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서핑 준비하던 열흘 새
바빴던 여름 가고 가을 성큼

책 사는 손님 줄어드는 때
집 돌보고 고양이와 함께해
"아름다움 담는 한철 아닐까"

똑똑. 이른 아침 들려오는 인기척에는 보통 자동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지기 마련인데, 오늘만큼은 예외다. 해외직구로 구매한 겨울용 서핑 슈트가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내 집만큼 자주 드나들던 서핑 샵도 10월 9일을 마지막으로 시즌 오프를 했다. 그래도 겨울 파도를 놓칠 수는 없기에 큰맘 먹고 개인 슈트를 장만했다. 입을 때는 더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까진 알지 못했다.

열흘 넘게 기다려 받아본 슈트는 봄여름에 입던 것보다 두 배 가까이 두툼했다. 등이 아닌 가슴에 지퍼가 있는 방식이라 입기도 더 까다로웠다. 속옷만 걸친 채 목을 넣는 곳으로 다리부터 엉덩이까지, 그야말로 온몸을 욱여넣으면서 30분 가까이 홀로 분투했다. 두꺼워서 손끝에 잘 잡히지도 않는데 행여 손톱자국이라도 날까 팍팍 잡아당기지도 못해서 비닐장갑을 끼고 조심조심 입는 사이,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결국 창고행을 기다리고 있던 선풍기를 다시 꺼내와 틀어놓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지퍼를 잠글 수 있었다. 이거 몇 번이나 입으려나. 나 잘 산 거 맞겠지……? 역시 여름이 좋았어…….

반소매를 입을 때 주문했던 슈트가 긴팔을 입게 되었을 때 왔으니, 열흘 동안 계절은 시나브로 가을이 되었다. 올해 여름은 책방을 운영한 6년 중 가장 바빴던 시즌이었다. 매월 큰 산과 자잘한 언덕들을 넘으며 눈앞에 닥친 일을 쳐내기에 분주했다. 뜨거웠던 여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 버린 건 아쉽지만, 도통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을의 방문은 사뭇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 주말은 날씨가 너무 좋아 다들 나들이를 간 것인지, 책방이 유독 조용했다. 하루 3시간의 짧은 영업시간 중에도 간간이 손님은 있었는데, 희한하게 책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덕분에 밀린 일들에 집중하며 보냈지만 오랜만에 ‘빵원데이’를 기록한 날에는 씁쓸한 마음으로 퇴근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위로하고자 혼술을 할까, 하다가, 지갑을 열기도 전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정신 차려, 박수진. 오늘 매출 0원이잖아.’

남해에 오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계절로 가을을 꼽고는 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책방 운영자가 되고 난 후에는 무작정 반갑기만 할 수 없는 계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책방을 하는 나에게 가을, 더 나아가서 겨울은 여러모로 어려운 계절이다. 성큼 내려간 기온만큼 손님도 뚝 떨어지고, 가끔 오는 손님이 머무는 시간보다 난로 혼자 켜져 있는 시간이 더 긴 계절. 고양이들이 먹는 사료 양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고, 추위를 피하려 애쓰는 길 위의 동물들 걱정도 차곡차곡 쌓이는 계절. 가을이 온다는 뜻은 바야흐로 비수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책방을 시작한 이후로 한시도 두툼해 본 적 없는 나의 얇은 지갑이 더욱 가냘파진다는 뜻이다. 그래도 남은 가을과 겨울 동안 축 처진 마음으로만 지낼 수는 없으니, 골몰하여 비수기를 긍정해 보기로 했다.

우선 비수기가 되면 일상을 정돈할 시간이 생긴다. 나의 비수기 휴일의 일상은 대체로 이렇게 흘러간다. 늦은 아침, 모닝콜 대신 전날 저녁에 예약해 놓은 세탁기(혹은 전기밥솥)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다.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백색소음을 자장가 삼아 느지막이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다 일어난다. 건조까지 마쳐 포근하게 잘 마른 수건은 나만의 작은 규칙대로 하나하나 가지런히 갠다. 다음에는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며 커피 내릴 물을 끓인다. 조그만 주방 창으로 더 조금 보이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커피를 내리기도 전에 향긋해진다. 밥을 다 먹고 바로 설거지를 한 뒤 쌓인 그릇 없이 깨끗한 싱크대를 보며 괜스레 흐뭇해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휴일에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안방 커튼은 도톰한 겨울 커튼으로 바꿨다. 대대적인 옷장 정리를 하고 침대에 전기 매트를 까는 김에 시트와 베갯잇도 싹 갈아치웠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고작 이게 뭐라고,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몹시 뿌듯했다.

혼자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집의 상태나 어질러진 정도가 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는 것을. 집안일은 대충 빨리 해치워버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 하나를 챙기며 돌보듯 (시골 주택이라면 더더욱)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에 햇볕도 세지 않고 바람도 선선한 가을은 집을 돌보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찬 바람 부는 계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고양이와 밀착 스킨십이다. (만세!) 우리 집은 치즈 고양이만 세 마리가 있다. 바람이, 노을이, 별이. 여느 고양이들처럼 불필요한 신체접촉은 잘 하지 않고, 자기들이 내킬 때나 날이 찬 날에만 내 곁으로 온다. 나의 침대는 퀸사이즈인데, 아이들 쿠션 세 개가 항상 함께 세팅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슈퍼싱글 크기 정도의 공간만 사용한다. 고양이들이 달라붙으면 옴짝달싹할 수 없으니, 그마저도 사치다.

각자의 고양이들은 선호하는 위치가 정해져 있다. 바람이는 내 배 위로 올라와 6.7kg의 무게만큼 따끈함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노을이는 내 오른쪽 손에 머리를 비벼 존재를 알린 뒤 허벅지 옆쪽에 자리를 잡는다. 오른손을 내리면 자기 궁둥이에 바로 닿는 위치라, 궁디팡팡을 좋아하는 노을이에게 딱 맞다. 막내 별이는 늘 내 오른쪽 얼굴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잔다. 가끔은 다리가 묵직해 눈을 떠보면 가랑이 사이에서 천연덕스럽게 나를 쳐다보기도 한다. 별이도 궁디팡팡을 좋아하기 때문에, 노을이와 별이가 함께 붙어 있으면 손이 쉴 새가 없다. 쿵짝 쿵쿵짝. 드럼 연습하듯이 박자에 맞춰 두 엉덩이를 번갈아 토닥인다.

서로의 살을 마주한 채로 이불을 덮으면 금세 온기가 모이고, 보드라운 치즈색 털을 쓰다듬다 보면 이내 ‘골-골-골-’하는 고양이들의 기분 좋은 합창까지 더해진다. 나 드디어 천국에 온 건가. 고양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수시로 행복해진다. 목도리에 얼굴을 묻듯 고양이 품에 코를 박고 있으면 바깥의 추위도, 책을 팔아 먹고살 걱정도 얼마쯤은 사라진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건 고양이의 뱃살처럼 좀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뿐.

전기 매트 위에서 잘 녹은 치즈처럼 몰랑몰랑해져 졸고 있는 고양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집사의 큰 기쁨이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다. 뭉그적거리다 늦게 일어났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있더라도 고양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아주 논리적이고 그럴듯한 명분까지 있으니 괜찮다. 보드라운 털 뭉치에 둘러싸여 보내는 늦은 아침이야말로 신이 가난한 책방지기에게 내리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요즘은 월동 준비 겸 몸을 가볍게 하려고 친구들과 함께 러닝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모여 운동장을 달리는데, 확실한 동기부여도 되고 서로의 코치가 되어줄 수 있어서 혼자 달릴 때보다 수월하다. 오늘은 제철 가리비와 왕새우를 찌고 구워서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고, 가볍게 뛴 뒤에 공 차기 연습까지 친구들과 같이했다. 함께여서 더 맛있고 즐거웠던, 돈도 적게 벌면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하루였다.

해가 지면 공기가 서늘해지는 걸 보니 다음 주면 난로를 꺼내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을은 금세 가고, 겨울도 곧 찾아오겠지. 올해도 책방의 난로는 손님들을 데워주는 시간보다 더 오래, 혼자서 뜨거울 테다. 그래도 손님을 기다리는 것까지가 책방지기의 일이니까 늘 넉넉하게 난로의 기름을 채워두려 한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오랜만에 박준 시인의 <계절 산문>을 펼쳐 들었다. 책방의 벽 한편에 붙은 원고지 칠판에 가을 한 구절을 적어 내려간다.

“분명한 것은 짧은 기간의 교류든 평생에 걸친 반려든 우주의 시간을 생각하면 모두 한 철이라는 것이고, 다행인 것은 이 한 철 동안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잘도 담아둔다는 것입니다. 기억이든 기록이든. 이제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습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가을날이 또 이렇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비수기는 나와 일상을 돌보고 정돈하며,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담아두기 위해 꼭 필요한 한철의 계절이 아닐까. 어느덧 남해에서 맞는 일곱 번째 가을이 가고 있다.

/박수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