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다

그는 20년 넘게 부산에서 생활했다. 20대 후반, 대학 졸업과 동시에 거창을 찾아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정착하며 귀농했다. 그렇게 농촌 사람이 된 지 12년째다. 하지만 현재 직접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일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 젊은 그에게 좀 다른 책임감이 안겨졌고, 그는 마다치 않았다.

그는 거창군 농업회의소 김훈규(41) 사무국장이다. 그가 대도시 생활을 접고 이른 나이에 농촌생활을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농활 인연으로 20대 후반 거창 정착

김훈규 사무국장은 창원시 의창구 북면에서 태어났다. 7살 때까지 고향에서 지냈는데 그 기억은 짧지만 강하게 남았다. 이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부산에서 다니며 대도시 생활을 20년 넘게 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농사를 지으셨죠. 저는 자연 속에서 투박하게 지냈던 그 시간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감수성도 많이 기를 수 있었죠. 그런 영향으로 이후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부산으로 이사했지만 시골에 대한 기억은 늘 머리에 남아있었습니다. 일종의 동경 같은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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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김훈규

문학을 좋아하던 그는 선생님 되는 것이 꿈이었다. 부산대학교 한문학과에 진학하며 계속 그 끈을 이어갔다. 하지만 대학 시절 다녔던 농활은 그의 인생 방향을 바꿔놓았다.

“농활을 거의 매년 거창으로 왔어요. 휴학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올 정도로 농민들과 관계가 형성됐죠. 대학 시절 나름대로 학생운동도 열심히 했어요.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였죠. 농촌의 삶에 대해서도 어릴 적 동경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로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는 늙고 왜소한 농촌에 젊은 사람 손길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농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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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김훈규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이런 고민을 했다. 마침 졸업 무렵이었다.

“2002년에 거창 농민들이 우리영농조합이라는 법인을 만들었어요. 주유소도 하고 영농자재도 파는 그런 법인이죠. 실무를 볼 사람이 당연히 필요하잖아요. 제가 계속 거창을 왔다 갔다 할 때라 저한테 부탁이 들어온 것이고, 큰 고민 없이 그러겠노라고 했죠.”

그때는 거창에 완전히 정착하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일단 가서 판단하자는 생각이었다.

“부모님은 ‘네가 농촌 가봐야 얼마나 버티겠나’라며 잠시 떠나보내는 정도로 생각하셨죠. 저 역시 정착에 대해서는 반반이었습니다. 거창 올 때 달랑 10만 원 들고 왔습니다. 우선 지내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마음이었어요.”

그는 법인에서 이런저런 업무를 봤는데 그 가운데 채권 관리도 있었다. 쉽게 말해 외상값을 받으러 다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할 짓이 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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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규 사무국장

“농촌이다 보니 기름 쓰고 나중에 돈 준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몇십만 원, 몇만 원을 고질적으로 안 갚는 분들이 있어요. 우선 전화하고 문서 보내고, 그래도 안 되면 직접 집으로 찾아갑니다. 막상 가보면 야반도주했거나, 부모들은 집 나가고 아이들만 있는 경우가 많아요. 외상값을 안 갚는 게 아니라 못 갚는 거죠. 그러면 그냥 발길을 돌리거나, 아이들이 딱해서 오히려 용돈을 주고 오기도 했어요. 그러한 현실을 보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는 이 일을 1년 정도 하다, 이후부터는 자진해서 기름 배달 일을 했다. 이때 거창 구석구석을 다녔다. 많은 농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막연하던 귀농에 대한 생각이 조금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받은 월급으로 소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에게 맡겨 대신 키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죠. 법인 일 관두고 직접 소 3마리를 키웠습니다. 이전까지 주유소에 딸린 방에서 생활하다 수승대 인근 황산마을이라는 고가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평생 농사지을 땅도 조금씩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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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규 사무국장

황산마을에서 지낸 지 2년 6개월가량 지나서는 축사 규모를 키우기로 했다. 인근 죽림마을로 옮겼다가 또 좀 더 괜찮을 곳을 찾았다. 경북 김천과 인접한 웅양면 한기리의 작은 산을 일구고 축사를 지었다. 소 50마리 정도 되는 제법 큰 규모로 준비했다. 

그런데 그는 현재 거창군 농업회의소 상근자로 일하고 있다. 

농민들 위해 자신의 계획 잠시 뒤로

그는 거창에 온 이후 농민단체 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도 열심히 했었다. 농민들이 싸워야 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앞에 나서 목소리를 냈다. 그런 그였기에 거창군 농업회의소 상근 역할이 주어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비교적 젊은 편이며, 농축산업 규모도 크지 않기에 기꺼이 맡았다. 거창군 농업회의소는 농민들 목소리를 실제 정책으로 연결하는 곳이다. 즉 농민과 행정의 중간자 역할이다. 정부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농업회의소는 전국에 7곳 있다. 거창군은 그 중 하나로 지난 2012년 출범했다. 특히 전국 농업회의소 가운데 거창군은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곳 역할에 따라 시범사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그만큼 책임감이 크다. 이러한 거창군 농업회의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이가 김훈규 사무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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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규 사무국장

거창군 농업회의소는 19개 농민단체가 가입해 있고 회원이 850명가량 된다. 상근 인력은 김훈규 사무국장을 포함해 3명이다. 운영․인건비는 주로 회비로 충당하고, 지자체 보조와 공모를 통해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제일 힘든 것이 업무 자체가 상당히 포괄적입니다.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지 이제 2년밖에 안 되다 보니 ‘본 사업은 이런 것’이라고 명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굳이 정리하자면 정책개발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농민 요구가 왜 정책화되지 않는지 계속 검토하고 제안하는 거죠. 그리고 교육사업 비중도 높습니다. 기존 교육사업은 짜인 틀에 농민이 따라가는 형태였다면, 저희는 농민이 직접 주도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처음 맡을 당시에는 소 키우는 일을 병행했다. 하지만 농업회의소 업무가 워낙 방대해 더 이상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다. 소는 지인에게 맡겨두고 집도 읍내로 옮겼다. 사무국장 임기는 3년이며 연임할 수 있다. 이제 2년 조금 지났는데 좀 더 이 일을 맡아야 할 것 같다.

“제 성격 자체가 여러 가지 일을 벌이는 게 쉽지 않아요. 소는 사람 손이 항상 필요한 가축입니다. 밥만 주고 출근해 버리면 너무 무책임할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이 일에 집중해야죠. 행정에서도 관심 있게 보고 있기에 책임감을 안고 해야죠. 여기서 제 역할을 다하고 나면 다시 소 키우는 곳으로 돌아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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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규 사무국장.

“폐교를 주민에게 돌려주자”

거창은 교육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그런데 교육 역시 읍내에 집중해 있다. 그러다 보니 면 단위 작은 학교는 문을 닫는 실정이다. 지역 내 폐교만 30곳이 넘는다. 김훈규 사무국장은 이 폐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농촌의 중요한 상징은 여전히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학교가 죽으면 마을이 죽습니다. 그렇다고 한번 문 닫은 학교를 다시 열 수는 없잖아요. 대신 주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 방치돼 있어요. 법적인 틀이 다 있지만 이를 안내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던 웅양면 한기리에는 폐교한 지 15년 된 하성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자는 주민 욕구가 컸습니다. 제가 개인자격으로 나서 작은 행사 같은 것도 추진하고, 주민 잔치도 하며 재미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은 거창 내에서 주목받는 공간으로 변해 있다. 글짓기 모임, 여성 난타, 노래교실 등 주민 동아리 모임 장소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동아리 가운데 글짓기 모임은 전국에 소문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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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을 위해 벌인 축제./사진 제공 김훈규

“대부분 70~80대 어르신들이 참여해요. 거창에 전문 작가가 좀 있어요. 이들이 와서 딱딱하게 이론 수업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제를 던져놓고 써 보시라고 합니다. 놀라운 게 제목만 던져도 어르신들은 술술 쓰십니다. 글 모르는 분들은 말씀으로 하시면 도와주시는 분들이 받아 적죠. 자연스럽게 삶을 표현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글들을 모아 지난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백일장도 여는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도 받았습니다.”

그는 동아리 활동에서 기획, 강사 섭외와 같은 역할을 한다. 농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는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꿈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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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규 사무국장은 마을 고유의 문화와 인적 자원을 활용해 지역 발전에 힘을 보태는
문화사업‘문화이모작’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문화 활동가들과 함께./사진 제공 김훈규

“교단에 서서 꼭 누군가를 가르쳐야지만 교사인가요. 그냥 농민과 함께 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또 내가 배울 수 있는 건 배우고…. 또 다른 형태로 제 꿈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아내는 부산사람이다. 결혼 전 대학 후배였던 아내에게 ‘도시에서 어렵게 직장 구하려 하지 말고 여기로 와라. 당장 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조언했다. 그 말을 공감한 아내도 거창으로 들어왔다. 아내는 거창여성농업인센터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자녀는 딸 둘인데, 내년 1월 1일이면 셋째가 세상에 나온다. 그는 아내에게 했던 것처럼 또다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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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을 위한 클래식 공연./사진 제공 김훈규

“젊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할 역할이 많습니다. 소득증대, 기술향상 같은 것이 아닌, 문화·복지 등 측면에서 도울 수 있는 것들 말입니다. 저는 제 선택에 후회 없고, 농민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농촌이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마을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나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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