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지 않게 하는 경건한 공간

세월호가 침몰한 지 1년이 다가오던 2015년 4월 9일에 세계적인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의 아들 션과 손녀 엠마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전남 진도의 팽목항에서 가까운 곳에 '세월호 기억의 숲'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션과 엠마, 그리고 헵번 가족들은 노란 리본과 넥타이, 그리고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션은 70년대 말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한 인연으로 한국 사정에 늘 관심을 가져 왔고,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뜻을 잇기 위해 세운 '오드리헵번어린이재단'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트리플래닛'이라는 한국의 사회적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트리플래닛은 전 세계에 나무가 필요한 곳에 숲을 조성하자는 사회혁신기업으로 유명인과 기업의 기부를 받아 그들의 이름을 딴 숲을 조성하고 있다.

경건한 공간에 대한 열망

션이 트리플래닛에 먼저 연락해온 건 2014년 5월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세월호 기억의 숲에 대한 아이디어가 오갔고, 1주년이 되는 시점에 숲 조성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됐다. 관계자들은 기자회견 이튿날인 10일 진도 팽목항에서 4.16km 떨어진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 무궁화 동산에서 착공식을 가졌다.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 세계적으로 이름 난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니 한편으론 고마웠으나, 정작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우리 정부의 무관심과 태만이 비교돼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션이 조성하고 싶어 하는 기억의 숲은 앞선 글에서 도시 스토리텔링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정의했던 바로 그 '경건한 공간'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나아가 더 강하게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은 열망이 경건한 공간을 만들게 한 것이다.

경건한 공간이 갖는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 그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일정한 시기마다 의식과 관련 프로그램이 거행되면 그 이야기는 더 이상 과거에 묻히지 않고 일상 속에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공간에 대한 이 같은 열망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현재를 살아갈 때 가능한 한 살아가는 '의미'와 '방향'을 찾고 싶어 한다.

경건한 공간은 역사적으로 도시의 지배 권력이 자기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성해온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새로운 권력은 이전 권력이 조성한 경건한 공간에 대해 대체로 무자비했다. 그러나 지배 권력이 민주화되면서 도시의 경건한 공간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도 팽목항 근처에 조성되고 있는 '세월호 기억의 숲'도 지배 권력이 아닌 민간이 주도하는 경건한 공간이다(세월호 기억의 숲 조성과 관련해 주최측과 진도군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진도군은 세월호 이미지가 부각되는 것이 진도의 이미지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도 도시의 지배 권력뿐만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는 경건한 공간들이 제법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지고 있다. 그 공간을 누가 만들고 있는지, 그 공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면 그 도시의 속살과 고갱이를 간파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지역에서 어떤 경건한 공간을 열망하고 있을까?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가 문화재가 되기까지

경남 창원시를 중심으로 도시 구성원들이 주목해야 할 경건한 공간들을 살펴보자. 먼저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려져 있다시피 김주열은 1960년 3월 15일 1차 의거 때 행방불명됐다가 27일 뒤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올랐다. 이 장면에 분노한 마산시민은 곧바로 2차 의거를 일으켰고,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장소, 김주열이 떠올라 대한민국을 바꾼 바다는 더 이상 기억되지 못하고 매립돼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김주열을 기억하는 사람들(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이 힘을 모아 마산중앙부두에 처음 표지판을 세운 게 2002년 4월이었다. 이들은 2001년부터 줄기차게 김주열로, 김주열거리를 제정하고, 인양지에 표지석을 세워줄 것을 마산시에 청원했지만, 당시 도시 권력은 3·15 의거 때 죽은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핑계를 내세워 이 제안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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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지정문화재로 등록된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경남도민일보DB

김주열 열사 기념사업에 대한 지역 여론이 잠시 일어난 건 2006년 3월이었다. 그 시기에 김주열의 고향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 있는 김주열 묘소에서 남원시장과 시의회 의장, 지역 국회의원 등 지역의 권력 엘리트들이 모두 참여하는 추모행사가 열렸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국비와 도비, 그리고 시비를 합쳐 10억 원에 달하는 기념사업 예산을 확보하고 묘소 성역화와 생가복원 사업을 펼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소식이 마산에 알려졌지만 더 이상 여론은 확산되지 못했고, 시 당국의 무관심도 그대로였다.

인양지의 성역화 사업에 다시 힘이 실리기 시작한 건 2010년 9월이었다. 그해 7월 경상남도의 정치권력이 김두관으로 대표되는 민주 세력으로 교체됐다. 추모사업회는 9월 30일에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인양지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기자회견을 열었고, 10월에는 창원시청 앞에서 문화재 지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펼쳐 "향후 문화재로 지정 보존, 관리함이 타당하다고 사료된다"는 의견을 받아낸다. 11월에는 이 의견서를 가지고 경남도를 압박했다. 인양지가 마산해양신도시 건설사업에 포함돼 훼손될 우려가 있으니 도 지정 문화재로 임시 지정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김두관이 도지사로 있던 경상남도는 기념사업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해 12월 8일에 인양지 일대를 경상남도문화재(기념물)로 가지정 했다. 현대사에 해당하는 역사 현장을 지자체가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7월 21일에 인양지는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문화재가 됐다. 이 규정에 따라 시신이 떠오른 바다 앞 부두면을 기준으로 가로 100m, 세로 20m(육지 5m, 공유수면 15m)가 기념물 면적으로 지정됐다. 추모사업회를 중심으로 뜻을 가진 시민들의 열망이 마침내 열매를 거둔 순간이었다.

산사태 속 시민 지킨 군인들의 희생

두 번째로 살펴봐야 할 경건한 공간은 장복산 마진터널의 진해 쪽에 외롭게 서 있는 추모비다. 이곳은 관청은 물론 시민들이 함께 챙겨야 할 의미 있는 공간이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이 공간의 내력은 이렇다.

때는 1979년 8월 25일, 태풍 쥬디호가 경남지역을 덮쳤다. 불과 1주일 전에 비슷한 규모의 어빙호가 휩쓸고 간 뒤라 피해 규모가 엄청났다. 특히 진해 지역은 130여 군데서 산사태가 일어났고, 그 사이 무려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피해가 집중된 건 25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동안이었다. 이때 내린 강우량이 140mm로 언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이로 물을 쏟아붓는 듯' 했다. 저녁 8시 반 경에 송학동 쪽 제황산 자락이 무너지면서 바로 아래에 있던 다섯 채의 판잣집이 흙더미에 깔려 모두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밤 9시 반에는 장복산에서 쏟아져 내린 흙더미에 근무 중이던 헌병들이 숨졌고, 같은 시각 경화동 쪽 장복산에 있는 장복사에도 바위와 흙더미가 덮쳐 여승 5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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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8월 25일 태풍 쥬디호 때 무너진 마산진해간 국도. /동아일보 사진

당시 진해 지역 피해가 워낙 커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 피해 지역을 보여주며 늑장 대응을 질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언론과 방송이 놓친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수많은 목숨을 구한 숭고한 희생이 있었는데, 이를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다.

마산과 진해를 잇는 유일한 도로였던 2번 국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장복산 정상에서부터 12개 소에 산사태가 발생해 도로 일곱 군데를 동강 내며 교통이 단절됐기 때문이다. 마산에서 일을 마치고 진해 집으로 퇴근하던 직장인들은 버스나 자동차로는 이동이 불가능했기에 걸어서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때 추산으로 차량 200여대와 보행자 3000여 명이 고립된 상태였다.

오후 2시부터 비상근무에 돌입한 헌병들은 보행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저녁 7시에는 통신이 두절되고 전기까지 끊겨 터널 주변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입구에 낙석이 떨어지자 터널 입구를 봉쇄했고, 손전등을 이용해 나머지 사람들을 한창 대피시키던 중 밤 9시 반쯤 초소와 터널을 바쁘게 오가던 병사들은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를 피하지 못했다.

통신이 끊기고 사고가 나기까지 대략 두 시간 반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들은 마진터널을 떠나지 않았다. 3000명에 달하는 보행자를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임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2번 국도와 마진터널에서 민간인 피해는 없었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현장을 지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통신과 전기 모두 끊긴 암흑의 상황에서 철수했다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졌을까?

이듬해 4월 마진터널 입구에는 이들 여덟 장병을 기리는 순직비가 세워졌고 한 달 뒤에는 산사태가 발생한 자리에 공원이 조성돼 진해시장 명의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거기에는 "이곳 수마가 할퀴고 간 극심한 산사태 지역에 우리 시민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휴식할 수 있는 새로운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순직한 장병들과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진해시민을 위로하는 나름 '경건한 공간'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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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터널 순직비. /이종은 제공

그러나 35년이 지난 지금 장병들의 순직비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태풍이 몰아치고 산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시민 수천 명의 목숨을 지켜낸 영웅들이지만, 지금은 군부대와 유족들의 기억 속에만 살아 있다. 경건한 공간이라고 만들기는 했지만 시민들의 현재 속에 살아 있지 못하고 화석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의 숭고한 희생이라면 시민들의 삶 속으로 다시 불러들여야 하지 않을까?

경건한 공간은 살아 있어야 한다

이처럼 경건한 공간은 만드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경건한 공간은 오늘을 사는 시민의 삶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 있지 못한 경건한 공간은 화석이거나 문화재일 뿐이다. 경건한 공간은 마치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있는 소녀상처럼 사람들을 모으고, 의식을 거행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마침내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모임을 통해서든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든 다양한 공간에서 화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도시를 제대로 스토리텔링하기 원한다면 도시 안에 있는 경건한 공간들을 우선 점검해야 한다. 살아 있는 곳과 잊혀져 가는 곳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하고, 오늘날 도시 공동체가 어떤 이야기에 주목할 것인지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경건한 공간들에 대해서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도시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와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8월 15일이면 마산의 오동동 시민문화광장에 새로운 경건한 공간이 만들어질 계획이다. 2013년부터 추진되어온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가 마침내 건립되는 것이다. 추모비 건립 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오동동은 경남 전역에서 끌려온 위안부 피해자들의 집결지였다. 지역간 비교를 해봐도 위안부 피해를 입은 할머니 숫자가 경남이 가장 많다고 한다. 추모비는 바로 이런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경건한 공간이 될 것이다.

이곳에 들어설 소녀상은 다른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조형물과 달리 강한 정신력을 소유한 비장한 모습이 될 거라고 한다. 서 있는 소녀(높이 158cm) 형상으로 청동으로 제작되며, 인근 창동예술촌 입주작가들이 제작할 예정이다.

도시가 살아 있는 한 시민들은 끊임없이 경건한 공간을 만들 것이다. 그 중에는 김주열 열사 인양지처럼 오랫동안 도시 권력의 견제를 받는 곳도 있을 것이고, 마진터널 순직비처럼 역사적인 평가가 부족해 시민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간을 기억하고 뜻을 모으는 사람들이 있는 한 경건한 공간은 언제든 살아날 수 있고, 또 새롭게 탄생할 수도 있다.

여기에 시민 공동체의 공감과 지지까지 더해진다면, 경건한 공간은 그야말로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뼈대가 된다. 따라서 경건한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은 진정한 도시 스토리텔러라고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도시는 살아 있는 이야기를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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