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야마을 ‘희로애락’ 모두 품었다

“여자들은 거기 못 가요. 양반동네라 그런다요.”

“지금은 신식 돼서 딴 동네는 우산각도 같이 쓰고 놀고 그런단디.”

나주 봉황면 철야마을. 동네 아줌마들이 ‘겁나’ 큰 정자를 바로 옆에 두고 작은 평상에 앉아 얘기 나누고 있다.

그렇다고 남자라면 다 올라갈 수 있는 정자가 아니다. “젊은 것이 거기 누워 있으면 금방 말 나오제. 안 그러겄소. 젊은 사람들은 숲쟁이(마을 한쪽에 있는 숲)에 가서 쉬어.”

전라남도 기념물 145호로 지정된 나주 만호정(挽湖亭). 그 호방하고 큰 그늘에 ‘남녀노소’가 있다니.

철야마을은 호남의 명촌이었다. 이천 서씨, 진주 정씨, 파평 윤씨가 향약을 중심으로 한 ‘대동계’를 이루며 살아왔다. 만호정(전라남도 기념물 145호)은 이들 대동계의 명맥과 함께 해 왔다.

“주민들 모타 놓고 교육도 시키고 마을 집회도 했대요.”

정방규(75)씨는 “여기는 어르신들 토론하는 자리”라고 못 박는다. 이전 시대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오래된 편액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호남의 대읍, 전라도의 중심도시였던 나주는 정자가 많은 고을이다. 그 중에서도 만호정은 시원시원한 모양새로 나주의 대표적인 정자로 손꼽힌다.

<영평은 우리 현의 옛 이름이다. 이 정자의 풍경은 이 현에서 으뜸이니 어찌 영평으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을 수 없겠는가.> (서몽희(徐夢曦)가 쓴 현판문 내용)

영평정(永平亭) 혹은 소나무가 무성하다고 무송정(茂松亭), 마음을 쾌하게 한다 하여 쾌심정(快心亭)이라 불리다 1774년 정자를 중수하며 만호정(挽湖亭)이라 했다. 향토사학자 정윤국씨는 “마을 앞까지 드나들던 영산강의 조수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다시 끌어당긴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해석한다.

“모구(모기)도 안 물어. 사방간디로 터졌잖어. 바람이 하도 좋은 게 못 달라들어.”

서광열(75)씨는 “우리 정각처럼 큰 것은 영암 영보정, 신북 모산리 영팔정 몇 개 빼고 별로 없다”며 “우리 정각 보고 버스에서 내려 구경하고 간다”고 자랑이 늘어진다.

“느티나무 세 그루면 세세부귀를 누린다고 했는디, 꽉 찼잖어.”

이렇게 두꺼운 그늘이 없다.

“나주시 노인회 회의를 여기서 했어. 고 많은 사람들이 뱅 둘러앉아서 막걸리 한잔씩 했제.”

이렇게 넓은 그늘이 없다.

“새소리가 떠나질 않애. 연못에 연꽃 피고 연못 가상에 백일홍 펴봐.”

이렇게 운치 있는 그늘이 없다.

“새복에 나가 점심 때까지 일하고, 한술 뜨고 여기서 쉬제. 배 꺼졌다 싶으면 일하러 가. 인자 늙어갔고 기운 애꼈다 해야지 못해.”

이렇게 덕 있는 그늘이 없다.

이 그늘이 단단히 한몫 할 때가 있다. 삼복날 복다림.

“유촌, 수각, 등내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이지. 날 더우니까 돼지 잡고 떡죽 써서 어르신들 대접하는 거여. 70세 이상은 그냥 자시고 69세까지는 돈을 내지. 그 날은 일 안하고 요 그늘에서 웃고 떠들고 놀아. 전통이여.”

   
소나무 무성하여 ‘무송정’ 마음 쾌하게 하여 ‘쾌심정’


그 전통에는 마을의 돈독한 화목을 다지려는 이유가 있다.

“옛날 우리 대동계 회칙을 보믄 봄에는 산채(산채 삶아 먹는 일) 여름에는 가장(개장국 만들어 먹는 일) 가을에는 천유(川遊=시내에서 고기 잡고 노는 일), 겨울에는 조포(造泡=두부 만들어 먹는 일) 이렇게 정해 놓고 놀았어. 풍족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있으니까, 야채는 세 그릇, 생선은 한 그릇, 고기도 한 그릇씩만 가져오게 정해 놓고 놀았어. 가난한 사람은 고기도 부담되니까 ‘참새도 고기다’ 회칙에 적어 놓고 불참자 없이 다 나올 수 있게.”

음식은 적더라도 정은 두텁게 했다. 무릇 함께 한 마을에 살며 ‘다 같이 살아가는’ 일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만호정은 마을 주민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비극의 그늘’을 드리운 장소이기도 하다. ‘차마 지켜볼 수조차 없는’ 참상이 만호정에서 벌어졌다. ‘철야양민학살사건’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오라고, 안 나오면 다 죽여분다고. 마을 뱅 둘러싸서 총을 쏘아대는 통엡.”

6·25전쟁 당시인 1951년 2월26일 새벽, 마을 주민 모두가 만호정 앞으로 끌려나왔다. 나주 봉황지서가 빨치산과 공비를 색출한다는 명분이었다.

“입산했던 씨가 계곡에서 잡혔는디 가방에서 ‘지하명단’이 나왔다고 그래. 고것 보고 다 죽여분다고 그런거여. 근디 그 조직책은 사실이 아녀.” 당시 14살이었던 정찬기(70)씨는 발견된 지하명단 속의 사람들은 ‘좌익’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좌익 가담자는 진즉 다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본때를 보여준다고 발로 차고 총대로 내리치고. 아침 훤해지도록 그랬어. 참말 눈뜨고 못봐….”

만삭이 된 며느리는 ‘죄 없는 우리 아부지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 개머리판에 맞아 혼절했다. “시아부지 들고 있던 담뱃대를 순경이 뺏아서 이마를 내려쳐분게 피가 줄줄 흘러. 차라리 자기 죽이라고 며느리가 달라들었제. 근게 가슴팍을 내리쳐부렀어….”

노인들과 부녀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낭자 풀어갖고 뒤로 해서 고것으로 영감 목을 졸라갖고 둘을 사정없이 총부리로…. 사람도 아녀….”

   
가난한 사람도 ‘참새 고기’ 가져와 어울리던 놀이터

서재중(66)씨도 이날 본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한다.

“아침 10시쯤 됐을 거여. 비 부슬부슬 내린디 순경들이 다도(나주의 한 면소재지)로 피난민 짐 가지로 간다고 끌고 갔어. 돌아오실 줄만 알았제….”

35명을 가려내 마을 뒤 덕룡산으로 올라갔다. 한 아이는 부모가 모두 끌려가자 울면서 따라갔다. ‘너도 죽여분다’는 순경의 엄포에 울면서 마을로 돌아왔다.

“담박굴재 홍씨 선산에서 쏴 버렸다고 해. 그날 비가 와서 계곡물이 피로 빨갰어….”

철야양민학살로 남편·아버지 잃은 눈물 젖은 곳

덕룡산 한 계곡에 사람들을 몰아놓고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장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 “순경들이 마을 나가면서 하나라도 (시신을) 데리로 가면 죽여븐다고 그랬응게…. 도리가 없었어….”

서씨는 “무법천지 같은 세상,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한 무서운 세상이었다”고 무겁게 한숨을 내쉰다.

“참말로 못살 세월을 살았네… 인자는 그런 일 없어야제… 좋은 일만 있어야제….”

햇빛 밝은 여름날 오후, 만호정 깊은 그늘 속에 시절 따라 울고 웃은 사람들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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