간만 잤다. 정신과 들러 수면제를 받았다. 2020년부터 2021년 봄까지 그랬다. 지금은 좀 괜찮다. 조금 예민해졌다가 다시 차분해졌다.
평택엔 지난 2월쯤 왔다. 다른 데 있다가 삼성중공업 다닐 때 반장이었던 형이 같이 일하자 해서 왔다. 같은 배관 일이라도 조선소보다 일이 수월하고 작업 환경도 낫다. 삼성에서 정말 일하기는 싫은데 먹고살려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사고 관련 소식은 따로 찾아보지는 않는다. 가끔 산추련에서 연락이 와 물어보고 그런다. 그때 기억은 빨리 잊고 싶다. 들어도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삼성에서 진심으로 사과했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잊고 싶다. 솔직히 처음 취재 요청이 왔을 때 답장을 안 했다. 피하고 싶었다. 힘들다기보다는 조금 비겁해졌나, 자꾸 피하는 것 같았다. 아직 힘든 이야기다.
장례식장에서 끝까지 버틴 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도 있어서. 끝까지 안 하더라.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약자가 대기업에 이기는 건 불가능하니까 첫 판결도 예상은 했다. 바뀌리라 약간은 기대했어도, 큰 기대는 아니었다. 대법원에서 뒤집히고 속이 뻥 뚫리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조금. 진짜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데 아쉽다는 생각이었다.
파기환송심 결과가 어떻든 사과가 있다면 그나마 낫겠다. '우리가 잘못했다.', '정말 죄송하다.', '억울하게 가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다.' 그런 진심 어린 이야기를 듣고 싶다.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고 인정하는 걸 보고 싶다. 중대재해처벌법,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너무 늦게 생겼다. 빨리 생겼으면 뭔가 달라졌을 텐데 아쉽다.
희한하게도, 거짓말이 아니라 형이 매일 생각난다. 한 살 차이인데, 어릴 때는 막 치고받고 싸우잖나. 결혼하고 나서 세상 제일 친한 친구가 됐다. 형 가고 너무 힘들었다. 지금도 많이 보고 싶다. 참 각별했던 형이라, 서로 힘들 때 거제에서 같이 일하면서 챙겼는데 갑자기 가니까…. 형이나 나나 무뚝뚝해서 표현을 잘 못 한다. 사고 나기 몇 달 전이었나, 형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하더라. '진짜 사랑한다'고.
나 때문에 조선소에 와서 일찍 간 게 아닌가, 죄책감이 있다. 형하고는 장난도 많이 치고, 어릴 적 별명을 부르던 사이였다. 그랬던 대상이 사라졌고, 많이 그립다. 꿈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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