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읽으며 나를 되돌아본 시간
익숙한 잣대 벗어나 진짜 삶 고민해

아침마다 단체톡이 울린다. 2021년 6월 시작된 이른 아침의 단체톡은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다. 수많은 단체톡을 보지만 대부분은 스치듯 보고 나면, 지우기 바쁘다. 유일하게 눈길을 잡고, 한참을 마음을 잡는 단체톡방이다. 김해 월산초등학교 학부모 독서동아리에서 만난 회원들과 단체톡을 만들었다. 회원 6명의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책 이야기도 나누고 안부라도 묻고 지내면 어떨까 해서였다. 회원 중 한분은 매일 필사를 한다고 했다. 글을 적고 나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아침마다 울리는 카톡창에는 정갈한 필체로 필사한 글이 사진으로 올라온다.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글이 많다. 1년 365일 훌쩍 넘은 필사본. 나 역시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꼼꼼히 읽어 새긴다. 하루만이라도 글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자고 다짐한다. 가끔은 좋은 글을 올려주어 고맙다는 답글을 달거나, 글에 대한 나의 의견을 슬며시 던지기도 한다. 힘들이지 않고도 가까이서 단편의 글을 읽으며 성찰하는 시간 여유에 너무도 고마울 따름이다.

며칠 전이었다. 만화책을 뒤적이다(손바닥 안에서 조명을 밝히는 만화) 박봉성 화백의 <알라리 도사>라는 책을 읽는 중이었다. 돈을 내고 보는 만화가 그리 많지 않지만 이상하게 끌렸다. 1부가 끝날 무렵, 주인공의 대사가 밤새 가슴을 후볐다. '나는 하늘이자 땅이요, 밤이자 낮이요, 산이자 바다이다….' 도(道)를 터득한 젊은 청년이 사회의 불의를 헤쳐나가는 이야기의 만화책이 왜 이리 맘에 들었는지.(학창시절부터 박봉성 화백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액션극화를 즐겨 보는 편이다) 나 역시 도(道) 터득한 사람처럼 살리라 밤새 마음먹었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현실을 택하고 말겠지만 말이다.

아침이 밝았다. 어김없이 반가운 필사본이 올라왔다. 흠칫 놀랐다. 아니 눈을 의심했다. 닮은꼴은 이런 걸까? 필사본의 일부를 옮겨 적어본다.

'김형경 작가가 쓴 정신분석 에세이 <남자를 위하여>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얼마 전 한 문단 행사의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그 무렵 환갑을 넘긴 한 원로 작가 선생님이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평생 남자인 척하며 살기가 참 힘들었어." 그분의 목소리는 담담한 편이었는데 그 순간 어쩌자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절절한 이해와 공감의 마음이 일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선생님, 저는 평생 여자인 척하면서 사는 게 힘들었어요."'

필사본을 읽는 순간 어쩌자고 내 마음속에도 절절한 이해와 공감이 소용돌이 쳤는지 모르겠다. 살아온 인생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익숙해진 관습의 잣대에 삶을 맞추며 살아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거나,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끼워 맞춰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 아들, 남편…, 그리고 나를 수식하는 수많은 또 다른 모습들. 나는 '누구인가'와 '무엇인가'의 사이에 서있다는 사실.

간밤에 읽었던 만화책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나는 남자이자 여자이고, 아버지이자 엄마이며, 아들이자 딸이며, 남편이자 아내이다." 여전히 남자이고,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남편이란 그 무엇이 변하진 않지만, 살아가는 순간순간 나는 '누구인가'와 '무엇인가'의 선택에 선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여러분의 수식어는 어떤 의미인가요? 끝으로 매일 좋은 글을 올려주시는 권수정 님께 감사드린다.

/장진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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