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깊은 이야기 (2) 둔덕기성

1170년부터 3년 동안 유배 생활
성곽 다시 쌓고 집수지 등 구축
김보당 거병 속 왕위 탈환 노려
실패 귀결 등뼈 껶여 죽임당해

1170년은 고려 18대 왕 의종(재위 기간 1146~1170)에게 치욕을 안겨준 한 해였다. 재위 24년째를 맞던 그해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의종은 왕위를 상실했다.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를 중심으로 천대받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의종 곁에 있던 문신들은 잔혹하게 학살됐다. 심지어 의종이 보는 앞에서도 학살이 자행됐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겁에 질린 의종은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반란이 일어나고 한 달 뒤 거제현(巨濟縣)으로 추방됐다. 태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쫓겨났다. 태손은 무신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거제 둔덕기성. 고려 의종이 유배 생활을 한 곳이다. 의종은 이곳에서 3년간 지냈다. /최석환 기자

◇무능했던 왕에게 찾아온 어두운 그림자 = 1127년 인종의 장남으로 태어난 의종은 무능한 왕이었다. 그는 20세에 왕위를 계승하고 나서 재위 기간 24년 동안 방탕한 정치를 일삼았다. 경치 좋은 곳에 호화로운 정자를 짓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었다. 온종일 술을 마시며 유흥을 즐겼다. 풍광 좋은 곳에 다다를 때면 매번 행차를 멈추고 총애하던 문신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글을 읊었다.

술독에 빠져 있는 날이 많았다. 배를 띄워놓고 새벽까지 유흥에 심취했다. 시간이 늦어도 집에 돌아갈 줄 몰랐다. 그 때문에 왕의 수레를 호위하던 장군과 군사들의 불만이 컸다. 무신들은 잦은 술자리에 피로를 호소하며 불평했다.

어김없이 연회가 이어지던 1170년 4월 어느 날 밤, 의종에 앙심을 품은 무신들이 계략을 꾸몄다. 이의방과 이고가 중심이 됐다. 그들은 소변을 보러 나간 황해도 해주 출신인 대장군 정중부를 뒤따라가 은밀한 어조로 이리 말했다.

“오늘날 문신들은 득의양양하여 취하도록 마시며 배부르도록 먹고 있는데 무신들은 모두 굶주리고 피곤하니, 이 어찌 참을 수 있소.” 마침 의종 밑에서 호의호식하던 문신 김돈중에게 수염을 밀린 경험이 있어 감정이 좋지 않던 정중부는 그들과 합심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거제 둔덕기성. /최석환 기자

◇노여움이 만들어낸 악몽 같은 사건 = 세 사람의 결심 이후로도 의종은 날마다 잔치를 벌였다. 술을 마실 때면 임금과 신하 모두 몹시 취할 만큼 들이켤 때가 많았다. 이를 보다 못한 김돈중이 오죽하면 “호종하는 군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모두 굶주림과 피곤함에 있는데, 왕께서는 어찌 심하게 즐기기만 하십니까”라며 “또 밤도 어두운데 무엇을 관람할 것이 있어 여기에 오래 머무르고 계십니까”라는 말을 의종에게 꺼낼 정도였다. 밤중까지 돌아갈 줄 모르니 한 말이었다.

의종을 향한 무신들의 노여움이 갈수록 커지던 그해 8월 끝내 정중부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이의방과 이고에게 "이제는 우리가 거사할 만하다"라며 "그러나 왕이 만약 바로 환궁한다면 아직 참고 기다릴 것이요, 만약에 또 보현원으로 옮겨 간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귀띔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들은 날이 어두워질 무렵 이고와 이의방이 왕의 유지라고 속여 순검군(군대)을 모았다. 이후 왕이 문에 들어가고 여러 신하가 물러나려 하자, 이고 등이 직접 문신들을 숨지게 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걸 파악한 김돈중은 말을 타고 길을 가던 중 취한 척하며 떨어진 뒤 그대로 도망쳤다. 또 다른 문신 한뇌는 친한 환관에 의탁해 몰래 왕의 침상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에 정중부는 “화의 근원인 한뇌가 아직도 주상 곁에 있으니, 내보내어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의종에게 말했는데, 한뇌가 왕의 옷을 잡고 나오지 않았다. 이고가 칼을 들어 위협하자 그제야 밖으로 나온 한뇌는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무신들은 뒤이어 의종을 따르던 문신과 환관 등의 목숨을 차례로 빼앗았다.

둔덕기성 집수지. /최석환 기자

◇유배 생활 시작...거처가 된 둔덕기성 = 자포자기한 의종은 고려시대 관청인 수문전(修文殿)에 앉아 술을 마셨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악사에게 음악 연주를 지시하고,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비로소 잠이 들었다. 무신 이고와 채원은 왕을 시해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무신인 양숙이 이를 말려 성사되지 않았다.

의종은 그해 9월 거제현으로 추방됐다. 왕의 후궁인 무비는 도읍인 개경의 중요한 관문이던 청교역으로 도망쳤다가 운 좋게 목숨을 건져 왕을 따라갔다. 11월부터 이들은 지금의 거제 둔덕면 우두봉 아래 작은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성에서 지냈다. 그들이 거처를 둔 곳은 둔덕기성이었다.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526m, 높이는 4.85m 규모였다.

의종은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신라시대에 지어진 성곽을 다시 쌓았다. 그러고는 성안에 16만 6000L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집수지와 음식·무기 저장고를 만들었다. 또 자신이 지나왔던 전하도가 내려다보이는 산성에 망루를 지어 밤낮으로 망을 봤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두었다. 성 주위 마을에는 밭과 마장을 세웠다. 밭을 둔 마을에서는 농사를 지었고, 마장에서는 군마를 키웠다.

의종은 둔덕기성에서 3년간 머물면서 복위를 꿈꿨다. 그러던 1173년 8월 문신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없애고 다시 전왕을 세우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의종은 문신들과 함께 경주로 이동했다. 하지만 바로 관련 소식이 정중부와 이의방 귀에 들어가면서 일이 꼬였다. 두 사람은 장군 이의민, 박존위에게 군사를 거느려 남로로 나갈 것을 주문했다.

둔덕기성 내부. /최석환 기자

◇유배 도중 경주서 맞이한 죽음 = 키가 8척에다 장사로 알려진 이의민과 일당들이 경주에 도착하자, 어떤 사람이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전왕이 이곳에 온 건 문신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며 고을 사람들의 의사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의종 무리가 수백 명에 불과하기에 괴수만 제거한다면 나머진 죄다 무너져 달아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자신이 돌아가서 해결하겠으니 고을 사람들에게는 벌을 주지 말라는 간청도 했다.

그는 이의민에게서 “근심하지 말라”는 답변을 들은 뒤 고을 안에 들어가 군중들과 모의했다. 이어 밤에 의종과 함께 있던 집단을 군사로 포위하고 나서 수백 명을 참살했다. 의종 목숨은 살려뒀다. 객사에 따로 감금했다. 그 뒤 10월 초하루 경신일에 이의민에게 인도했다.

전왕을 끌어낸 이들은 곤원사(坤元寺) 북쪽 못가에 이르러서 술 두어 잔을 의종에게 건넸다. 이후 이의민은 의종의 등뼈를 부러뜨렸다. 그가 손을 대는 족족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에 이의민은 큰 소리로 웃으며 좋아했다. 박존위는 의종이 숨을 거두자 시체를 요로 싼 뒤 2개를 합한 가마솥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을 잘 치는 자가 추후 가마솥을 떼어 가져가는 바람에 시체가 밖으로 나왔다. 이 시신은 며칠이 지나도 물고기와 자라·까마귀·솔개 등이 훼손하지 않았다. 버려진 의종의 시신은 전 부호장이었던 필인 등이 몰래 꺼내 관을 갖추어서 못가에 매장했다. 의종의 나이 47살 때 일이었다.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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