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 딸과 대화하려 수어 배워
농인들 병원 예약, 가족 회의 통역도
수어에 대한 사회적 이해 부족에 '씁쓸'
"농인에게는 수어가 제1 언어임을 기억해야"

언어는 단순히 단어만 나열하는 소통 수단이 아니다.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각이나 문화, 역사성도 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언어가 정해져 있던 이들과 달리 오랫동안 자기 고유의 언어를 인정받고자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이들이 있다. 바로 청각장애가 있는 농인들이다. 농아인협회에서는 농인의 반대말로 청인(청각을 사용하는 사람)을 쓰지만 기사에선 비장애인으로 표현했다.

농인들은 보이는 언어인 ‘수어’로 소통한다. 농인들에게 수어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와 같은 독립된 언어다. 하지만 수어가 한국에서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얻은 것은 불과 7년 전이다. 2016년 2월 3일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수어를 쓰는 농인들은 자신의 언어권 및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 받게 됐다. 이날을 기념하고 수어 인식을 개선하고자 2월 3일을 ‘한국수어의 날’로 제정했다.

올해로 세 번째 한국수어의 날을 맞았지만, 비장애인과 농인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은 여전히 두껍다. 그 벽을 허물고자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이를 만났다. 창원시진해수어통역센터에서 일하는 10년 차 수어통역사 정희선(48) 팀장이다.

정 팀장은 수어통역사가 되기 전부터 장애아동 언어치료사로 일하는 등 장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청각 장애인 딸을 뒀기에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딸이 청각 장애가 있다 보니 농인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또 아이와 소통하려고 수어를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어통역사의 길을 걷게 됐다. 장애 아이를 키워서 남들보다 장애에 대한 이해 폭이 넓었지만 여전히 당사자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더라”고 말했다.

정 팀장은 진해에 거주하는 농인들에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주로 농인들이 사전에 의뢰하지만 급할 때는 사무실로 찾아와 통역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그를 찾는 영상전화가 몇 통씩 걸려 왔다.

그는 “도시가스 검침 일정 잡는 일부터 세금·보험료 문제, 병원 예약, 자녀 학교 진학 문제, 심지어는 중요한 가족회의에 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겪는 일이지만, 농인은 통역사를 거치지 않으면 해결이 쉽지 않은 일이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현장에 나가 통역을 하는 정 팀장은 여전히 수어와 농인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농인과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통역사인 나더러 잠시 나가 있으라고 하더라. 통역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니 글로 써서 보여주면 되지 않느냐며 결국 나를 내보냈다. 수어가 제1 언어인 농인에게는 한국어라 해도 영어와 같은 외국어처럼 느껴진다. 대략 이해는 해도 수어로 할 때만큼 편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수어는 완성된 문장 형태라기보다는 단어를 나열하고 표정으로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다. 한국어 문법 체계와는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자꾸 글로 소통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비장애인 중심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정희선 창원시진해수어통역센터 팀장이 영상전화로 농인과 대화하고 있다. /박신 기자
정희선 창원시진해수어통역센터 팀장이 영상전화로 농인과 대화하고 있다. /박신 기자

수어통역사 일은 비장애인의 말을 단순히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농인 사회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 삶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정 팀장이 농인들의 말동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는 “반지하 단칸방에 살던 기초수급자 농인이 있었다. 그 사정을 알고 나서는 직접 LH 임대아파트를 알아보고 신청까지 도왔다. 몇 번의 도전 만에 당첨됐는데 내 일처럼 기쁘더라. 수어통역사로 일하다 보면 농인의 깊숙한 사정을 알 수밖에 없다. 그런 것들을 보고도 모른 체 지나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 팀장은 하루에 수십 통씩 농인들에게 걸려 오는 영상전화를 받는다. 교통사고 등 긴급상황이 생기면 새벽에도 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비장애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수적인 까닭에 수요는 넘쳐나지만 수어통역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해 진해수어통역센터에서 처리한 통역 건수는 2814건이다. 수어통역사 4명이 모두 담당했다. 중간중간 걸려 오는 영상전화는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인력 충원은 2013년 10월 이후로 되지 않고 있다.

그는 “수어통역이 필요한 행사에 가거나 하루 종일 통역이 있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다른 통역 의뢰가 들어와도 갈 수 없다. 비장애인이 볼 때 급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농인들에게는 시급한 문제일 때가 많다. 하루 이틀 대기하는 것도 힘들 것”이라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농인들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지만 실제로는 외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 보니 늘 고단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비장애인들이 농인에게 수어가 어떤 의미인지만이라도 이해한다면 농인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박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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