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국제슬로시티연맹 결성…2009년 하동·2018년 김해 인증
지자체들 홍보용이란 오해 커…브랜드 아닌 '느림의 가치' 방점
마을 만들기, 슬로시티에 대입…철학·방향 뚜렷하게, 쉬운 것부터

◇이탈리아에서 슬로시티 운동 촉발한 이유 = 최근 우리나라 슬로시티(Slowcity) 두 군데를 다녀왔다. 현지 주민들을 만나 슬로시티와 마을주의 운동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 맥도널드가 입점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이후 1999년 오르비에토를 중심으로 슬로시티연맹이 결성돼 2021년 4월 현재 30개국 275개 도시가 가입했다. 한국은 2007년 국제인증을 시작했고 하동군은 국내 다섯 번째, 세계 111번째 인증을 받았다.

국제인증은 7개 분야 72개 항목의 평가기준을 바탕으로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 그렇다고 인증 도시 모두가 이 항목에 합격을 한 것은 아니다. 국제슬로시티 정신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이며 시민이 이 운동에 앞장서겠다는 의지에 인증한 것으로 보고 싶다.

◇김해시의 탁월한 선택, 미래 향한 '행복선언' = 슬로시티는 시정 철학이며 실천강령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마을주의 운동에 접목하려 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놀루와'에서 행하는 각종 여행, 교육, 마을활성화 등 프로그램도 슬로시티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세계 어느 슬로시티도 평가항목을 100% 만족하지 않는다고 본다. 단지 그 기준을 향해 나아가고 하루하루 진전하기를 애쓰는 것이다.

2018년 김해시가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순간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으나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탁월한 선택을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김해는 지금까지 공단과 난개발로 도시가 많은 상처를 입은 곳이다. 그곳이 슬로시티가 됐다. 그렇다고 도시 정체성을 단번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같은 공단이라도 슬로시티 정신이 반영되면 공단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다. 모르긴 모르되 김해시의 그런 의지를 믿고 싶다. 그렇게 나아가기를 간절히 응원한다.

▲ 슬로시티 본부가 있는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시 전경. 이 작은 도시가 세계 30개국 275개 도시를 이끌어가고 있다.  /조문환 시민기자
▲ 슬로시티 본부가 있는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시 전경. 이 작은 도시가 세계 30개국 275개 도시를 이끌어가고 있다. /조문환 시민기자

◇1인당 주민소득 6만 달러 도시가 왜? = 2008년 초 슬로시티를 처음 접한 나는 곧바로 국제슬로시티 본부가 있는 이탈리아 오르비에토로 날아갔다. 근원과 현장을 보고 싶었다. 다녀와서는 곧바로 인증 절차에 돌입했고 2009년 하동군이 공식적으로 국제인증을 받았다. 먼저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때까지 슬로시티를 구멍가게 정도로만 봤었다. 슬로시티를 관광수단으로만 생각했었다. 달팽이 마크 붙여 관광홍보에 활용하고 농특산물 좀 팔아보고자 했다.

충격적인 것은 2009년 6월 유럽을 방문하고서다. 스웨덴 슬로시티 팔쇼핑을 방문했는데 당시에 그 도시 1인당 주민소득은 6만 달러였다. 이 도시가 왜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는지 무척 궁금했다. 시장과 간담회에서 나는 가장 먼저 질문을 했다. 시장의 대답은 내게 충격을 주었다. "시민 삶의 질을 위해서입니다." 6만 달러 소득에 뭐가 부족해서 슬로시티를 입히겠는가? 관광 좀 해먹겠다는 얄팍한 생각을 가졌던 나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때부터 슬로시티에 대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관광이 아니라 삶의 질로 바뀐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업무를 수행함에 '삶의 질'을 가미하려고 노력했다. 단지 여행객 몇 명, 농특산물 몇 상자는 문제가 아니었다.

▲ 이탈리아 브라시에 있는 슬로푸드 본부 사무실(왼쪽 사진). 슬로시티는 도시 단위로, 슬로푸드는 개인 단위로 인증을 받는다. 그래서 슬로시티는 그 도시의 시정 방침과 연결되어 있다.  /조문환 시민기자
▲ 이탈리아 브라시에 있는 슬로푸드 본부 사무실(왼쪽 사진). 슬로시티는 도시 단위로, 슬로푸드는 개인 단위로 인증을 받는다. 그래서 슬로시티는 그 도시의 시정 방침과 연결되어 있다. /조문환 시민기자

◇삶의 질 먼저, 관광은 따라오는 것 = 과거 대한민국 슬로시티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오해를 했지 싶다. 마음이 급한 지방자치단체는 더욱 그런 면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질보다는 눈에 보이는 관광에 눈독을 들였다. 한 번 잘못 꿰인 단추는 다시 풀지 않는 한 고칠 수 없다. 그 후 10년이 넘게 흘렀다. 나는 가끔 전국 슬로시티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목 놓아 부르짖는다. "관광이 아니라 삶의 질이 먼저라고, 비즈니스가 아니라 무브먼트라고."

잘된 일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이제는 한 방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체질을 개선하고 지속 가능한 정책을 발굴해야 한다. 속성수가 아닌 느리지만 그 열매가 확실한 나무를 심고 성장촉진제가 아닌 땅의 지력을 증진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의 출발점을 슬로시티 운동이라 믿는다. 민간 주도 사회운동이며, 저비용 고효율의 가치를 지니며, 지속 가능한 사회와 사람 중심의 시민운동이기 때문이며, 빠름이 대세인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인간성 회복 운동이기 때문이다.

누가 할 것인가? 언제 할 것인가? 어디서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할 것인가?와 같은 슬로시티 육하원칙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나와 시민이, 지금, 이곳에서, 삶을 바꾸는 일을 쉬운 것부터,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한다. 삶의 질, 더 나은 미래, 건강한 공동체는 '왜 하느냐'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돈 안 되는 것부터, 돈 안 드는 것부터' 해야 한다.

◇마을 만들기 = 마음 만들기 = 어디 슬로시티만 그럴까? 대한민국 대부분의 마을 만들기, 마을개발운동은 거대한 돈 드는 일부터, 돈이 되는 것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 마을이 있다 치자. 이 마을은 그동안 자력으로 500만 원을 모아 민주적인 방식으로 필요한 곳에 써 보지 못했다. 그런데 운이 좋아 사업비 5억 원을 받았다. 제대로 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훈련과 연습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500만 원, 1000만 원, 5000만 원을 써 본 후에 5억 원을 제대로 쓸 수 있다. 초등학생이 근력을 키우려고 제 몸무게보다 무거운 아령을 들고 운동하는 격이다. 몸 다치기 십상이다. 마을 운동도 그렇다. 마을 만들기는 마음 만들기인데 오히려 그 돈으로 마음 다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 있다.

마을 만들기를 제대로 된 슬로시티 운동에 대입하면 답은 나온다. 목적이 같고 방향이 같기 때문이다. 나는 육하원칙 중 다섯 번째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슬로시티 이념과 정신과 철학을 철저히 공부하자,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자,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부터 하고, 아주 쉬운 것부터 하자, 슬로시티 운동에 미칠 수 있는 사람을 찾자, 결국 이것은 지역사랑이요 이웃사랑으로 연결될 것이다"라고.

▲ 좁은 골목길을 시속 20㎞로 제한하고 있다. 거꾸로 세워진 교통표지판 '20'이 속도만을 의미하지 않아 보인다.  /조문환 시민기자
▲ 좁은 골목길을 시속 20㎞로 제한하고 있다. 거꾸로 세워진 교통표지판 '20'이 속도만을 의미하지 않아 보인다. /조문환 시민기자

◇인간과 마을 본연의 가치 회복 = 슬로시티를 이탈리아 제품이라고 오해하지 말자. 한국식, 우리 동네식 슬로시티가 돼야 한다. 생태와 환경, 라이프스타일, 전통의 계승, 건강한 먹거리와 같은 인간 본성과 느림의 미학이 어디 이탈리아만 해당하는가?

정말 느린 도시는 굳이 슬로시티를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서울과 부산 등 빠른 도시가 슬로시티를 선언해야 한다. 지금 한국은 그 반대다. 도시 브랜드를 생각한 결과다. 슬로시티는 도시브랜드 가치보다는 삶의 가치에 목적을 둔다. 느림은 단지 자동차를 느리게 운전하거나 게으르게 살자는 운동이 아니다. 느림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 인간성과 신의 성품이 내재해 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삶이 슬로라이프가 아니고 그 도시가 슬로시티라 불리지 않듯이 말이다.

대한민국 지역이 위기다. 더 정확히 농촌과 마을이 위기다. 그러기에 나는 마을이 기회를 잡았다고 믿는다. 위기라는 말에는 기회가 포함돼 있다. 이 절호의 기회를 잡은 전국의 모든 지역과 자치단체가 슬로시티적 가치를 덧입기를 바란다.

한 슬로시티 주민강의에서 이런 말로 마무리를 했다. "대한민국 모든 자치단체가 슬로시티가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이것은 삶의 질 문제요 지속 가능성의 문제와 닿아 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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