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다수가 만들어낸 역사적 비극
2024년 대한민국에서 되풀이하지 않아야

1906년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의 한 유대인 가정에 여아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한나 아렌트. 대학을 거쳐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던 그는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짧은 기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뒤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프랑스마저 독일에 점령되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 대학에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으로 학계 주목을 받았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붙잡혔다. 아이히만이 이스라엘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게 되자 아렌트는 시사 주간지 <뉴요커>의 특별 기자 자격으로 이스라엘로 날아가서 재판을 직접 지켜봤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냈는데, 법정에서 지켜본 아이히만은 그가 저지른 엄청난 악행에 비해 너무나도 평범한, 상부 명령에 따라 주어진 직무에 충실했던 중년 남성일 뿐이어서 소름이 돋았다고 기술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광기에 사로잡힌 괴물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나도 평범한 인물이어서 놀랐던 것이다.

아렌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106세 여성이 2017년 1월 27일 숨을 거뒀다. 브룬힐데 폼젤이라는 이름의 독일인이었다. 그는 베를린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국영방송국의 속기사를 거쳐 나치의 2인자였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비서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주요 사안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지만 2차 대전 막바지 궁지에 몰린 히틀러와 괴벨스가 지하 요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바로 옆 벙커에 있었을 정도로 그의 나치 부역 혐의는 크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려고 노력했을 뿐 잘못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그저 직장인으로서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이 필요했고 그것을 지키고자 언제, 어느 자리에서건, 지시에 따라 성실하게 일했을 뿐이며, 나치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무관심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회고했다.

지은이가 불분명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제목의 독일 시가 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2024년 대한민국에 사는 나는 아이히만, 폼젤, 나치가 이웃을 덮쳤을 때 침묵했던 '나'가 아닐까 자문한다.

/조재영 편집국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