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깊은 이야기 (1) 화왕산성

군사적 요충지 화왕산서 왜병 물리친 곽재우
긴 줄 연결하고 오색 옷 걸어 교란작전 펴기도
성곽 안 연못 자리...창녕 조씨 득성 설화 가득

문화유산에 얽힌 역사 이야기는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누구나 속을 들여다보면 흥미롭게 여길만한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알수록 빠져드는 역사도 많습니다. 한 번쯤 따분하다는 고정관념에서 한 발짝 벗어나 경남지역 유산 속 숨은 이야기에 눈길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요? 겉에서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의미를 마주할 수 있을 겁니다. 지역 유산 속에 얽힌 이야기를 한 번씩 지면에 소개합니다.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있는 화왕산 해발 756.6m 정상에 삼국시대 성곽이 있다. 이름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이다.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둘레 2700m, 면적 22만 6790㎡에 이른다. 차곡차곡 올려진 성벽은 험준한 바위산과 남봉 사이 움푹 들어간 부분을 에워싸고 있다. 모난 자연석과 다듬어진 돌들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쌓였다. 현재 동문과 서문·연못 등이 여기에 있다. 서문은 거의 허물어져 형태가 온전하지 않지만, 동문은 넓이 1m, 높이 1.5m 규모 성문이 완전하게 남아있다.

국내 100대 명산에 포함되는 화왕산에 거대한 성곽이 구축된 건 오래전부터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망우당 곽재우가 화왕산을 본거지로 삼았다. 휘하에 장수 17명과 의병 수천 명을 거느렸던 곽재우는 기강·정암진·현풍·창녕·영산·진주성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해 백전백승했다. 화왕산성에서도 그는 왜병을 물리치며 빛나는 공을 세웠다.

창녕 화왕산성. /최석환 기자

◇홍의장군 곽재우가 정비한 화왕산성 = 임진왜란 때 왜군은 창녕에 들이닥쳤다. 1597년 7월 대구 현풍지역 석문산성이 지어지기 전 왜적이 몰려오자, 곽재우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네 고을 병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으로 옮겨갔다.

그를 중심으로 모인 병사와 백성들은 화왕산에 배치됐다. 적장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맞서 곽재우는 동요하지 않고 용맹하게 전투를 이어갔다.

전투에서 산성은 큰 역할을 했다. 왜적들은 가파른 산에 지어진 성곽을 좀처럼 넘지 못하고 하루 밤낮 만에 철수했다. 산이 험준했던 것도 돌아간 이유 중 하나였다.

창녕 화왕산성. /최석환 기자

승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성곽을 두고서는 내막이 하나 있다.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앞치마에 큰 바윗돌을 싸서 곽재우를 찾은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단단한 돌을 성을 쌓는 주춧돌로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곽재우는 이를 받아들여 동료들과 함께 산성을 정비·구축했다.

싸움이 한창 치열하던 시기 산성이 일부 무너질 위험이 있었으나 할머니가 가져온 바윗덩이가 성을 부축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화왕산성 한 귀퉁이에 힘센 사람 두세 명이 힘을 합쳐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바위가 그것이다.

주민들은 이 돌을 ‘괴얀돌’, ‘귀한돌’이라 부르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곽재우가 정비하기 전 이 성이 처음 쌓인 시기는 5~6세기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장 성천희, 밀양부사 이영, 곽재우가 승전했다.

창녕 화왕산성. /최석환 기자

◇화왕산과 비덕산 줄기에 오색 옷 달아 교란작전 = 곽재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붉은 옷을 입고 싸웠다고 해서 ‘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여럿에게 붉은 옷을 입혀 교란작전을 썼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벌통을 건드리게 하거나 이정표를 바꿔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곽재우는 화왕산 꼭대기와 현풍 비덕산 꼭대기를 연결하는 줄을 연결해 붉은 옷과 푸른 옷 등 오색 옷을 달아놓는 작전도 폈다. 줄을 잡아당겼다 놓을 때마다 장군과 병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착시효과를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다.

창녕 화왕산성 성벽 위를 걷고 있는 등산객들. /최석환 기자

이에 왜적들은 군사가 많은 걸로 착각해 쳐들어갈 생각은커녕 지레 겁부터 먹었다고 한다. 현풍 비덕산과 화왕산 간 거리는 몇십 리에 이르기에 실제로 그런 줄을 끝에서 끝으로 매달 수는 없었겠지만, 그만큼 홍의장군이 지혜롭게 전투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진다.

용맹했던 곽재우와 그와 함께했던 의병들은 화왕산성을 지켜냈다. 산성 정비와 수성에 나섰던 그의 안목은 남달랐고, 전략은 영리했다. 곽재우를 두고 으뜸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화왕산성을 사수하지 못했으면 밀양·영산·창녕·현풍 백성들은 참혹한 꼴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화왕산성 수성은 곽재우 업적 중에서도 남다른 가치가 매겨진다.

◇산성 안 창녕 조씨 득성 설화 = 화왕산성 안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한다. 억새밭 한가운데 있는 용(龍) 연못이라는 이름의 못이다. 자연석으로 만든 2.4m 높이 창녕 조씨 득성비도 이곳 앞에 있다.

창녕 조씨 득성비. /최석환 기자

여기에는 전설이 얽혀있다. 내용은 이렇다. 신라 진평왕 때 이광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향이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딸은 16세 젊은 나이에 ‘청룡병’이라는 병을 앓았다. 배가 부어오르는 병이었다.

온갖 약과 정성을 쏟아도 낫지 않았다. 이에 이광옥은 어디선가 화왕산 용담에 가서 정성껏 기도하고 목욕하면 나을 거라는 얘기를 들은 뒤, 딸을 데리고 화왕산에 올라갔다. 기도하는 과정에서 별안간 구름과 안개가 끼었다. 용담에서 큰 용이 나왔다. 용은 예향을 얼싸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내 애향은 물속에서 빠져나왔는데 그 뒤 부어올랐던 배가 쑥 들어가면서 앓고 있던 병이 나았다.

예향은 그 후 아이를 밴 기미를 보이더니 열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시집도 가지 않은 여성이 아이를 낳자 모두가 걱정했다. 어느 날 예향은 “그 아이는 용왕의 아들로 이름은 옥결이라 했다”는 내용의 꿈을 꿨다. 옥결은 장차 씩씩하고 용모가 바른, 의로운 사람으로 컸는데 겨드랑이 밑 갈비뼈 쪽에 ‘조(曺)’자가 쓰여있었다고 한다. 진평왕은 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조(曺)를 성으로 하사하고 이름은 계룡(曺繼龍)이라 지어줬다. 이어 공주와 짝을 지어준 뒤 사위로 삼아 창성부원군으로 예우했다고 한다.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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