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아버지 전혁림의 한 마디

전혁림미술관 관장 전영근 화백. 그는 그의 아버지 전혁림과 쏙 빼닮았다. 외모도 그렇거니와 바람을 타지 않는 곧은 나무 같은 성격도 그랬다. 또박또박한 말투와 중저음의 목소리 톤, 쌍꺼풀은 없지만 또렷한 눈으로 그는 관장보다는 ‘작가’로, 전혁림의 아들보다는 ‘전영근’으로 불리길 바랐다. 전영근 화백은 1957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유화 물감의 진한 냄새를 맡았고 물감이 뒤덮인 집에서 뛰어놀았다. 아버지는 항상 그림을 그렸고, 유치환 등 예술가들이 집에 들락날락했다. 그가 미술을 좋아하는 데는 집안 환경의 영향이 컸다.

-미술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미술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이 그림이었다. 조그마한 방 두 칸과 툇마루에는 항상 물감이 있었고 아버지는 종일 그림을 그리셨다. 유치환, 김춘수 선생님이나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님 등이 대화하는 모습도 자주 봤다. 멋있고 환상적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분들을 보면서 인생을 걸고 빠져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릴 적에 작곡도 곧잘 했고 사생대회 나가서 상도 많이 받았다. 예술가로서 아버지는 멋있었고 자연스럽게 작가의 꿈을 갖게 됐다.”

전영근 화백 / 김구연 기자

-아버지에게 미술을 배운 적도 있었을 것 같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나.
“아버지는 문학과 음악에 재능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좋아하지 않았다. 물감을 던져버렸다. 고생만 하고 힘들게 산 자신의 삶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거다. 22살 나이가 비슷한 선후배들과 통영 동방갤러리에서 그룹전을 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작품을 보고 상당히 좋은 평가를 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물감 하나에 10~20만 원 씩 하는 것을 썼는데 나보고 “내 물감 맘껏 써라”고 까지 했다. 그때를 계기로 아버지가 밀어줬다.”

-어떤 작품이었는데 극찬을 받았나.
“추상화로 10점정도 전시를 했는데, 후배들이 다 가지고 가서 지금은 없다. 물감이 흘려지고 모이고 여러 가지 색깔이 혼합된 것으로 오브제인 종이를 오려서 바다를 표현하기도 했다. 캔버스가 아닌 한지에 롤러를 가지고 페인팅을 했다.”

-미대를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예술적인 ‘끼’를 타고난 것 같다.
“예술은 결코 배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일류대학을 나온다고 해서 누구나 문학가, 음악가, 미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타고나는 게 있어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어느 정도 예술적인 ‘끼’를 타고났다.”

전혁림 미술관 / 김구연 기자

-전혁림은 아들에게 다정한 스타일이었나.
“아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보고 “고흐보다 10배 정도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평할 정도니…. 자기와 맞지 않으면 절대 안 하고 사회와 타협을 안 했다. 외로운 사람이었다. 사회성도 많이 부족했고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괴팍하다고 해야 하나? 엄하지는 않았다. 항상 ‘자유롭게 네 하고 싶은 것 해라’고 했다.”

-20대 전영근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다.
“정말로 철이 없었다. 피카소 전기를 읽고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거지. 국력도 생각 안 하고…. 한마디로 예술을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술이 쉬운 거라면 피카소라는 사람 안 나왔겠지. 예술이 어렵다는 것을 40대쯤 알았다.”

전영근 화백 / 김구연 기자

-작품에도 변화가 있었나.
“있었다. 그전에는 흉내만 낸 것 같다. 비구상을 하다가 구상, 다시 비구상으로 돌아왔고 1000호, 2000호 등 대작을 주로 했다. ‘곡마단’, ‘마술 상자’, ‘종이접기’, ‘반짇고리’, ‘바다의 물결’과 같은 유년기에 깊이 각인된 이미지를 작품에 담았다. 전통적인 건축물에서 오는 평면적 도형과 강렬한 색조, 그리고 나고 자란 ‘통영’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13~14살 당시 통영은 흑과 백으로 나눴다. 연탄재가 거리에 깔렸고 건물도 새까맣고 볼 수 있는 문화라곤 우(牛)시장에서의 서커스였다. 환상적이었지. 앞으로도 원시 미술에서부터 현대미술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구조를 표현하고 싶고, 그로부터 생성될 수 있는 사상적인 발견을 하고 싶다.”

-큰 작품을 추구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20대 후반 프랑스 아카데미 그량쇼미에르에서 3년간 수학을 했다. 서양미술을 알고 싶었고 예술적 자양분을 미리 쌓아둬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때 당시 24개국을 돌아다녔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나라가 ‘이집트’다. 정말 위대했고 충격적이어서 1년간 작업을 안 했다. 웅장했던 이집트를 보고 작은 작품보다는 큰 작품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유가 또 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재료가 없어서 큰 캔버스가 아닌 작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게 안타까웠다. 물감을 살 수 있을 때 대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품이 평면적이고 구성적이라는 점에서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평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전영근’이라는 작가보다는 ‘전혁림의 아들’과 작품을 오버랩해 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닮았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오히려 다른 작가들이 아버지와 비슷한 작품을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수십 년을 매일같이 아버지의 작품을 봤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거장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화가 전영근’에게는 ‘독’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전혁림’이라는 분이 없으면 제 작품의 가치가 더 올라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라는 사람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어떤 예술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게 해준 건 아버지다. 양면성이 있다. 전혁림의 아들이라서 좋은 점이 80%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반면 아버지의 예술적 업적에 준하는 예술적인 삶을 구축해야 한다는 큰 숙제가 있다.”

전영근 화백 / 김구연 기자

-전혁림 미술관은 1975년부터 30년 가까이 생활하던 집을 헐고 2003년 5월 11일 문을 열었다. 미술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며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
“70세가 넘으면 점점 화단에서 잊혀 가는 경우가 많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 있다 보니 조명도 안 되고…. 혹여 슬럼프에 빠질까 봐 분위기도 쇄신하고 살아 있을 때 아버지의 흔적을 남겨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 아버지는 반대를 했지만 밀어붙였다. 미술관을 자비로 운영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지만 표시를 잘 안 내는 편이다. 지방자치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연간 운영비가 어느 정도인가.
“약 7000만 원 정도다.”

-작가가 아닌 전혁림미술관 관장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는데….
“관장이라는 직함은 경영자라는 의미다. 한시적이고 전문성보다는 사회적 경륜의 직함이라고 생각한다. 미술관을 조성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맡고 있지만 저의 본질과는 맞질 않는다. 작가로 출발했고 현재까지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우선, 노력하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 아버지의 예술 업적을 기리는 일도 꾸준히 할 것이고 미술관도 평상시처럼 운영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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