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리워하던 천상병 시인
달 그림자 드리운 바닷가 노래
김춘수 시인은 3·15의거 그려
김주열 시신 발견장소 문화재로
하지만 바다는 옛 풍광 사라져

몇 해 전의 얘기다. 살다 보면 헛헛해지는 일이 있다. 그럴 때에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만한 게 없다. 노모의 고봉밥을 먹고서 마침 열리고 있던 국화축제에 갔더랬다. 국화가 전시된 곳은 마산 바다 옆 공터였다. 꽃보다 바다에 눈길이 갔다. 이왕 나선 김에 어시장과 월영동 댓거리까지 한 바퀴 돌았다. 월영동은 내게는 외가이고 어머니에게는 친정 동네이다. 월영동의 이름이 월영대에서 비롯했다. 1000여 년 전 마산 바다를 찾은 이도 헛헛했을는지도 모른다.

신라 천재 최치원의 얘기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했다.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으로 문장을 떨쳤다. 모두로부터 인정받은 그였지만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 고독한 시간마다 마음은 머나먼 고향으로 내달렸다.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불행히도 국운은 기울 대로 기울고, 군주는 깜냥이 되지 못했다. 만리심(萬里心)으로 돌아온 고향이건만 육두품 출신인 그에게는 좌절뿐이었다. 중앙 정계를 떠나 외직을 자청하며 남쪽 바다를 따라 유랑한다.

경주를 떠난 그는 동해를 따라 내려오다 남해로 접어드는 바다에 이르렀다. 해운대는 동해의 물과 남해의 물이 만나는 언저리의 바다이다. 동해의 물은 높았고 남해의 물은 잔잔했다. 동해의 파도는 높아 벼랑에 하얗게 부딪었고 남해의 파도는 모래를 안고 해변에 길게 누웠다. 어우러지는 절경에 대(臺)를 세우고 자신의 자(字)를 따 해운대(海雲臺)라 했다. 세상의 절망과 어울리지 못하였던 이였으니 높고 잔잔함이 어울리는 자리를 탐했을는지도 모르겠다. 탐하였으나 내 것이 되지 못하였을 터이다.

다시 유랑을 떠난 그는 골짜기처럼 육지로 깊이 들어선 바다를 만났다. 남쪽으로는 거제도, 동쪽은 가덕도, 서쪽으로는 통영 반도가 막아서 잔잔하기가 호수와 같았다. 최치원이 머물렀을 때에는 골포(骨浦)라 불렸고 이후엔 합포(合浦)라 불리게 되는 마산 바다이다. 달이 휘영청하면 달빛에 반짝이는 잔물결, 윤슬이 외로이 떠도는 그를 위로했다. 스스로 빛나는 것은 제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건만, 이 바다에서는 달이 윤슬마다에 제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운(孤雲) 최치원은 잔잔한 마산 바다가 바라뵈는 곳에 대(臺)를 쌓았다. 윤슬마다 비춰진 달 그림자를 이름 삼아, 월영대(月影臺)라 했다.

달의 밝음은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밝음이다. 차고 기우는 달은 생명이기도 하다. 사람의 맨눈으로 바라보는 생명을 성찰이라 해도 될까.

늙은 나무 기이한 바위 푸른 바닷가

고운이 놀던 자취는 연기처럼 사라졌네.

이제는 오직 높은 대에 달만 남아있어

그 정신 담아다가 내게 전해주네.

-노성미(경남대 국어교육과) 역

퇴계 이황의 <월영대>이다. 퇴계는 홀연히 신선이 되었을 고운을 아쉬워 한다. 고운이 바라보았을 마산 바다의 달에서 퇴계는 자신을 읽고자 했을 것이다.

▲ 맹수가 된 돼지가 섬이 되었다는 돝섬. 돼지의 옛말 '돝'을 붙여 이름 삼았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돝섬 출렁다리.  /경남도민일보 DB
▲ 맹수가 된 돼지가 섬이 되었다는 돝섬. 돼지의 옛말 '돝'을 붙여 이름 삼았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돝섬 출렁다리. /경남도민일보 DB
▲ 돝섬과 마산시가지 사이에 있는 마산해양신도시. 바다를 매립한 섬이다. 공원과 주거시설, 상업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경남도민일보 DB
▲ 돝섬과 마산시가지 사이에 있는 마산해양신도시. 바다를 매립한 섬이다. 공원과 주거시설, 상업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경남도민일보 DB

마산 바다 가운데에 섬이 있다. 맹수가 된 돼지가 섬이 되었다 한다. 돼지의 옛말 '돝'을 붙여 이름 삼았다. 돝섬에서 밤마다 돼지 울음소리가 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최치원이 활을 쏘았더니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기울어져 가는 세상엔 징조일 수 있는 소리가 많기 마련이다. 백성의 두려움을 없앴으나 그의 고뇌는 깊어졌다. 제 스스로 밝은 이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하는 법이다. 그림자를 갖지 못한 이는 땅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그가 달 그림자 가득한 마산 바다를 떠나 가야산으로 간 게, 돼지 울음 때문인 것만 같다.

마산 바다에서 누구라도 떠올리는 노래는 <가고파>일 듯싶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노래는 마산 바다를 마주할 때마다 무심코 흥얼거리게 된다. 노산 이은상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서울에서 생활하며 1932년에 지었다. '고향'이란 말에는 '등전만리심'을 읊조리던 마음에서 1000여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감상(感想)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노산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도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 '그 물새들'과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에 있다.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던 시절에도 노산의 그리움이 있다. '그 바닷물 소리를 밤낮에 듣'고 싶고 '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 한 바닷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고향은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따뜻한 곳이다. 세상에 나서면서 묻혀온 때를 '깨끗이도 깨끗이' 씻기우고 '알몸으로 살'아도 될 곳이 노산 이은상의 고향 바다,

마산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고향은 대체로 그러할 듯하다. 마산, 고향 바다를 잊지 못한 시인이 또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던 천상병이 그이다. 그는 마산중학, 지금의 마산고등학교에 다녔다. 바닷가 도시가 대체로 그렇듯 산허리를 가르는 도로가 있다. 그 시절엔 산복도로에 있는 마산고등학교에서 마산 바다가 잘 내려다보였다. 천상병은 궁금했다. 뭍의 것들이 달 그림자 드리운 잔잔한 그 바다를 향하는 까닭이.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천상병, '강물' 중에서

'강물'은 천상병이 고등학생 시절인 1949년 <문예>지에 발표했다. 그의 선생님은 당시 마산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였던 김춘수였다.

꽃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춘수의 시는 대체로 존재론적인 탐구를 보여 준다. 종종 상징과 비유가 현학적이게 보이곤 한다. 그의 시적 경향에서 예외적인 시가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에서이다. 이승만의 노욕은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마저 무참히 꺾으려 들었다.

남성동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

너는 보았는가…뿌린 핏방울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1960년 3월15일

너는 보았는가…야음을 뚫고

나의 고막도 뚫고 간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중에서

부정선거에 맞서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3월 15일 밤, 시내 곳곳에서 시민과 학생들은 시청을 향해 무학초등학교 앞 도로에 집결했다. 경찰은 무학초등학교 방향으로 시위대를 밀어붙이며 실탄 사격을 가했다.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은 시위대를 향했고, 무학초등학교 담장에 그 흔적을 남겼다. 4월 11일에는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바다에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마산 바다는 진실을 감추지 않았다. 바다가 내어놓은 김주열로 독재에 맞선 마산의 시민·학생의 투쟁은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김주열(金朱烈)이 헤엄치는

저기 저

바다

-이제하의 '다시 바다' 중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4월 혁명 발원지로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민주화운동 관련 장소가 문화재가 된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몇 해 만에 다시 마산 바다에 왔다. 바다를 가까이에서 보려 월영대에서 해안도로로 내려왔다. 돝섬을 향한 최치원의 활은 마산 바다를 비겨 날았을 터인데, 그 바다가 안 뵌다. 가재와 거이 잡던 바다도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김주열 열사를 내어놓았던 바다도 지금의 모습은 아니다. 해양신도시라는 인공섬이 가리고 덮고 바꾸었다. 이토록 빨리 변할 줄 알았으면 더 자주 더 많이 눈에 담아둘 것을.

"야가 와 맹하이 섰노. 나선 김에 장어나 무러 가자. 몸이 허할수록 잘 묵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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