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결속시키는 힘, 노래와 춤, 그리고 그림

언젠가는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여행지가 하나 있다. 유럽 대륙의 북쪽 핀란드 바로 아래 발트해를 북서로 끼고 있는 에스토니아라는 작은 나라다. 이 나라 수도인 탈린에서 5년마다 성대한 노래 축제가 열린다.

에스토니아 말로는 '라울루피두(Laulupidu)'라고 부른다. '노래 잔치'라는 뜻이다. 전국 각지에 있는 합창단들이 이 축제에 참여하려고 이동하는데, 그 규모가 실로 대단하다. 최대 3만 명까지 오를 수 있는 무대와 8만 명까지 수용하는 무대 앞 공원을 합하면 모두 11만 명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에스토니아의 전체 인구가 약 130만 명인데 그중 8.5%가 한자리에 모이는 셈이다. 경남에 빗대면 전체 인구 335만 명 중 28만 5000명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 축제는 1869년에 시작됐으니 2019년이면 150주년이 된다. 그 역사와 내용을 높이 평가해 2003년에는 유네스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했다.

1934년부터는 '탄추피두(Tantsupidu)'라는 이름의 '춤잔치'도 함께 열리고 있다. 각 도시를 대표한 포크댄스팀 수백 명이 운동장에 모여 음악에 맞춰 군무를 춘다. 역대 댄서 중 최연소자는 네 살 꼬마였고, 최고령자는 일흔여섯의 노인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댄서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 축제에 댄서로 참여하는 숫자만 평균 8000명이고 가장 많을 때는 1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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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합창축제 라울루피두 전경(2009년)./출처: 공식 홈페이지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의 노래와 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춤과 노래를 좋아할까? 수많은 장르 중에서도 왜 하필 합창에 집착할까? 엄청난 규모의 합창 전용 스타디움을 세우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합창제를 150년 가까이 이어오는 이유는 뭘까? 각 지역 대표 수백 명이 운동장에 모여 군무를 추며 화려한 퍼포먼스를 표현하는 이유는 뭘까? 에스토니아 민족의 전통이라서 그럴까?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타고난 것일까?

이런 궁금증에 답을 얻으려면 먼저 이 합창제가 시작된 19세기 말을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이때는 북유럽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른바 '국민악파'라고 하는 민족주의 음악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러시아의 림스키 코르사코프,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체코의 스메타나 등이 맹활약하던 시기다.

사실 국민악파라는 음악 사조도 거대한 흐름 속에 존재한 하나의 현상이었다. 당시는 유럽 전체가 계몽주의 사상에 세례를 받은 후 저마다 국민국가 건설에 열을 올릴 때였다. 이른바 민족(Nationality)이라는 개념이 확산되면서 유럽 전역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에스토니아에서도 이때 '에스토니아 민족 각성 운동(Estoniannational awakening)'이 일어난다. 에스토니아어로 된 신문과 책들이 발간됐고, 정치운동도 전개돼 독일과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민 국가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때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요한 볼데마르 얀센이 합창제를 기획했고, 그의 딸 리디아 코이둘라가 첫 번째 라울루피두를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단순한 노래발표회가 아니라 '민족 각성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울루피두에서는 이른바 세계인이 다 아는 합창 명곡들을 들을 수 없다. 오늘날 에스토니아를 있게 한 시인들의 시와 음악가들의 노래가 주로 불린다. 춤도 마찬가지다. 특정 댄스 장르 겨루는 경연대회가 아니라 지역별 공동체 춤을 선보이는 축제다. 한 때 에스토니아를 지배했던 소련이 라울루피두에서 민족성 강한 노래를 금지했지만, 축제가 끝날 때면 늘 '나의 조국, 나의 행복과 기쁨'(현재 에스토니아 국가)이 지휘자가 아닌 청중들의 의지로 불려졌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 노래는 단순한 여가활동이 아니었다. 노래는 공동체를 수호하고 또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원이었다. 소련이 해체되는 와중에 에스토니아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무장폭력 대신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을 일으켰다. 진원지는 물론 라울루피두였다. 그리고 1989년 8월 23일 히틀러와 스탈린이 발트 3국의 소련 지배를 포함한 비밀 불가침 조약을 맺은 50주년 되던 날 북쪽 에스토니아 탈린에서부터 남쪽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발트 3국 국민이 650킬로미터를 인간띠로 잇고 함께 노래 부르는 장관을 펼쳤다. 이 평화적이면서도 강력한 모습이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에스토니아는 1991년 8월 20일 소련 연방에서 가장 먼저 독립하는 나라가 됐고, 곧이어 라트비아와 루티아니아가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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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춤축제 탄추피두(2014년)./출처: 공식 페이스북

노래와 춤으로 보는 공동체의 정체성

인류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저마다 노래와 춤으로 정체성을 확인해왔다. 노래에는 공동체의 중요한 이야기와 사건을 담았고, 춤에는 공동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동작을 담았다. 이는 도시 문명 여부와 무관하게 공동체라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족 베두인들도 부족마다 노래와 춤이 있고, 유럽의 여러 지역을 다녀봐도 도시마다 자기 노래와 춤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춤은 왈츠니 폴카니 탱고니 하는 사교 댄스와는 다르다. 이들 댄스는 상당히 표준화되어 있기에 특정 지역이나 공동체의 정체성을 나타내기는 어렵고, 오히려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드러내는 데 활용된다. 따라서 도시와 지역에 뿌리를 내린 춤은 단순 사교 댄스가 아닌 공동체 댄스라고 정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이런 노래와 춤이 일반적이었다. 지역마다 노래가 있었다. 민요가 대표적이다. 아리랑만 해도 남북을 통틀어 60여 종이 있고, 풍물 장단도 지역별로 다르지 않던가. 노래와 장단이 다른 만큼 춤도 달랐다. 북춤도, 탈춤도 지역마다 달랐다. 어떤 노래를 부를 줄 알고, 어떤 춤을 출 줄 아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이 드러났다. 또 축제 같은 의식을 통해 노래와 춤은 정기적으로 반복되며 공동체를 결속하는 핵심 코드로 활용됐다.

노래와 춤의 공동체적 에너지는 대중매체에서도 종종 활용된다. 2013년 화제드라마였던 tvN의 <응답하라 1994> 10화에 민중가요 '바위처럼'이 나와 한동안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삼천포시와 사천군 간에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시위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데모송으로 이 노래와 함께 특유의 율동을 선보여 비슷한 시기를 통과한 시청자들의 정서를 강하게 일깨웠던 것이다. 일정한 규칙과 순서에 따라 함께 몸을 움직이는 공동체 춤은 구성원을 강력하게 결속시키는 도구가 된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노래와 춤을 입은 스토리가 얼마나 힘이 센 지는 아일랜드 사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제임스조이스학회의 최석무 교수는 "영국인들이 아일랜드를 800년 가까이 지배하면서 고유 언어인 게일어까지 말살했지만, 정작 문화적으로는 아이리시(아일랜드 사람)들을 두려워 했다"고 말한다. 분명히 개신교인 영국인이 가톨릭인 아일랜드로 건너가 정착한 경우에도 얼마 가지 않아 아이리시 문화에 동화되는 사례가 허다했고 심지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실질적인 자기 조국 잉글랜드에 저항하기까지 하는 영국인도 등장했단다.

그 바탕에는 아일랜드의 각 지역마다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오는 노래와 케일리(Ceili)라는 공동체 춤이 있었다. 아이리시들의 대표적인 공동체 공간인 펍(Pub)에서 이들 노래와 춤은 지금도 매일 반복되고 있다. 일상 언어는 비록 영어를 쓰게 됐지만 게일어로 된 노래 수백 혹은 수천 곡과 그 노래에 맞춰 2~16명이 함께 추는 케일리를 통해 그들은 아이리시 정체성을 몸속 깊숙이 각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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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선수들을 향해 You will never walk alone을 부르고 있는 팬./출처:공식인스타그램

그림과 공동체

노래와 춤 만큼이나 인류가 자기 공동체를 확인하기 위해 활용한 방법은 바로 '그림'이었다. 기원전 3만 2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남부 쇼베 동굴벽화에는 코뿔소와 사자, 말 등의 동물들이 살아 있는 듯 세밀하게 그려져 있고, 이들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가들의 손바닥 도장도 마치 인장처럼 구석에 찍혀 있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와 같은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사람이나 동물뼈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봐 일상 공간이 아닌 제의 공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알겠지만, 그리기는 일종의 본능이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펜을 쥘 수 있게 되면서부터 아이는 그리기 시작한다.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부모의 얼굴을 그리고,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나무와 구름을 그린다. 그린다는 것은 개념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존재를 단순화시켜 정체성을 부여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원시부족들은 그림 그리기를 중요한 공동체 활동으로 여겼다. 신적 카리스마를 부여 받은 이 외에는 아무나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그림을 보수하고 갱신할 때도 신성한 의식을 치렀다. 그림이라는 매개를 통해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관계를 설정하고 대화했다.

오늘날 이 그림은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됐다. 공동체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저마다의 문장(紋章)과 특정한 색상으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공동체와 구분하는 전략을 취한다. 기를 만들어 내걸기도 하고 보도블록이나 가로등 같은 거리 디자인에 적용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다양한 형태의 로고디자인도 경쟁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 디자인은 축제 같은 중요한 이벤트가 있을 때 도시 전체를 뒤덮으며 시각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2000년대 중반 공공미술이 세간에 주목을 받은 것도 그림이 도시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통영 동피랑을 비롯해 동해 묵호항의 논골담길, 대전의 대동 벽화마을 등이 성공사례로 알려지면서 웬만한 도시의 골목길 한두 군데에는 벽화가 그려지고 있다. 사후 관리와 주거권 침해 문제도 지적되고 있지만, 그림 하나가 도시 분위기를 크게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와 같은 움직임은 당분간은 지속될 것 같다.

시민이 선택하는 노래, 춤, 그림

노래와 춤, 그리고 그림이 도시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이야기 도구라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도시 마케팅이니, 도시 스토리텔링이니 하는 전문용어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모든 도시는 노래(시민의 노래)와 율동(체조도 포함), 그리고 디자인을 만들었다. 다만 우리나라만으로 범위를 좁혀볼 때 이런 활동들은 다분히 '관주도'였다. 중앙정부가 파견한 단체장이 이들 상징들을 일방적으로 만들어 시민들이 따르게 한 것이었다. 강제 동원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자발적인 호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19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이후에도 이런 관행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선거를 통해 단체장이 뽑히기는 했지만 일방적인 분위기는 여전하다. 특히 도시 마케팅이란 개념이 확산되면서 도시 공동체의 통합과 결속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대외적인 성과를 올리거나 결과물을 내놓는 데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창원시는 2011년 6월에 3개 도시 통합 1주년을 기념해 시민을 위한 노래 '우리는'과 '알랴뷰 창원'을 발표했지만 이 노래들을 기억하는 시민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하다. 2013년 12월 마산 성호동과 추산동 일대에 '가고파 꼬부랑길'이라는 이름의 벽화골목이 생겨 수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왜 그 자리에 그 그림들이 그려져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들은 적이 없다. 2015년에는 창원문화재단이 창원시의 문화정책 비전으로 '대한민국 음악도시 창원'을 제시하고 1만 명이 함께 하는 합창을 계획했지만, 마찬가지로 왜 1만 명이 모여 노래해야 하는지, 노래를 한다면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지에서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노래와 춤, 그리고 그림과 같은 문화예술활동은 분명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를 움직이고 결속시키는 것을 원한다면 일방적이어서는 곤란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합창곡을 시민 전체가 부른다고 해서 도시 정체성이 생기지는 않는다. 세계적인 댄스페스티벌을 유치했다고 해서 시민들의 공동체성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도시 전체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넣으면 어떻게 될까? 해외토픽에 잠깐 소개되고 곧이어 관청은 온갖 민원의 홍수에 시달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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