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선택한 음식이 도시의 이야기가 된다

부산 영도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고구마가 시범 재배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 39년(1763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가던 조엄(趙)이 쓰시마섬에서 고구마를 맛본 뒤 구황식물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판단해 영도에 심어보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엄은 쓰시마섬과 기후 조건이 유사한 영도에 먼저 심어보고 성공하면 거제와 제주에 심을 것을 명했다고 한다.

조엄은 통신사로 일본에 가기 전에 동래부사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서 부산 지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동래부사 강필리는 선임자의 뜻을 받들어 직접 배를 타고 영도에 여러 차례 건너가 고구마 작황을 점검했다고 한다.

이때 고구마 재배 경험을 정리한 <감저보(甘藷譜)>가 1766년에 제작됐지만 안타깝게도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감저'는 고구마란 이름이 아직 없을 때 부르던 명칭이다. 다행히 조엄과 강필리의 노력이 성공해서 오늘날 고구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요한 식량 또는 기호식품 중에 하나가 됐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외래 식물 중에 문익점의 목화씨 말고 조엄의 고구마만큼 분명한 유입 경로를 갖고 있는 것들이 또 있을까? 인물도 분명하고 시기도 뚜렷하다. 심지어 쓰시마섬에 고구마가 유입된 경로도 이미 밝혀져 있다. 조엄이 영도에 고구마순을 가져오기 50여 년 전에 쓰시마 사람 하라다 사부로에몬(原田三郞右衛門)이 먹을 것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고향 주민들을 위해 가고시마에서 몰래 고구마를 빼돌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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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로 쓰시마섬에 들렀다가 고구마를 전한 조엄 선생./위키피디아

쓰시마섬이나 영도나 모두 주민의 구황을 위해 고구마를 공수해서 재배에 성공한 사례다. 그래서 쓰시마섬에서는 효자 노릇을 했다는 뜻으로 '고코이모(孝行芋)'라 불렀는데, 이 발음이 조선에 그대로 들어와 '고구마'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래된 이야기 vs 새로운 이야기

고구마의 기원을 따지는 이런 이야기는 '오래된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 지금처럼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21세기 들어서부터다. 여전히 대다수에게 이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다. 물론 없던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닐 테다. 역사 연구자들과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이 뒷받침 됐으니 이 정도도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조엄이 학문의 영역에서 공공의 영역으로 호출되고, 그와 관련한 고구마의 유래가 이런저런 콘텐츠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것은 현대 도시가 이런 것들을 원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제와 세계화의 바람 속에서 도시 마케팅과 경쟁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다른 도시에는 없는 것, 우리 도시에만 있는 것들이 발굴되어 다듬어지고, 치장됐다.

사실 우리나라 고구마 시장에서 부산 영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 옛날부터 지어오던 고구마밭이 영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리로 연결되고 대도시로 편입되면서 영도 고구마는 산업적인 의미를 잃고 그저 개인적인 소일거리나 주전부리 정도로 축소됐다. 하루가 다르게 도시화되는 영도땅에서 고구마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런 영도 고구마가 명맥이 끊기지 않고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1983년 부산 동래구에서 영도구로 시집온 황외분씨(53) 덕분이었다. 남편이 운영하는 건축자재 회사의 인부들에게 황 씨는 간식으로 고구마를 제공했는데, 인부들이 매번 나오는 찐 고구마에 싫증을 내자 다양한 요리법을 연구하게 됐고, 그 결과 2013년 영도구 마을기업으로 조내기고구마(주)가 이어지고 있다.

'조내기 고구마'는 영도 토종 고구마의 다른 이름이다. 이름에 대한 설이 여러 가지지만, 조엄 선생이 가져왔다 해서 조내기라 부른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상대적으로 알이 작고 짙은 붉은색 껍질에 밤맛을 낸다.

황 씨가 고구마 요리법에서 조내기 고구마 종자 자체로 관심을 옮기게 된 것은 10여 년 전 시장에서 조내기 고구마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였다. 시장에서 고구마를 팔던 할머니는 수지가 맞지 않는 영도 토종 고구마를 포기하고 알이 큰 다른 지역 고구마를 가져다 팔고 있었다. 황 씨는 조내기 고구마 종자의 행방을 캐물었고, 다행히 할머니 집에 널브러져 있던 종자 고구마를 모조리 사들였다.

이때부터 황 씨는 조내기 고구마 지킴이로 나섰다. 영도에서 조내기 고구마 종자를 갖고 있다는 집은 모두 찾아가서 사 모았다. 영농기술이 없어서 종자 고구마가 썩어 나가자 농촌진흥청에 직접 연락해 전라도의 토굴을 추천받았고, 부산과 그곳을 오가며 겨우내 보관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상표는 물론이고 새로운 조리법이나 시제품이 나올 때마다 자비를 들여 특허 등록을 했다. 당장은 돈이 안 되더라도 대기업이든 외국기업이든 뺏기지 않겠다는 일념에서였다.

황 씨의 노력에 부산 영도구도 호응했다. 2011년에는 영도구가 직접 중재에 나서 1만 3,000㎡에 달하는 사유지를 조내기 고구마 경작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2015년 2월에는 영도구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데크에 '조내기 고구마를 짊어진 농부'상을 세웠다. 동시에 고구마 전래와 관련한 학술 활동을 지원하고 시배지 일원에 대규모의 '고구마 역사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황 씨는 2013년 5월 주민들과 함께 마을기업 '조내기고구마(주)' 설립해 조내기 고구마를 재료로 한 분말, 캐러멜, 젤리, 국수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2014년 6월에는 부산시가 선정한 '부산지역 관광상품'에, 10월에는 안전행정부가 선정한 '10대 우수마을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4년 6월에는 부산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고구마 캐러멜이 특선 수상했고, 10월에는 안전행정부가 주최하는 '전국 10대 우수마을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같은 지역 마을기업인 제과점 '꿈꾸는 파티쉐(주)'와 함께 '조내기빵'을 개발해 시판하고 있다.

도시 속의 향토음식

도시의 대표 음식을 만들고 싶어 하는 영도구는 환상적인 3박자를 갖췄다고 평가할 만하다. 첫째는 역사적인 자산이고, 둘째는 열정적인 혁신가의 존재, 그리고 셋째는 도시 정부의 강력한 의지다. 이 정도면 타 도시의 부러움을 살 만하고, 성공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 보인다.

황 씨의 '조내기고구마'와 동네 빵집 '꿈꾸는 파티쉐', 그리고 지자체인 영도구가 함께 지향하는 바는 경주의 황남빵과 통영의 꿀빵처럼 부산 영도를 대표하는 음식을 빠른 시일 안에 개발하는 것이다. 지역 특산물과 동네 빵집의 협업으로 새로운 스타 음식을 탄생시킬 수 있다면 멋진 스토리가 될 것이란 기대도 감추지 않고 있다.

미리부터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음식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려는 영도구의 노력은 일단 의미 있는 접근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고,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먹지 않는지, 또 먹더라도 어떻게 요리해서 먹는지가 저마다의 문화와 정체성을 구별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음식은 지역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니 있었다. 과거에는 그랬다. 지역의 기후와 지형, 그리고 풍토에 따라 자라는 생물이 다르고, 그것을 식재료로 만들어지는 음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는 해산물이, 산이 가까운 곳에서는 산나물과 밭작물이, 평야가 넓은 곳에선 곡물들이, 농경이 어려운 곳에선 가축과 유제품이 주요 식재료가 됐다.

물론 자연환경이 전부는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공동체가 선택한 조리법도 공동체를 구분하는 중요한 변수가 됐다. 같은 재료라도 익히는지, 굽는지, 절이는지, 삭히는지에 따라서 음식은 달라진다. 첨가되는 식재료에 따라서도 맛과 향이 달라진다. 김치에 들어가는 젓갈만 봐도 출신 지역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엇을 먹는지를 살피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 시점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과연 음식으로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대부분은 이미 지극히 현대적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도시는 더 이상 자연환경과 지형, 그리고 식재료로 구별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 만에 전국 어느 도시든 도착할 수 있는 도로망이 깔려 있고, 몇 개의 브랜드 아파트 단지들이 획일적인 주거환경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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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맛 아귀찜. 도시가 아무리 획일적으로 변해도 시민들은 자기 도시만의 맛을 지키고 싶어한다./경남도민일보DB

거미줄 같은 유통망을 따라 빅데이터까지 갖춘 물류가 흐르고 있다. 다국적 식품 기업은 물론이고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음식 사업에 뛰어들면서 어느 도시를 가나 동일한 점포와 맛을 경험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대중매체와 소셜미디어가 짝을 이뤄 전국을 동시 패션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서울 홍대 입구에서 유행한 음식이 경남의 중소도시에 전파되는 시간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도시화된 향토 음식 또한 그 욕망이 대기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됐다. 아무개 예능이나 먹방 프로그램에 소개라도 되면 금세 전국에서 손님들이 몰려들고, 그 유명세를 등에 업고 서울 입성을 꿈꾸거나 프랜차이즈 시스템에 노크한다. 드물게 성공할 경우 표준화된 맛과 매뉴얼화된 서비스가 전국 도시에 보급된다. 이때 그 음식은 과연 아무개 도시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포우리만두'를 인천의 맛이라 할 수 있을까? '교촌치킨'을 대구 통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음식 역사의 다섯 시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인문학자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음식인문학>이라는 책에서 "식사로서의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의 음식은 인문학"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섭취하는 음식 속에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도시에도 이 관점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시민들이 섭취하는 음식과 즐기는 식문화 속에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즉 도시의 정체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 교수는 20세기의 한국 음식이 식민주의와 전통주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세계 체제와 세계화 담론이 혼종된 결과라고 봤다. 그는 한국 음식사를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눴는데, 첫 번째는 강화도 조약 이후 서양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이 한반도에 대거 유입돼 외국 음식이 한반도에 유통되기 시작한 1880년대에서 1900년대를, 두 번째는 도시에 조선요리옥 같은 근대적인 외식업이 자리 잡기 시작한 1900년대 이후부터 1940년대를 꼽았다. 세 번째 시기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로 많은 사람들이 부득이하게 이동하게 되면서 각 지역의 향토음식이 다른 지역에 따라 전파됐고, 네 번째 시기는 도시화와 이농이 본격화된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도시인들을 겨냥한 향토음식점들이 도시 번화가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시기는 1990년대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원형이 만들어진 시기다. 주 교수는 이 시기를 거치며 한국인의 삶 자체가 이전 시대와 완전히 달라졌다고 평가한다. 전국적으로 아파트가 대량 공급되면서 아파트 상가를 중심으로 배달음식점이 급격하게 성장했고, 80년대 다국적 식품기업의 성공에 자극받은 국내 음식점들이 빠른 속도로 프랜차이즈화 되어갔으며, 대기업마저 음식 사업 전반에 뛰어들면서 지역별, 도시별 음식문화가 획일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이런 흐름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 음식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외국 음식과 비교하면서 한식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음식 민족주의'가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주 교수의 판단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1990년대 음식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관찰-추적-해석

다시 조내기 고구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도구의 조내기 고구마 프로젝트를 주 교수 관점에서 비평한다면 일종의 '음식 지역주의'라고 볼 수 있다. 영도구가 지역 음식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학술적인 근거를 찾고 다른 지역 음식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박이보다 이주민이 훨씬 많은 도시에서, 오래 정착하기보다는 언제 이주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도시에서 '우리 지역 음식의 우수성'을 앞세우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음식 지역주의는 현대 도시의 정체성을 찾는 데 과연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영도구의 프로젝트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토종 종자를 보유한 마을기업 조내기고구마(주)와 동네빵집인 꿈꾸는파티쉐(주)를 연결해 '조내기빵'이라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는 과정은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조내기 고구마가 우리나라의 조상 고구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자들이 조내기빵을 찾지는 않겠지만, 조내기빵이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게 된다면 조내기 고구마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든든한 마케팅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음식은 이야기가 아니라 맛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다. 향토음식이라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찾는 맛이 획일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같아지고 싶은 마음 못지않게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음식에서도 획일적인 맛 못지않게 나만의 혹은 우리 도시만의 개성 있는 맛을 즐기고 싶어 한다. 제아무리 화려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많아져도 마산 아귀찜, 동래 돼지국밥, 영광 보리굴비 같은 지역 고유의 전통 음식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1990년대 이후 획일화된 도시 환경 속에서도 자기 도시를 대표할 새로운 음식문화의 출현을 기대해도 될까? 비록 식재료의 원산지와 지형 및 기후 조건이 더 이상 의미 없는 도시 속에서 대부분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지만, 시민들은 끊임없이 자기 도시를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음식문화를 지금도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추정이 타당하다면 현대 도시에서 등장할 새로운 음식문화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 봐야 할 것이다. 특정한 조건이나 전문가적 당위로 미리 제약을 두기보다는 시민들이 역동적으로 자기 음식을 선택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부산 영도구처럼 확실한 음식 자산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도시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다만 그 역할은 어디까지나 시민들의 역동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이 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음식문화의 역동성은 새로운 맛의 탄생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으로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주어진 도시 환경에서 새롭게 개발되는 다양한 맛을 관찰하는 한편 시민들이 그 맛에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이는지를 주의 깊게 추적할 필요가 있다. 그 현상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서 비로소 도시의 음식 스토리텔링이 출발한다. 도시의 음식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이유는 관광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살아가는 시민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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