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외침, 메이데이 (2) 1981년생 김영환

세상은 김영환(41) 씨에게 어서 빨리 어른이 되라 떠밀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채 조선소로 향했다. 고달픈 세상살이가 겨우 익숙해질 무렵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를 겪었다. 열여덟에 처음 일터로 나온 뒤 마흔이 넘은 지금도 '아파도 일하는 삶'을 반복한다. 아픈 노동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근로복지공단을 향해 되묻는다. 보험회사냐고.

대구에서 자랐다. 부모님 이혼으로 할머니랑 할아버지 손에 컸다. 아버지는 가게 입간판 글씨를 쓰고, 네온사인을 만들었다. 손재주가 좋았다. 열 살이 되던 해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버지 혼자 화장실도 못 가서 어린 형제가 대소변을 받아냈다. 아버지가 친구들과 점점 멀어지고, 생활 능력을 잃어가는 걸 고스란히 지켜봤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공납금도 내지 못해 학교를 그만뒀다. 23살이 돼서야 겨우 학교를 마쳤다. 집안에 돈 버는 사람은 나 하나. 닥치는 대로 일했다. 막노동하거나 공장 다니거나. 고모가 운영하는 치킨 가게에서도 전단을 뿌리면서 배달일을 했다. 정말, 정말 힘들었다. 나도 아직 어린데.

2008년 처음 조선소에 발을 디뎠다. 하루는 도장 스프레이 기계를 청소하다 허리를 다쳤다. 그 무거운 기계를 들었다, 놨으니 당연했다. 회사에서 공상 처리를 해줬는데 입원은 안 시켜줬다. 집에 누워만 있다가 2주 뒤 공상 처리도 안 된다길래 다시 일하러 나갔다.

다치는 사람? 많이 봤다. 어딜 들이받아서, 넘어져서 다쳤다더라. 그런 얘기들 다들 쉬쉬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왜 무리해서 다쳤느냐"고 나한테 나무랐다. 4대 보험 적용도 안 된다. 파이프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족장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했다. 다행히 와이어에 손이 걸려 살았다.

우리는 노예다. 노예. 플라스틱 빨대다. 사람이 아니라 일회용품이다. 직영이 아니니까. 직영은 작업복에 회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플라스틱 출입 카드도 가슴팍에 딱! 달고 다닌다. 누가 봐도 직영인지, 아닌지 안다. 인도에 계급 사회가 있다던데, 그거랑 똑같다. 거제도 어린이집에서도 애들끼리 '니네 아빠 직영이냐'부터 묻는다더라.

그때 언론은 조선소가 호황이라 떠들었다. 하청업체는 아니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고, 일감 없으면 나가라고 한다. 불만 있어도 말도 못 꺼낸다. 일한 지 1년 넘으면 나가야 한다. 퇴직금 달라고 하거나, 나가라고 했는데 안 나가면 협력업체 사장들끼리 명단을 공유한다. 거기 이름 적히는 순간, 일 못 하는 거다.

▲ 2017년 5월 1일 발생한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 김영환 씨. 김 씨는 사고 트라우마에 시달렸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것조차 어려웠다. /김다솜 기자
▲ 2017년 5월 1일 발생한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 김영환 씨. 김 씨는 사고 트라우마에 시달렸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것조차 어려웠다. /김다솜 기자

사고가 일어난 그날. 도장을 하다 페인트를 다 썼다. 페인트 가지러 가면서 쉬고 오려 했다. 하필 담배가 없었다. 친구한테 빌리자니 걔도 담배가 없었다. 희한하게 그랬다. 흡연 장소로 안 가고 서 있었다. 오후 2시 53분쯤인가. 지브 크레인에서 강철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을 들어 올렸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기에 또렷이 기억한다. 갑자기 '타당' 소리가 나면서 크레인 고리가 떨어졌다. 어? 쳐다보는데 우르르 쾅쾅 한순간에 무너졌다.

휘리릭, 휘리릭. 와이어가 돌아갔다. ㄷ 자 노란색 파이프에 와이어가 감겼다. 지브 크레인이 왼쪽으로 기울면서 노란색 파이프에 부딪혔다. 종소리가 들리고, 5초 정도 세상이 멈췄다. 난 이동식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바로 그 앞에 크레인이 멈추어 섰다. 화장실에서 누군가 나왔다. 하마터면 그 사람도, 나도 죽을 뻔했다.

으악, 아아. 비명이 들려왔다. 친구를 쳐다봤다. 갓 스무 살 된 애를 붙잡고 다독였다. 처음 조선소에 온 애였는데 덜덜 떨었다. 어떤 분은 ㄴ 자로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의 가슴을 끌어안고 질질 끌었다. 내가 어떻게 대피했더라. 축 처진 사람을 옮기는 모습이 떠올랐다가, 끊어졌다가. 드문드문 기억난다. 뉴스 보고 둘째를 임신한 집사람이 괜찮냐고 전화가 왔다. 눈물이 났다. 내가 "사람이 죽었다"는 말만 반복했단다. 완전 엉망진창이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따지고 보면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 회색 옷 입은 사람이 죽었다. 우리가 철판에 페인트를 칠하면 거기에 불연 소재를 바르는 사람이다. 굳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죽었을 거 같아서. 알면 더 힘들어졌겠지. 어느 정도 복구되니까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라더라. 계속 일했다.

 

아프고 다쳐도 일자리 지키려
조선 현장 나가서 일하던 나날
사고로 동료 잃고 충격 큰데
몸·마음 돌보지 못하고 복귀

하루는 일하다 바람이 불면서 먼지가 날렸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욕을 했다. 나도 화나서 멱살 잡고 한 번 붙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마 그 사람도 크레인 사고 목격자가 아니었을까. 서로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뻔히 알아서 평소 같으면 이해했을 텐데 예민해졌다.

잠을 못 잔다. 자다 깬다. 해 뜨기 전에 그거 아나? 푸르스름하게 날 밝는 걸 확인해야 잤다. 일하다 말다 했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더니 일하기 싫었다. 출근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심장도 아팠고, 숨쉬기 힘들었다. 비 오듯 땀을 쏟기도 했다.

나는 터미네이터에 집착했다. 휴대전화로 터미네이터 영화를 받아서 계속 돌려보는 거다. 터미네이터는 자기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때까지 쓰러지지 않는다. 총을 쏴도 걸어온다. 그런 강인함을 동경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너무 약하니까. 그 사고 한 번 봤다고 무너지고 있으니까.

가족이 있는 대구로 가면 난리가 났다. 조금만 거슬려도 다 때려 부쉈다. 라면 먹다가 집사람한테 한 소리 들으면 뜨거운 냄비를 손으로 집어 던지고. 진짜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갓 태어난 둘째가 집에 왔을 땐 너무 싫었다. 아기는 배고프거나 불편하면 울잖아. 당연한 건데 순간 나는 못 참고 아기 이마를 때렸다. 어? 내가 왜 이러지. 미쳤나. 여기 있으면 사고 치겠다 싶었다.

다 때려죽인다고 칼을 들었다. 경찰까지 찾아와 날 체포하려길래 동생이 말리면서 형이 정상이 아니니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했다. 그날 동생이 그러더라. "이러다 둘 중 하나 죽는다. 애들이 불쌍하지 않냐. 내가 볼 땐 형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요새는 정신과 가도 이상하게 안 본다". 2017년 9월 중순, 그때 내 돈 들여서 처음으로 정신과에 찾아갔다.

내 친구는 산재 신청도 안 했다. 일감 못 받을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은 이걸 비교한다. 같은 사고 겪고도 친구는 잠 못 자고 버텼는데, 너는 뭐냐는 거다. 그러다 협력업체가 폐업해서 그만뒀다. 협력업체 사장은 빠지고 총무부장이 각서를 쓰라고 했다. 나는 멀쩡하니까 치료는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다. 삼성에서 원한다고 말했다. 시킨 거지.

나는 산재 판정받았다. 정신과 진료 5분 안에 끝난다. 기분 어때요? 밤에 잠은 잤어요? 근로복지공단 주치의는 산재 종결을 계속 권했다. 난 아픈데 왜 선생님이 판단하느냐고, 이게 정상이라고 보느냐고 따졌다. 병원 옮기고 나서도 치료 중단하겠다고 했다. 난 아직 낫지 않았는데, 연장 여부도 논의하지 않았다. 일방적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아픈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꼭 무슨 보험회사 같았다. "선생님, 인제 그만하셔도 되잖아요" 이런다. 웃긴다. 이번에 내 친구가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했다. 안전 센서 없는 프레스에 협착됐다. 손톱이랑 손가락 사이를 꿰맸는데 그걸 보고도 근로복지공단은 종결하자고 했다. 그게 무슨 근로복지공단이냐. 근로복지공단이란 말 쓰면 안 되지.

지금도 수면제 없으면 안 된다. 수면제 안 먹었다가 3일 못 잤다. 끔찍하다. 내 몸은 피곤하고 자고 싶다는 걸 느끼는데 못 잔다. 코까지 막히면 정신이 나갈 거 같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다. 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황장애가 온다. 경찰이 집으로 출동하는 일도 많았다.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봤다. 집사람 처가가 있는 경기도로 이사했다.

 

일은커녕 수면제 없인 잠 못자
산재 치료 충분히 받기 어려워

3년 동안 제대로 일 못 했다. 처음엔 일도 못 해서 생계비가 끊기길래 정말 막막했다. 작년 8월부터 일했다. 한 달에 한 번은 병원에 가야 하니까 조퇴나 결근해야 하지 않나? 사람들과 어울릴 용기도 없었다. 공장 가자니, 안전 무시하고 작업할 것만 같고. 배달 일을 시작했다. 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사고 났다. 음주운전 차량에 부딪혀서 오른쪽 팔에 금이 갔다. 보상? 못 받았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는 일부 승소했지만,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판사는 그런다. 왜 너희들이 고통받는지 증명하라고. 사람들은 내가 보상금을 몇억 받은 줄 안다. 사과 한마디 못 받았다. 보상금에 이자 더해서 1000만 원 정도? 김용균 씨 사건 재판 결과를 보고 마음 접었다. 뻔히 사고 일어난 원인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어도 기업은 무죄다. 무죄. 그거 보고 그만하겠다고 했다.

사망사고 나면 기업에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확실하게 처벌받아야 한다. 국가에서 기업에 지원해주고 세금 감면해주는데 큰일이 나면 책임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사람 목숨이 50만 원, 100만 원 하는 것도 아니고. 쉬쉬하면서 조금 버티면 그만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사고를 당해도 법적으로 보호해주면 좋겠다. 그거 하나 원해서 내 이름 밝히고, 얼굴 드러내는 거다. 내 진심을 알아주면 좋겠다. 당해봐야 안다. 당해야만 도와 달라 외치니까.

 

용어 설명

△근로복지공단 : 고용노동부 산하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 업무상 재해를 입은 노동자의 보상부터 재활, 사회 복귀까지 돕기 위해 세워졌다.

△족장 :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가 작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발판. 철사 고정이 풀리거나, 좁은 발판을 지나가는 과정에서 추락해 다치거나 죽는 노동자가 많다.

△김용균(1994~2018) : 한국서부발전이 운영하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20대 청년. 한국발전기술 계약직으로 일하다 연료공급용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졌다. 야간에는 2인 1조로 근무해야 하지만 인력 문제로 혼자 현장에서 일했다. 사고가 일어나고 4시간 동안 시신이 방치되고, 입단속을 하는 등 산재 은폐 의혹도 제기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1심에서 원청에 책임을 묻지 않았다.

 

 

잠깐! 7초만 투자해주세요.

경남도민일보가 뉴스레터 '보이소'를 발행합니다. 매일 아침 7시 30분 찾아뵙습니다.
이름과 이메일만 입력해주세요. 중요한 뉴스를 엄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