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치료 거부한다는 83세 열정 할매
그 의지대로 지금 삶을 즐길 수 있길

어버이날, 엄마에게서 카드 한 장을 받았다.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받은 카드에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 이게 무슨 카드? 나의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내가 많이 아프면 산소호흡기 같은 거 달지 마라!" 혹시라도 억지로 목숨을 연명시킬까 봐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을 했다고, 엄마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누구네 엄마가 3년째 가망도 없는 목숨을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병원에서 살고 있다며, 당신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절대 피해를 주기 싫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잘 하셨습니다." 쿨하게 엄마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을 건네받았지만 가슴 한 구석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엄마의 죽음이 이제 더 이상 먼 미래가 아니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까지 겹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날 나는 엄마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동시에 엄마의 삶을 돌아봤다.

엄마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 1939년, 남해 가난한 집 첫째 딸로 태어난 엄마에게 엄마의 엄마는 말했다. 여자가 많이 배우면 팔자가 사나워진다고. 하지만 그 말은 맞지 않았다. 엄마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는데 팔자가 사나웠다. 아들 한 명 없이 내리 딸만 8명만 낳은 것도 서러운데, 그 반쪽의 책임을 져야 할 남편마저 일찍 보냈다. 고등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학비를 걱정해야 할 어린 자식 다섯을 혼자 길렀다. 여성 혼자 살기에는 척박한 땅 남해에서 젊은 엄마는 도망가지 않고 자식 곁을 지켰다. 부끄러움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엄마였기에 아버지의 부재를 이겨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애가 강한 엄마였기에 당신 스스로가 그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지 않았나 싶다. 20세기 여성이 아닌 21세기 여성 스타일. 엄마를 보면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시대만 잘 타고났어도 뭐가 돼도 됐을 텐데…. 참, 아깝다.

83세, 엄마의 별명은 까진 할매다. 엄마의 열정과 끼는 보통 노인보다 조금 넘친다. 춤을 배우기 위해 남해에 집을 두고 진주에 오피스텔을 얻어서 자취하시는 열정의 소유자다. 무엇보다 엄마는 자신을 꾸미는 데 소홀함이 없다. 코로나 시대, 외출을 못하는데도 옷을 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서 집에서 입고 계신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보다 스스로 만족을 위해 예쁜 옷을 입는 엄마는 진정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여성이다. 화장도 마찬가지. 가까운 시장에 가더라도 늘 목욕을 하고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신다. 엄마에게 화장은 사람을 대하는 예의이다. 올해 초, 회사 이사 기념으로 엄마가 음식을 장만해 오신 적이 있다. 내가 잠시 로비로 내려가 음식을 받기로 한 그날, 돌발 변수가 생겼다. 엄마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회사 대표님이 따라나선 것이다. 예정에 없던 대표의 등장에 엄마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해에서 창원까지 점심시간에 맞춰 음식을 전달하려다 보니 시간에 쫓겨 화장을 못한 것이다. 그날 엄마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민낯이 부끄러워 대표님과 눈도 못 마주치는 모습이 꼭 수줍은 소녀 같았다.

나는 아침에 종종 죽음을 생각하는 편이다. 아침부터 죽음을 생각하면 적어도 하루를 허투루 보낼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은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면으로 마주 볼 생각이다. 사전연명의향서에 서명한 엄마의 의지대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시대를 즐긴 여자. 엄마의 인생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엄마와 돌아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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