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 기리는 운암영당
영정 여러 차례 옮겨다닌 사연
동자 그림 덧칠해 감춘 비밀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운암영당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도롯가 표지판을 보고 차를 멈췄는데, 길 입구 샘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위로 야무진 지붕을 이고 있는데, 이름은 감천(甘泉)입니다. 뒤편 담벼락 시멘트에 '단기 4294년 음력 2월 23일 수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시멘트가 굳기 전에 글자를 새긴 거네요. 단기 4294년이면 서기 1961년입니다. 글자 아래 다시 작은 대리석 조각으로 더 자세히 내력을 적어놨습니다.

"위 글은 최규환(1895~1964)님이 새긴 글로 정자나무와 은행나무가 잘 어우러진 샘으로 물맛이 좋아 감천이라 하였다. 2015년 5월 24일 중수(重修)."

1961년 최규환이란 분이 처음 지금처럼 샘물의 틀을 잡았고, 2015년 다시 한 번 수리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소소한 내력 덕분에 샘물을 다시 한 번 둘러보게 되네요. 대리석 글을 보고서야 샘물 뒤편으로 정자나무와 은행나무가 나란한 게 보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티가 그렇게 나진 않지만, 한여름 두 나무가 어우러져 만든 그늘이 무척 시원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샘물이 맑아서 참 좋습니다. 바라보는 것만 해도 정신이 선명해지네요.

▲ 운암영당에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 영정./하동군
▲ 운암영당에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 영정./하동군

◇최치원 초상화에 담긴 비밀 = 운암영당(雲巖影堂)까지는 샘물에서 50m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천재 학자이자 관료인 고운 최치원(857~?)의 영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롯이 최치원을 위한 사당이라고 하겠습니다.

최치원 영정은 그동안 여러 차례 옮겨다녔는데요. 1700년대 경주 서악서원에 최초로 봉안됐는데, 이후 사본이 정읍 무성서원과 하동 옥천사(쌍계사 전신) 앞 학사대에 있었답니다. 학사대가 쇠락하자 1775년(영조 51) 즈음 당시 쌍계사 봉래각으로 옮깁니다. 이걸 다시 지역 유림이 나서 1825년(순조 25) 화개면 덕은리 영당마을에 금천사(琴川祠)를 짓고 봉안합니다. 하지만,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하동향교에 임시로 보관되다가 1902년(고종 39) 횡천영당(橫川影堂)을 지어 옮깁니다. 그러다 관리가 힘들자 1924년 지금 자리에 있는 운암영당으로 모셔옵니다.

현재 운암영당에는 고운 최치원 영정과 면암 최익현 영정이 있습니다. 최익현은 최치원 영정을 횡천영당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한 이입니다. 대원군의 단발령에 반발하는 상소도 올리고, 항일 의병도 일으킨 조선 후기 대표적인 지사(志士)지요. 두 영정 모두 경상남도 문화재입니다. 원본은 다 국립진주박물관에 있고요. 지금 있는 건 사본입니다.

최치원 영정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영정은 근엄한 유학자의 모습입니다. 엑스레이로 찍어보면 최치원 오른쪽으로 쌓인 책 뒤에 동자(童子)들이 보입니다. 누군가 동자 그림을 책 그림으로 덮어버린 거죠. 동자와 함께하는 최치원은 영락없는 신선의 이미지인데요. 사실 최치원은 유교뿐 아니라 불교, 도교에도 통달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자신들이 추앙하는 최치원이 오롯이 유학자로서만 추앙되길 바랐나 봅니다. 쌍계사에 있던 그의 영정을 빼내와 따로 사당을 지어 봉안한 것도 그런 이유였겠죠.

운암영당은 크진 않지만, 제법 건축에 정성을 들인 사당입니다. 대문채부터가 독특합니다. 솟을대문 위에 누각을 세웠습니다.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공루(空樓)라는 건축 형태입니다. 전통 양식과 일본 방식이 섞인 근대 한옥 양식이죠. 대문채 뒤로 운암강당이 조용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운암영당 앞은 탁 트인 풍경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풍경보다는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

▲ 이명산 편백숲./이서후 기자 <br /><br />
▲ 이명산 편백숲./이서후 기자
 
▲ 이명산 편백숲./이서후 기자 <br /><br />
▲ 이명산 편백숲./이서후 기자
 

◇양보면에 숨은 풍경들 = 운암영당을 나와 주교천을 따라 달리다 보면 한다사중학교가 나옵니다. 2016년 개교한 경남도교육청 공립 기숙형 거점 학교라는 뭔가 거창한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기숙형 학교라니 건물이 아주 현대적이고 큽니다. 한다사(韓多沙)는 신라 경덕왕 16년(757년)까지 쓰던 하동의 옛 이름입니다.

한다사중학교에서 200m 마을로 걸어 들어가면 일제강점기에 지었다는 장암리 정씨 고택이 나옵니다. 고려 말 정치가이자 학자 포은 정몽주(1337~1392)의 후손이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본채는 최근에 새로 지었네요. 그 옆으로 작은 근대 한옥 두 채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차라리 인상적인 것은 건물보다 정씨 고택을 둘러싼 높은 흙담입니다. 고즈넉하니 좋아서 몇 번을 왔다갔다했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 이런 작은 시골마을에 숨어 있는 멋진 빵집 앞을 지납니다. 양보면에 있어서 그런지 양보제과란 이름입니다. 돌담에 둘러싸인 단층 양옥을 예쁘고 고쳤습니다. 전혀 모르고 갔다가 만난 뜻밖에 즐거움입니다. 빵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 있네요.

다시 길을 나서 찾은 곳은 가지런한 계단식 논을 지나 단정한 집들이 인상적인 통정리 서제마을입니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마을 위 이명산으로 들어가는 임도를 쭉 따라 한참을 가면 멋진 솔숲 끝에서 조그만 편백숲을 만납니다. 정승(政丞)의 숲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양보면 출신 정영의 전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부친이 아들이 태어난 날을 기념해 편백 100여 그루를 심으면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재무부 장관이면 조선시대 정승에 해당하기에 정승의 숲이 됐다고 합니다. 지금도 좋은 기운을 받아가려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입구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란 안내판이 있습니다. 맨발로 걷기 좋도록 길이 푹신합니다. 편백숲 산책로는 골짜기 아래로 지그재그로 이어집니다. 편백숲은 골짜기 주변으로 옹골차게 들어서 있습니다. 숲이 크진 않아 산책로는 짧습니다.

하지만, 길은 벗은 발이 다양한 자극을 받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맨발로 걸으면 걷는 속도가 느릴 테니 숲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질 테지요.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돌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잠깐 그 상쾌함을 음미하다 돌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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