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직업·연령 82명 구성
첫 본회의서 정책·조례 제안
실생활에 밀착한 정책 쏟아져
"여성 정치 역량 확보 첫걸음"

사회복지사, 직업상담사, 어린이집 원장, 고등학생, 시민단체 활동가 여성들이 경남도의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5분 자유발언을 했다. 현직 도의원들이 들었더라면 뜨끔했을 정도로 날카로운 지적과 정책 제안이 이어졌다. 생생한 경험을 얘기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지난 25일 오후 2시 경남도의회 본회의장. 도민여성의원 42명이 등원해 당선증을 받고 실제 도의회 본회의와 똑같은 의사일정을 진행했다. 전국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여성 시민으로 구성된 경남도민여성의회가 첫발을 뗐다.

김경영(더불어민주당·비례) 도의원이 의장을 맡은 도민여성의회는 보건복지위·주거환경건축위·문화예술체육위·일자리위·아동청소년위·교육위 등 6개 상임위원회 82명으로 구성됐다.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김 의원은 경남여성도민의회를 열 것을 약속했다. 5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100여 명이 신청했다. 이어 6월 실무 지원 인력, 7월 상임위를 구성해 비대면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해왔다. 이후 이달 초 코로나19가 진정세에 들면서 대면 상임위원회를 열고 정책 제안 과제를 선정했다.

이날 본회의 5분 자유발언과 조례안은 그 결과물들이다. 어떤 목소리가 나왔을까.

◇폭력 피해 회복 지원을 위한 노인종합상담기관이 없다 = 신입 사회복지사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15년 차 사회복지사라고 소개한 황순정(복지위) 도민의원은 배우자에게 지속적인 성폭력과 성학대를 비롯해 언어·정서 학대를 당하고 있는 노년 여성들의 사례들을 언급하며 제대로 된 지원이 없다고 질타했다.

황 도민의원은 "여성노인 피해자들은 감히 이혼을 꿈꾸지 못한다. 배우자가 한 푼도 안 주고 내쫓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자녀들과 연락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며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고 소원이 있다면 자신의 공간에서 단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아보는 것"이라고 현실을 전했다.

이어 "학대 피해 노인을 지원하는 기관이 전국에 설치돼 있지만 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는 성 학대나 폭력에 관한 경험 부족으로 지원에 난색을 표하는 일이 많다"며 여성들의 주체적 삶을 지원하는 노인종합상담센터 신설을 제안했다.

경남에는 경남복지정책연구소가 운영하는 노인지원상담실과 경남종합사회복지관이 운영하는 노인상담전화가 있지만, 전화 상담을 주로 하는 기관이어서 적극적인 지원과 대처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반면 경기도는 경기도 노인종합상담센터를 중심으로 24시간 위기·응급 지원을 하고 있다.

◇한부모 가정 복지급여 삭감 이대로 둘 건가 = 이란성 쌍둥이의 엄마이자 시민단체 활동가인 강태옥(복지위) 도민의원은 한부모 가정 관련 정책 개선을 촉구했다. 특히 비양육자에게서 양육비를 받으면 한부모 가정의 소득으로 잡혀 복지급여가 삭감되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개선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강 도민의원은 "저는 주부였고 아이 둘을 둔 경제력이 없던 여성이었는데 양육비가 실제 소득으로 측정돼 복지급여가 끊겼다. 행정 당국과 지난하게 싸워온 과정이 제 삶이었다"며 "불합리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야간에는 복지학을 배우고 주간에는 시민단체 활동가와 생계형 강사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감정이 복받친 듯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

강 도민의원은 "한부모 가정들은 월 최저시급 176만 원(2019년 기준)을 초과하면 복지급여 자격이 박탈되거나 다시 심사를 해야 하고 그로 말미암아 아이들의 힘겨움도 깊어지게 됐다"면서 "한부모가정지원센터 추가 개설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한부모 가정에 실질적인 지원을 펼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이어 "2018년부터 사회복지의 사각지대로 대두되기 시작한 한부모 양육자의 고충과 자녀들의 말못할 고민들에 더 귀 기울일 때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석탄화력발전소 피해 대책 아직 멀었나 = 하동화력발전소에서 불과 150m 떨어진 명덕마을에 살며 사천·남해·하동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으로 일하는 전미경(주거환경위) 도민의원은 도의회에서 전원개발촉진법 등 관련법 개정 건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전 도민의원은 "제도적 한계 때문에 명덕마을과 유사한 마을은 주민 간, 주민과 발전사업자 간, 주민과 행정 간 갈등에 내몰리고 있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서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현실"이라고 지적한 후 "석탄발전소에서 나오는 악취부터 비산먼지까지 다양한 유해물질로 주변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지만 사실상 도와 해당 자치단체는 발전소 세수 유입에 따른 집행에만 몰두했을 뿐 피해 대책에는 손을 놓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원개발촉진법에 발전설비용량별 이격거리 제한 규정 신설,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법에 '발전소 운영단계에서도 이주정착지원사업의 추가' 조항을 신설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900㎿ 이상의 발전설비는 1500m, 150∼900㎿는 700m, 100∼300㎿는 500m까지 최소 이격거리로 제한하고 있어서 발전설비 건립 후에도 인근지역 주민들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법에는 관련 규정이 없다. 전 도민의원은 지원법 개정으로 발전소 운영단계에서 이주에 필요한 재원 확보를 위한 법률적 근거 마련을 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빈집을 여성가구 안심 공공임대주택으로 = 재가복지센터에서 일하는 정상희(주거환경위) 도민의원은 늘어나는 빈집을 활용해 여성 1인 가구, 여성 한부모 가구를 대상으로 여성안심 공공임대주택사업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경남형 여성 가구 지원조례' 제정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정 도민의원은 "여성 고령자 1인 가구와 여성 청년 1인 가구가 동거하면 고령자의 사회적 돌봄을 완화할 수 있고 부분적 돌봄을 제공하는 청년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여성 고령자 1인 가구와 모자 가구가 동거하면 자녀 돌봄과 노인 돌봄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경비 지급 등 제도 정비를 모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적 돌봄의 사각지대가 여전히 존재하고 24시간 시간제 보육이 이뤄지고 있지만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거리 문제 등으로 현실적 어려움이 크다. 여성안심 공공임대주택사업은 이 같은 공적 돌봄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한편 노인과 청년 고독사, 빈집 활용 문제 등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발상이다.

이날 직업상담사인 전미현(일자리위) 도민의원은 통합일자리정보센터 구축, 어린이집 원장인 강미옥(아동청소년위·교육위) 도민의원은 아동학대 예방 부모 양육 안심케어 기구, 박민애(문화예술체육위) 도민의원은 문화예술계 성평등 커뮤니티를 제안했다. 마산제일여고 2학년인 이수빈(청소년 부문) 도민의원은 '청소년들을 고가품 소비 대상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경남도민여성의회 구성·지원 조례안도 가결했다.

◇여성의 생생한 이야기들 정치장으로 = 이날 경남도민여성의회는 여성들이 현실에서 체감한 문제점들을 펼쳐낸 '생활정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양한 의견이 한자리에 모이는 공론장 형성이 정치의 기본이라는 점도 되새기게 했다. 또 경남도의회 여성의원 비율이 13.79%(8명)로 도민 절반인 여성을 대변하기에는 대표성이 턱없이 낮은 현실에서 여성 정치 참여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의미도 있다.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대표는 "저는 오랫동안 여성운동과 성평등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해왔고 많은 분이 마지막 힘을 여성정치 세력화로 결론 지었다. 여성 정치의 제도적 장치 마련도 중요하지만 이번 경남도민여성의회처럼 여성정치 세력화를 위한 역량을 갖추는 일도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 처음으로 열리는 경남도민의회가 의미 있고 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김경영 도의원은 "다양한 경험이 모여 정책 의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제안된 많은 정책을 정치에서 실현하고 연구보고서로도 만들어 도민께 전달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