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출신 서정우 씨 인생 담은 소설책 기증
서 씨의 증언 확인하는 일이 숙제로 남아
일본 헌법 정신 되찾으려 평화 외쳐

평화운동가 기무라 히데토(80) 씨가 지난 15일 의령박물관에 소설책을 전달하고 있다. /의령군
평화운동가 기무라 히데토(80) 씨가 지난 15일 의령박물관에 소설책을 전달하고 있다. /의령군

새하얀 머리칼의 노신사가 지난 15일 의령 의병박물관을 찾아왔다. 그는 일본에서 소설책 40권을 들고서 바다를 건넜다.

소설은 일본 나가사키시 세이보 학원 연극부 학생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가 원폭 피해를 당한 유영수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작된다.

유 씨는 하시마섬에서 쉬지 않고 일했다. 처음에는 탄광에서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일했고, 나중에는 조선소에 들어가 철판과 씨름했다. 거센 바다에 둘러싸여 탈출은 꿈도 못 꿨다. 고된 노동과 함께 현미가 조금 들어간 콩깻묵을 삼키면서 버텼다. 어느 날 원자폭탄이 떨어져 세상은 불구덩이가 됐다. 유 씨는 겨우 살아남았지만 평생 피폭 후유증에 시달렸다.

오우라 후미코 씨가 쓴 소설 <누구도 빼앗지 마라>는 한국인 최초로 원폭 피해 증언을 한 서정우(1928~2001) 씨를 따서 만든 가상 인물 유 씨의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노신사가 이 책을 의병박물관에 기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평화운동가 기무라 히데토(80) 씨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틀 만에 답장이 왔다.

오우라 후미코 씨가 쓴 소설 '누구도 빼앗지 마라'는 지난 10월 국내에도 출간됐다. /책숲
오우라 후미코 씨가 쓴 소설 '누구도 빼앗지 마라'는 지난 10월 국내에도 출간됐다. /책숲

◇피폭 피해자 서정우를 위해 = 기무라 씨는 일본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서 일하면서 일본 과거사 문제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실상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서 씨의 고향 의령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 싶었어요. 하늘나라에 있는 서 씨가 기뻐할 것 같았어요. 서 씨는 의령에서 약 300명 정도가 군함도에 갔고 일부는 원폭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어요. 조선인 강제 동원과 원폭 피해 문제가 의령에서도 화제가 된다면 피해자를 찾기가 쉽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기무라 씨는 이번에 한국 방문 일정 중 사진작가 이재갑 씨의 원폭 생존자 사진전을 열어보자고 의병박물관에 제안했다. 일본에서 여행단을 꾸려 의령을 찾고, 한국인과 일본인이 대화를 나누는 좋은 기획을 만들어보고 싶어서다.

기무라 씨는 2019년 8월 의령에 있는 서정우 씨의 생가에 가보고, 합천 원폭 자료관과 위령각도 둘러봤다. 그는 합천을 ‘제2의 고향’이라 부른다. 합천 원폭 피해자 ‘평화의 집’이 생겼을 때는 두 달 동안 머물렀다.

서정우 씨의 증언을 확인하는 일이 숙제로 남아있다. 서 씨는 “미쓰비시 조선소 사이와이료 기숙사에 살던 사람들이 피폭사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기무라 씨는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헌법 정신을 찾아 = 그는 40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었다. 한국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한일 과거사 문제로 관심이 옮겨갔다. 기무라 씨는 퇴직하고 나서 일본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서 일하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은 1995년 시민의 힘으로 세워졌다. 한국과 중국의 원폭 희생자 기록을 전시하면서 일본 젊은이에게 일제 강제 노역 문제를 알리기 위해서다. “일본 헌법은 전쟁과 무력행사를 금지하고 있지요.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졌어요. 나는 전후 민주주의 사회에서 성장했어요. 지금은 일본 헌법 정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내 청춘을 잃어가는 것 같았어요.”

기무라 씨는 “한일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면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 싶었다”며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도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첩첩산중이다. 한일 관계는 북한을 적대시하는 안보 중심으로 편성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겼으나 국가 차원에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일본 방사능 오염수 배출 문제까지 더하면 한일 관계는 위태롭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에 강경한 입장을 밝혔을 때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맞는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민중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는 지도자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김다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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