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위해 땅과 소통했던 선조 '농민'
서로 스미고 섞여 살아가는 이치 알아

4차 산업혁명에 넋이 나갈 무렵, 코로나가 쳐들어왔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앞장섰다. 손 안 대고 자동차를 탈 수 있는 세상이 코앞이었다. 차가 사고 내면 차 주인 책임인지, 차가 책임져야 하는 건지 옥신각신할 때 코로나가 훅 들어왔다. 모든 것이 일단 멈춘 순간이었다.

코로나 이후 인간 삶의 단면을 복기해본다. 우선 인간이 건물 안으로 숨어서 텅 빈 도시에 원래 주인이던 동물들이 나타나 어슬렁거렸다. 그들은 배가 고팠건, 어떤 이유에서건 원래 자신들 영역이었던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인간들은 죗값(?)을 치러야 했다. 전문가 집단은 한결같이 타인을 만나 서로 호흡을 느끼면서 소통하면 죽음이 찾아온다고 했다. 공포와 슬픔을 마스크 안에 숨기고 서로 피해 다녔고 사이버공간에서 어색하게 만나야 했다. 무엇인가와 실제로 소통해야 존재감을 느끼는 인간들은 온전히 생존만을 위해 헌신하던 선조 삶을 떠올렸다. 땅과 소통하기! 바로 농민의 삶이었다. 장 피에르 베르낭은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유>에서 말했다. '땅은 가치 있는 이들과 어디에도 쓸모없는 이들을 밝혀낸다' 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분에 씨앗을 뿌리고 상추와 방울토마토를 키웠다. 꽃과 치유능력이 있는 식물을 '반려식물'이라며 더 많이 곁에 두었다. 코로나에 조금 적응되자, 진작부터 미국 아마존에서 세계적인 아이템이었던 한국 호미가 전통 농기구로 존재감을 확인받았다. 집 밖 작은 텃밭을 찾아내 채소를 가꾸고 흙내를 맡으며 비로소 큰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흙의 정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인간 존재 이유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땅에서 직접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은 유기적인 순환관계를 통해 생의 단계가 유지되는 것을 끈기있게 지켜본다. 그 과정에서 태어남과 삶, 그리고 죽음을 온몸으로 확인한다. 순환하는 시간의 비밀을 알게 된다. 어제와 오늘, 오늘 다음 내일 같은 일직선상의 시간은 믿지 않는다. 시간뿐만 아니라 생존하는 생명체와 사물들, 돌멩이와 먼지조차, 돌고 돌며 서로 안에 스미고 각각 자신들이 섞여 새로운 자신들로 태어나 살아가는 이치를 체득한다. 그 과정에서 욕심은 화를 부르고, 희생은 당연한 소멸의 과정인 것도 알게 된다.

코로나는 인간을 '생존자' 농민으로 돌려놓았다. 더불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찐'철학까지 가르쳐 주었다. 몬스테라는 몇 년 전까지 아주 핫한 반려식물 아이템이었다. 잎이 어느 정도 자라면 가지가 찢어지기 시작한다. 바람에 상처 입지 않으려는 자구책이다. 큰 잎에 가려진 아이들에게도 햇볕을 쬐게 해주는 방법이기도 하단다. 또 하나,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운다. 욕심이 뻗친 인간이 더 빨리 크라고 자신의 사랑인 듯 물을 듬뿍 주면, 몬스테라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없는 수분을 잎끝으로 뱉어 버린다. 필요 없다니까. 뚝뚝뚝…. 인간이라면 먹고 죽는다 해도 어림없을 일이다.

베란다의 방울토마토가 자꾸자꾸 달리는 것을 신기해만 하던 인간은 가지를 쳐 주지 않았다. 급기야 열매 맺기를 다한 가지와 잎은 남아있는 막내 열매들의 알찬 생명 유지를 위해 스스로 노랗게 말라 들어간다. 아무리 물을 줘도 소용없다. 스스로 숨을 거둔다. 먹지 않겠다니까. 동생들아 잘 살아….

대체 나는 학교를 다니며 무엇을 배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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