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구상작가 되고 싶었지만
김인하 선생 만나 추상에 매료
60세 이후 대작 중심 활동 계획
지금은 물감 활용한 작품 위주
학생 시절엔 다양한 재료 접목
옛 작업방식 넘나들며 실험도

3주 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상상갤러리에서 '여행스케치-마음을 담다'란 제목의 김재호 개인전을 보았다. 풍경화였다. 드문드문 진달래꽃이 핀 바위산, 물 맑은 개천과 녹색 싱그러운 들판, 그리고 바위를 덮어 흐르는 물의 하얀 포말이 시원한 여름 계곡. 작가를 몰랐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자연의 빛을 잘 묘사하는 것을 보면 전문적인 구상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추상작가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그의 추상 작품이 궁금했다. 어쩌면 이전에 보았던 작품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하며 그를 만났다.

▲ 김재호 작가가 24일 창원 작업실에서 작품 '心-167'을 설명하고 있다. /김은주 인턴기자 kej@idomin.com
▲ 김재호 작가가 24일 창원 작업실에서 작품 '心-167'을 설명하고 있다. /김은주 인턴기자 kej@idomin.com

◇추상작가가 되기까지 = 원래 김재호 작가는 구상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구상은 대구 계명대가 강하니 그쪽으로 가고자 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창원대로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창원대 교수들은 대부분 추상계열이었다. 홍익대 나온 교수가 많았기 때문이란다. 처음 배울 때에는 구상과 추상을 함께 배웠다.

당시만 하더라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림을 그만두라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 미술한다고 집에서 돈을 받아 재료를 살 형편도 되지 못했다.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연탄을 깨어 검정(블랙)을 만들고 흙을 모아 섞어서 갈색을 만들고 포도를 찧어 또 색을 만들었다. 공사장에 버려진 나무로 액자를 만들어 작업했다.

"당시 다른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고급 재료를 쓰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그런 재료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골판지에, 상자에, 다른 사람이 쓰다 남은 화선지를 15번 배접해서 그림을 그렸지요."

그림밖에 몰랐던 시절이다. 그때 추상작업을 하는 김인하 선생을 만났다. 김 선생의 드로잉이 너무 재미 있어 추상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고. 자신의 네 번째 전시가 성산아트홀 개관기념전이었는데, 이때 김인하 선생이 한마디 하시더란다. "너,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어!"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6개월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고 생각만 했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욕심이었다. 화면에 가득 채우려 했던 게 오히려 감상자를 갑갑하게 했던 것이다. 그림에서 비울 줄 알고 핵심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말이다. 작업을 하면서 화면 밖으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단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또 6개월 후에 김인하 선생은 두 번째 화두를 던져주었다. "새마을과 무궁화의 차이점을 아느냐?" 성급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새마을호를 타든 무궁화호를 타든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림을 신중하게 그리게 되었고 그 깨달음으로 속도에도 눈을 떴다. 그래서인지 김 작가의 추상에는 다양한 속도의 붓길이 보인다.

▲ 김재호 작 '心-삶1'.  /김재호 작가
▲ 김재호 작 '心-삶1'. /김재호 작가

◇1000호짜리 대작을 하고 싶어 = 대학 다닐 때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면서 작업했고 특히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했다. 졸업 후에는 반구상 기법으로 작업했는데 이후에는 물감을 활용한 추상작업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김 작가의 작품 중에 현악기의 현과 음악 기호가 들어간 것이 있다. 때로는 피아노 건반도 나온다. 딸이 중3 때였다. 선물을 하고자 정원을 그렸다. 상당한 공력을 쏟은 작품이다. 바탕에 색을 입히고 일정 기간이 지나 그 위에 또 덧칠하고 해서 입체감을 느끼게 했다. 울타리는 피아노 건반으로 묘사하고 식물 잎사귀는 음표로 나타냈다. 붙이고 지우고 하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했다. 오방색을 활용한 작품이다. 나중에 보니 이런 작품이 사람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김 작가의 작품 흐름을 보면, 한 방향으로 쭉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작품이 나오다가 다시 예전에 작업하던 형태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왜 그럴까?

"예전에 작업했던 방식에 아쉬움이 남아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또 실험작을 했는데 한참 후에 적절한 재료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활용해 또 예전처럼, 하지만 예전과 똑같지는 않은 작업을 하게 되죠. 욕심인가요? 그래요. 그림에 대한 욕심은 많은 편이에요."

구상도 그렇고 추상도 그렇고 대부분 작품은 공통적으로 '마음(心)'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마음이 왜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죠. 드로잉을 하더라도 내 마음에서, 자연을 담더라도 내 마음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가볍게 물었다가 무거운 답을 얻었다.

내년에는 자연을 좀 더 많이 보고 거기에서 빛을 얻어 50호, 100호짜리 자유로운 추상을 해서 12월 개인전을 열 계획이란다. 60세 이후에는 1000호, 700호, 600호짜리 대형작업을 위주로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래서 고향에 천장이 높은 집을 구하는 것이 꿈이다.

▲ 김재호 작 '존재+의식'. /김재호 작가
▲ 김재호 작 '존재+의식'. /김재호 작가

◇작가와 함께 작품 속 추상 세계로 = "눈앞에 벌거벗은 인물화(누드)와 옷을 입은 인물화(코스튬)가 있다 치자. 사람들은 어디로 향할까요? 대부분은 누드로 향해요. 그건 구상의 세계입니다. 빨리 질리죠. 하지만 코스튬은 그렇지 않아요. 볼 때마다 다르고 그 속에서 수많은 상상이 가능하죠. 그게 추상입니다." 김 작가는 추상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의 학생 시절 첫 작품 '존재+의식' 앞에 나란히 섰다. 대학 3학년 때 선생님께 드렸는데 25년 만에 돌아왔다고 한다. 폐선의 나무를 활용한 작품이다. 작품에는 다양한 오브제가 사용됐다. 나뭇조각에 삼베도 있고 철근도 있고 스테인리스, 흙, 퍼티(소위 '빠데'라 불리는 재료)도 발려있다.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한 거라 만드는 데 돈은 거의 들지 않았다고.

다음 작품은 빨래판으로 형상화한 '心-삶1'과 '心-삶2'다. 역시 길에서 주운 재료로 만든 작품이다. 나무와 금속, 여성과 남성, 그리고 여성의 노동과 남성의 노동 등 세상 음양의 세계를 추상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김재호 개인전에서 많이 보았음직한 작품 '心-167'. 풍경이 있고 탁자 위에 컵이 얹혀 있다. 그런데 음악적 리듬과 음률이 느껴진다. 풍경의 물고기가 사슬을 끊고 하얀색의 컵으로 향하는 것은 속박을 끊은 자유를 표현한 것이리라. 김 작가는 추상의 감상은 온전히 감상자의 몫이라고 했다. "외국의 어떤 분은 전날 왔다가 보던 작품을 또 보고 오전에 본 것을 또 오후에 보더라고요. 그런 가운데 작가의 의도를 읽게 되고 자신이 본 것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서 결국 깨닫게 되죠."

그림 속으로 들어가 신나게 노는 것만이 추상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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