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국어사전을 다 읽어보려고 애쓰던 시절이 있다. 단어가 일러주는 곳에 도착해 한참을 서성였던 기억도 아득하다. 간절과 무관과 은밀 같은 말들의 나라로 가서 한동안 자취를 감춘 적도 있다.

얼마 전이다. 내 남쪽 골방 책더미에서 오래 파묻혀 있던 국어사전이 튀어나왔다. 수십, 수백 년 묵은 말의 냄새가 고스란했다.

사전을 되찾고 나서 나는 밤마다 조금씩 더듬더듬 읽는다. 시 같고 소설 같고 사서 같고 법전 같고 경전 같다. 이 정확한 말과 말들 사이에서 감정과 감각과 사유와 사실도 또렷해진다.

모든 것이 앓고 있는 세상의 한밤중에 찬찬히 읽어보며, 말에 묻은 세월을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고통과 여름과 음악을 지나 한참을 더 가면, 사전의 맨 뒷자리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국어사전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 그때는 온갖 희로애락을 건너가는 이 고단하고 힘겨운 세계에도 빛이 들어야 할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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