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 2일 전 육군하사 요코이 쇼이치가 온 국민의 관심 속에 도쿄 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적에게 체포당하지 말라는 지휘관의 명을 받고 이를 지키느라 28년간 괌 섬의 정글에서 숨어 지내다 귀환한 병사다. 기다리고 있던 TV 기자들에게 요코이가 한 말은 이렇다. 

"요코이 쇼이치, 괌에서 돌아와 보고합니다.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와 패전을 보고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작동하는 소총을 휴대하고 있습니다. 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황 폐하께서 주신 이 총의 개머리판은 흰개미들이 먹어 치웠습니다. 이제 이 총을 천황 폐하께 돌려드립니다. 천황 폐하의 지시를 잘 받들어 모시지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기괴한 사건인가? 일왕이라는 존재가 군인들에게 어떻게 각인됐길래 요코이는 로빈스 크루소보다 오랜 시간을 숨어 지냈으며, 귀국한 뒤에도 지시를 받들어 모시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했을까?

1935년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한 만주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영접하는 히로히토.
1935년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한 만주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영접하는 히로히토.

2019년 10월 22일 나루히토 신임 일왕이 전 세계에서 온 수백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거창한 즉위식을 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축하 사절로 참석했다. 신임 일왕은 예상했던 대로 세계 평화와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우경화로 치닫는 현 아베 총리와 분명히 반대되는 소리를 냈기에 태평양 전쟁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받아들였을 성 싶다. 

하지만 근대사를 더듬어보면 그들이 천황으로 부르는 일왕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군주로 용인하긴 어렵다. 일본 제국주의를 이끈 몸통이자, 수많은 일본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나루히토가 평화를 언급했다고 해서 요코이 사례에서 보듯 피로 물든 근대가 지워지는 건 아니다. 

일본은 옛부터 천황제를 만세일계(萬世一系)로 부른다. 왕조 교체가 빈번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혈통이 일왕 자리를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세일계는 '우리만 그랬다'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일왕이 따로 옹립되는 시기가 있긴 했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실상을 알면 만세일계라는 말은 공허해진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전에 교토에 거주하던 일왕은 형식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직접적인 정치행위와는 유리된 일종의 제사장이었다. 근대적 기준으로 볼 때 남성적인 이미지도 군사적 기능도 갖추지 않았다. 

도리어 궁녀들이 지배하는 격리된 세계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무기력한 존재로 비쳐졌다. 거기다 수염없는 얼굴과 흰색 분칠로 치장한 용모, 뒤로 넘긴 긴 머리 때문에 더욱 유약해보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아예 그 존재를 체감하지 못했다.

1872년 우치다 구이치가 촬영한 전통 예복차림(위)과 군복차림의 메이지 일왕. 초창기 유약했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1872년 우치다 구이치가 촬영한 전통 예복차림(위)과 군복차림의 메이지 일왕. 초창기 유약했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구마모토 현의 아사쿠사 섬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어부생활을 했고 백 살 되던 1960년대 초 기자회견을 한 스사키 분조라는 사람은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징집된 농민들은 일왕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회고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할머니들은 "천황이 쇼군의 자리에 앉았다는 소문이 있긴 한데, 그는 어떤 사람일까? 교겐狂言(희극)에 나오는 것처럼 금관을 쓰고 소매가 긴 금박 비단옷을 입은 사람일게 분명해!"라고 말했다.

메이지 초기인 1868년 영국 외교관 어니스트 새토 또한 젊은 일왕을 처음 만났을 때 파리한 얼굴과 수동적인 태도에 무척 놀랬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근대의 통치자란 모름지기 남성적이고 역동적이어야 한다는 유럽적 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 유리됐던 백면서생은 어떻게 해서 절대적인 군주가 될 수 있었을까? 근대화에 나선 신 지배층이 일본을 통합하고 상징하는 구심점으로 천황제를 강력하게 구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만 해도 대다수 백성은 번(藩)에 대한 소속감만 있었지, 자신이 일본국민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이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 지도층은 그래서 오랜 정통성을 지닌 일왕을 내세워 국민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그 단계는 첫째 일왕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둘째 의례를 통해 국민들에게 그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이 시기 '무쓰 데와 인민에게 내리는 포고' 를 보면 정부는 "천황께서는 태양신의 후손이며 태초부터 일본의 주인이셨다. 1등신(一等神) 같은 지방신들의 서열은 천황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다. 따라서 그 분은 지방 신보다 훨씬 더 높은 분이시며 모든 토지와 인민의 소유자"

라고 못박았다.

그런가 하면 일왕은 국민들의 삶을 규정하는 현안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때때로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군복을 입었다. 메이지 말기에 이르면 일본인은 일왕 가족을 신성시하고  거창한 공적 의례를 구경하는 데 익숙해졌다. 

우부카타 도시로가 쓴 <메이지 다이쇼 견문사>에는 1900년 동궁(메이지 일왕의 아들)인 다이쇼의 성혼식 풍경이 잘 그려져 있다.

"우리는 아침부터 서둘러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가장 가까운 친구 10여 명이 기숙사를 출발하여 사쿠라다 문을 통해 황거(皇居) 앞 광장에 들어가 니주바시의 목책 바로 앞에 섰다. 동궁 전하 부부의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순사들은 마구 앞으로 튀어나오는 군중들을 통제했다. 목책위에 앉거나 나무에 올라간 사람들은 순사들이 끌어내렸다. 하지만 순사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또다시 나무에 오르고 목책에 걸터앉았다. 문득 예수 일행을 보려고 자캐오라는 키 작은 사람이 무화과 나무에 올라갔다는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이날 군중들은 '호산나 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 복되도다'고 하면서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고 사람의 아들로 오는 왕을 환영했던 예루살렘 사람들과 진배없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왕이 확고부동한 일본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청일전쟁에 승리하면서부터다. 전쟁기간 동안 메이지 일왕은 히로시마 대본영(일왕 직속으로 만들어진 전쟁 지도기관)에 머무르면서 대원수 역할을 수행했다. 때문에 청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의 국위는 물론 일왕의 권위 또한 크게 높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94년 지지신보(時事新報)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전 이래 천황 폐하께서는 대본영이 있는 히로시마에 가셔서 친히 군을 돌아보시며 주야로 침식도 편히 하지 못하셨다. 이 사실을 국민 일반이 전해 듣고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다. 나또한 그저 감격하여 눈물에 목이 메일 따름이다."

메이지 이전 일왕들은 수시로 연호를 바꾸곤 했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 일왕들은 연호를 하나만 씀으로써 그 치세가 한 시대로 기억되도록 했다. 다이쇼 일왕이 즉위하면서 일본인들은 메이지를 하나의 시대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는 천황제가 모든 이들의 감각에 스며드는 결과를 낳았다.

근대 일본을 설계한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말기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의 진보를 촉진시킨 원인이 어디에 있건, 그리고 종래 거둔 성공에서 우리가 이룬 공들이 아무리 크다 한들, 이것은 모두 국가에 대해 천황 폐하가 한 일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천황 폐하의 성지(聖旨)는 시종 국가를 지도해나간 별과 같은 것이었다. 천황 폐하의 현명한 정치를 보필하고자 원한 나같은 사람들이 이룬 공적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만일 새로운 개혁을 시도할 때마다 그 배후에 위대하고 현명한, 혹은 증진적인 권위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이러한 빛나는 공적을 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천황제와 그것이 거둔 결과에 도취되어 드디어 지도층 스스로도 일왕을 별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식이야 말로 일본 제국을 패망으로 이끈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일본의 흥망성쇠가 공히 천황제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아이러니다.

메이지 헌법 반포식을 풍자한 판화. /도쿄대학 메이지 신문잡지문고 소장
메이지 헌법 반포식을 풍자한 판화. /도쿄대학 메이지 신문잡지문고 소장

메이지 시기에 만들어진 일본 제국 헌법에는 의회가 내각을 탄핵할 수 있는 상주권上奏權(일왕에게 요청하는 일)이 있었는데, 일왕의 정치적인 의사를 가능한 한 정부가 독점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지도층은 이를 부정했다. 그래서 일왕의 권한을 어떠한 경우에도 제약할 수 없다는 '군권론(君權論)'에 집중했다.

군부는 군부대로 일왕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려 했다. 일왕의 권위를 절대화하고 그 절대적인 권위를 토대로 일왕이 통솔하는 군대까지도 절대화함으로써 국정을 장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혼조 시종무관장이 "군에서는 천황이 현인신이라고 믿고 있다"고 단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일왕을 내세워 일본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정치 군부 지도자들은 이런 메카니즘을 이용해 대의기관인 의회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고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갔다. 그 결과는 이웃 국가를 유린하고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참혹한 패전'이었다. 

이쯤에서 항상 제기되는 의문이 있다. 모든 일본인들에게 주입된 사고는 일왕에 대한 맹종이었고, 온화한 말로 하달된 일왕의 의견이나 결정이라 하더라도 이를 무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지도층이 그토록 추어올린 현인신은 왜 고비마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을까? 과연 일왕은 상징적 존재로서 군부의 꼭두각시였는가? 쇼와 일왕 평전인 <히로히토>를 쓴 프랑스 작가 에드워드 베르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은 히로히토 일왕이 수동적이며, 온화한 과학자 군주로서 오로지 해양생물학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부의 어떤 결정도 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겉으로는 천황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자기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군인들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1936년 정권을 거의 전복시킬 뻔한 2.26 군부 반란 때 홀홀단신으로 이를 진압했으며, 1945년 8월에도 독단적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운명적인 1941년 진주만 공격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에서 히로히토는 표면적으로 수동적이고 독자성이 없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그런 태도를 보였지만, 실제로 내부에서 전개된 진행과정에서는 사뭇 다른 자세를 취했다. 살아 있는 신으로서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가 배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또 실제로 아무런 권한도 없었기 때문에 제 2차 세계대전에 이르게 되는 제반 사건들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을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는 히로히토가 고의적으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군부가 앞장서서 책임을 지고 만주국을 세운 뒤 만주사변을 일으키게 만든 배후 인물이었다고 확실한 어조로 말한다. 히로히토는 실제로 1937년 이후 중국에 대한 전면전을 승인했으며, 군부 장성들에 대한 그의 유일한 불만은 예정된 시간 안에 승리를 쟁취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일왕을 신적 존재로 규정하는 전전(戰前) 체제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비로소 바뀐다. 미군은 1946년에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일왕은 상징일 뿐이라는 내용을 담은 새 헌법을 반포한다.

문제는 전전에 지니고 있던 힘을 쫙 뺐음에도 천황제라는 독특한 군주시스템이 존속됐다는 점이다. 일본인 가운데 자기 뜻을 밝히라고 요구받은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전후 새 헌법은 일왕이 "주권을 가진 국민의 총의에 기초해서 지위를 확보하며, 국가의 상징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이라고 선언했다.

1936년 도쿄에서 황궁 근위사담을 주축으로 한 '2.26폭동'이 일어났으나 히로히토는 냉혹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1936년 도쿄에서 황궁 근위사담을 주축으로 한 '2.26폭동'이 일어났으나 히로히토는 냉혹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통상 천황제는 동북아 형세 변화를 바라보는 일본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일치됐기 때문에 살아남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일본의 국체國體(천황제)를 온존시키려는 지도층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래서 전후 처리도 전쟁 당시 총리를 지낸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책임자 몇몇을 사형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전쟁 책임이 이렇게 얼버무려지다보니 진짜 책임을 져야할 일왕과 지도층 핵심들은 면죄부를 받고 재기에 성공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제 일본의 군주제는 자본주의 관음증(voyeurism)이 향하는 대상일 뿐이다. 온 국민의 눈길은 출산과 결혼 같은 뉴스이벤트에만 쏠린다. 일왕의 아우라가 사라지면서 국민적, 인종적 본질이나 전통이 지닌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국가 공동체에 대한 배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신념이나 네오내셔널리즘이 다시 부상하는 광경을 보면서 공포를 느끼는 이들도 있다. 현재 일본을 통치하는 아베 수상은 우경화를 이끄는 장본인이다. 

역사학 교수인 다카시 후지타니는 이를 두고 "천황의 아우라와 그에 대한 신념이 사그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근자에 국가와 천황제에 대한 베일이 벗겨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일본 근대에 창조된 지배적인 내러티브를 믿는 것처럼 여전히 행동하는지 우리는 놀랍기만 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나루히토는 평화와 헌법을 언급했지만,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언제든 악마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일왕이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참고도서

♣ 스즈키 마사유키 지음 / 류교열 옮김 <근대 일본의 천황제> 이산
♣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 한석정 옮김 <화려한 군주> 이산
♣ 에드워드 베르 지음 / 유경찬 옮김 <히로히토> 을유문화사
♣ 요네쿠보 아케미 지음 /정순분 옮김 <천황의 하루>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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