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돕고 돌보는 ‘거창 공유냉장고’
주민주도 나눔·돌봄 촘촘한 복지 울타리

"받는 기쁨보다 나누는 즐거움이 더 큽니다. 이게 다 사람 사는 정이지요."

거창군 12개 읍면 행정복지센터 현관문을 열면 덩치가 큰 냉장고가 방문객을 맞는다. 냉장고는 먹을거리로 가득 차 있다. 냉장고 주변에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물건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얼핏 작은 동네슈퍼를 옮겨 놓은 듯한 이곳은 거창군이 2021년부터 자발적 나눔과 돌봄 체계를 구축하고자 만든 '공유냉장고' 코너다.

공유냉장고는 마을 사람 누구나 물품을 채워 넣을 수 있고 가져갈 수 있다. 처음에는 음식이나 음식 재료로 시작했지만 점차 진화해 지금은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까지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공유냉장고를 이용하는 이들은 누구나 하루 정해진 수량만큼 물품을 가져갈 수 있다. 단, 필요한 만큼만 가져갈 수 있고 누가 가져가는지 장부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 사용 기한이 임박했거나 술, 약품류, 건강에 해를 끼치는 물품은 냉장고에 들이지 않는다.

공유냉장고 물품은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 기부한 것이다. 텃밭에서 기른 채소며 과일, 쌀, 계란을 비롯해 마을 청년회와 새마을회 등에서 기부한 라면, 김, 식용유, 떡국점 등 식료품이 채워져 있다. 이 밖에도 새마을부녀회에서 만든 반찬과 빵, 과자, 블루베리잼, 딸기잼, 사과즙 등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가끔은 생활에 필요한 휴지나 치약 등 생필품도 들어온다.

공유냉장고는 주민들이 직접 운영한다. 지역사회보장협의체를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그 지역 특성을 살린 나눔 문화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

지역공동체를 잇는 연결고리가 된 공유냉장고. 남하면 '행복이 남하도는 공유냉장고'에 물품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거창군
지역공동체를 잇는 연결고리가 된 공유냉장고. 남하면 '행복이 남하도는 공유냉장고'에 물품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거창군

◇모두가 수혜자 = 거창군 남하면 천동마을에 사는 박학수(80)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한 홀몸 노인이다. 마을 이장을 통해 공유냉장고 물품을 여러 번 전달받았다. 할아버지는 이웃들에게 받은 호의를 되갚고자 지난해 여름 손수 만든 지팡이 50개를 남하면에 전달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로 이웃들에게 받은 정을 다시 나눈 것이다.

할아버지가 만든 지팡이는 반응이 대단했다. 공유냉장고에 진열한 지 이틀 만에 동이 났다. 임양희 남하면장은 "단단한 재질에 정교한 솜씨로 만든 나무 지팡이가 고령화된 농촌사회 이웃들에게는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며 "할아버지는 공유냉장고 수혜자인 동시에 나눔 주체로 공유냉장고 선한 영향력을 보여준 분"이라고 말했다.

거창 오감딸기 작목반에서도 정기적으로 남하면을 찾는다. 작목반은 딸기를 출하하고 난 뒤 일정량 딸기를 항상 공유냉장고에 전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딸기를 출하한 이후 지금까지 기부한 딸기만 해도 50상자가 넘는다. 남하면 안흥마을에 사는 박말용(74) 씨도 한 달에 두세 번 남하면행정복지센터를 찾는다. 오리농장을 경영하는 박 씨는 남하면행정복지센터에 들어올 때는 두 손 가득 오리 알을 가져온다.

공유냉장고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라며 현금을 건네는 이들도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주민은 매달 20만 원씩 남하면에 공유냉장고 후원금을 내놓고 있다. 남하면이 고향인 출향인들도 공유냉장고 소식을 듣고 10만 원에서 500만 원까지 후원금을 전달했다. 이 밖에도 남하면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한 달에 두 번씩 직접 만든 반찬을 공유냉장고에 전달하고 있으며, 남하면 주민자치위원들은 손수 뜬 손수세미 100장을 기부하기도 했다.

남하면에서 공유냉장고를 담당하는 서현욱 복지담당은 "가져가는 사람보다 가져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유냉장고 사업을 시작한 이후 단 한 차례도 냉장고가 비어 있던 적이 없다. 공유냉장고로 선한 영향력이 확산해 지역사회 공동체가 따뜻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남하면 공유냉장고 공식 명칭은 이웃 간 넘치는 정을 비유해 '행복이 남하도는 공유냉장고'로 부르고 있다.

거창군 남하면 천동마을에 사는 박학수(80) 할아버지가 지난해 여름 공유냉장고를 통해 받은 이웃들의 호의를 되갚고자 손수 만든 지팡이를 기부했다. 할아버지가 기부한 지팡이. /거창군<br>
거창군 남하면 천동마을에 사는 박학수(80) 할아버지가 지난해 여름 공유냉장고를 통해 받은 이웃들의 호의를 되갚고자 손수 만든 지팡이를 기부했다. 할아버지가 기부한 지팡이. /거창군

 

◇지역 공동체 잇는 공유냉장고 = 거창군은 초고령사회를 준비하고자 2019년 거창형 지역사회 통합 돌봄 모델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공유냉장고도 이 무렵 논의가 시작돼 지역복지사업과 나눔이 결합된 자발적 운동으로 추진됐다. 특히 농촌지역 초고령화와 홀몸 가구 증가, 코로나19 확산 등 사회적 문제가 대두함에 따라 지역 복지 차원 돌봄체계와 결합한 공유냉장고가 등장했다.

공유냉장고 사업은 2021년 4월 남상면행정복지센터에서 거창군 1호 '행복나눔 공유냉장고'가 문을 연 데 이어 1년 만에 거창군 전역으로 확산했다. 현재까지 12개 읍면 행정복지센터를 비롯해 마을 속 공유냉장고 10곳이 문을 열어 총 22곳이 운영 중이다.

공유냉장고 출발에는 거창군 복지담당 공무원들의 숨은 땀이 배어 있다. 여러 차례 모여 운영 방안을 논의한 결과 △자발적 나눔 △주민 주도 운영 △먹을거리 기본권 보장 △공동체 복원 △복지사각지대 해소 등 원칙을 담은 공유냉장고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특히 운영 사례를 공유하고 활성화 방안을 논의해 거창군 전역으로 공유냉장고 사업을 확산시킨 마중물 역할을 했다.

공유냉장고는 지역 공동체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다. 단순한 나눔운동이 아니라 나눔과 돌봄이 이어지는 체계를 구축, 마을 구성원끼리 서로 돕고 돌보는 사업으로 진화했다. 이에 따라 마을 이장은 지역사회보장협의체와 협력해 공유냉장고 물품을 마을로 전달하고 노인맞춤돌봄사업을 수행하는 생활지도사들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대신해 공유냉장고 물품을 정기적으로 배달하고 있다. 또한 수혜자들은 자신의 텃밭이나 농장, 자영업장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조금씩 나눠 수혜자와 공급자가 따로 없는 공유경제 체계를 마련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부에서 시작되는 나눔은 마을 주민과 출향인, 지역 기업까지 하나로 묶어내 인구 이탈로 황폐해진 농촌사회를 끈끈한 공동체로 묶고 있다.

천주영 거창군 복지정책과 주무관은 "공유냉장고로 말미암아 이웃 간 사람 사는 정을 느끼고 있다"며 "수혜자와 공급자가 따로 없는 공유냉장고는 이웃과 이웃을 잇는 지역 공동체 연결고리 그 자체"라고 말했다.

공유냉장고에 기부된 쌀과 라면. /거창군
공유냉장고에 기부된 쌀과 라면. /거창군

 

◇주민이 주인 = 공유냉장고가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운영 주체가 주민이라는 점이다. 거창군은 공유냉장고 사업을 진행하며 지역마다 주민 역량과 자원이 다른 점을 고려해 운영 형태를 따로 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각 지역 실정에 맞게 운영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 주민 주도형 공유냉장고를 만들어 냈다.

주민이 주도하는 공유냉장고가 지역에 자리 잡으며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지역복지사업도 늘고 있다.

주상면은 행정복지센터 앞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와 기부받은 농산물을 노인 일자리 참여자들이 손질해 개별 포장, 거동이 불편한 노인 가구 등에 전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가조면은 고령층 영양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자 공유냉장고를 적극적으로 활용, 노인층에게 부족하기 쉬운 영양식과 음식재료를 제때 공급해 안전한 복지망을 구축했다. 이 밖에도 거창읍에서는 지역 특성에 맞게 어려운 이웃 위주로 제한적 이용 원칙을 정해 운영함과 동시에 마을별 공유냉장고를 만들어 촘촘한 복지망을 구축하고 있다.

군은 앞으로도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이 확산할 수 있도록 마을 속 공유냉장고를 활성화하고 읍·면별 공유냉장고끼리 필요한 물품을 공유할 수 있도록 교류체계도 마련할 계획이다.

/김태섭 기자 kimtsq@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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