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땅에서 흙과 함께한 인생

어릴 적에는 대개들 꿈이 자주 바뀐다. 한 날은 군복이 멋있어서 군인을, 또 어느 날은 TV에 나오는 모습에 반해 경찰관을 꿈꾸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코흘리개 시절 다른 어떤 것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늘 흙과 함께인 시간 속에서, 자신도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일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름 아닌 ‘도예가’ 길이었다. 굴곡진 시간 속에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업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밀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도예가 손주균(57) 선생이다.

손주균 선생은 밀양 시내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작업실인 ‘춘광도예원’은 밀양 부북면 위양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모친이 거주하는 공간도 함께 있다. 한쪽에는 모친이 겨울에 몸을 녹일 수 있는 황토방이 있고, 또 한쪽에는 상추·깻잎을 심은 텃밭도 있다.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이러한 생활은 손 선생에게 감사하게 다가올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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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광도예원 현판과 손주균 선생./본인 제공 사진

흙은 곧 놀이터이자 장난감 

손주균 선생 할아버지는 사업가였다. 일본에서 꽤 큰돈을 벌어 고향 밀양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사업을 고민하다 보니 기왓장 만드는 것에 눈이 갔다. 

“생각대로 잘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가마 불을 지피기 위해 밀양 곳곳에 있는 소나무를 소달구지에 실어 나르고, 가마 두 개를 24시간 내내 때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냥 그렇게 살았으면 되는데…. 가족 모두 서울로 옮겨 가려고 했죠. 그 과정에서 사기를 당해 돈을 훌러덩 날려 버렸어요. 할아버지 슬하 9남매가 뿔뿔이 흩어지고, 아버지만 밀양에 남으셨죠.”

할아버지 밑에서 기와 작업을 배운 아버지는 계속 업을 잇기로 했다. 이미 훌륭한 솜씨를 보유하고 있었다. 밀양 내 문화재급 사찰, 문중 제실에 들어가는 기와 작업은 대부분 아버지 손을 거쳤다. 손재주 좋은 아버지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생활자기․조형물 쪽에도 관심을 뒀다.

이러한 아버지를 둔 그는 흙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흙은 곧 그의 놀이터요, 장난감이었다. 그 역시 이 방면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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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균 선생./본인 제공 사진

“어렸지만 흙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닌데, 흙으로 사람 얼굴을 만들면 신기하게 그 모양이 나와요. 초등학교 다닐 때는 조각도 좀 잘했어요. 공작대회 나갔다 하면 상을 탔죠. 중학교 때는 선생님이 그림도 그려볼 것을 권유하더군요. 붓을 쥐어보니 여기에도 재주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는 집안이 어려울 때라 물감 살 돈이 없었어요. 그러니 뭐 조형물 쪽에 집중했죠.”

고등학교는 미술 특기생으로 지원한 마산고와 진주고 두 곳 모두 합격했다. 하지만 여전히 생활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양옥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아버지의 기와 사업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하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밀양세종고에 장학생으로 다녔다. 그는 특별한 가르침 없이 혼자 미술공부를 하며 대학 진학을 생각했다. 이 역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결국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그를 알아주고 찾는 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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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손주균 선생 모습./본인 제공 사진

“고등학교 때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다 보니 여기저기 소문이 났죠. 부산에 정발장군 동상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겁니다. 대학생도 아닌데 대학 교수님 집에서 먹고 자며 작업에 함께했죠. 그 일을 끝내고 나니 자신감이 넘쳤죠. 다시 집안 업을 일으켜야겠다 싶어 고향으로 돌아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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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입선 사진./본인 제공 사진

사업실패 후 작품활동 전념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면서 생활자기·다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릇·찻잔은 밋밋하거나 그림을 입히는 정도였다. 조각에 남다른 재주가 있던 그는 동물 조형물을 접목해 보기로 했다.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게 책정해 내놓았다.

“생활자기는 무엇보다 돈 부담이 없어야 합니다. 몇 십만 원 하는 그릇을 내놓으면 깨질까 봐 겁나서 누가 쓰겠어요. 설거지하다 조각나더라도 아깝다는 생각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대한 대로 반응이 좋았다. 그는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1990년대 초에 아예 공장을 차렸다. 일하는 이가 60명 가까이 되는 중소기업이었다. 하지만 사업 쪽에는 머리가 트이지 않았다. 거기에 사기까지 당해 결국에는 문을 닫아야만 했다. 경제적·정신적으로 휘청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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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균 선생./본인 제공 사진

그래도 그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다. 그중 하나가 절이었다. 

“제 호가 ‘춘광(春光)’인데 중학교 때 스님이 지어준 것입니다. 종교가 불교거든요. 사업 실패 후 한 스님이 불상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작업을 하게 됐죠. 그 이후로 밀양 내 사찰 여러 군데에서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또 이번에는 절에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을 해 달라는 겁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자기를 만들어주니 반응이 아주 좋은 겁니다. 그 덕에 신도가 몇 백 명 늘기도 했죠.”

그는 그렇게 3년가량 절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이미 그때 자식 셋을 둔 가장이기도 했다. 더 이상 집 떠난 생활을 하기 어려웠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업 실패에 대한 잔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생계형 도예’가 아닌 ‘작품형 도예’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2002년 서울 예술의전당 전시회를 시작으로 이후 10년 동안 매해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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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균 선생이 본인의 작품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본인 제공 사진

생계 위해 틈틈이 공사장 막일도 

작가생활에 전념하기는 했지만 경제적 고민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전시회 때 판매되는 것이 수입의 전부였다. 아내의 남편, 두 딸과 한 아들의 아빠이기도 했다. 아내가 바깥 일을 하기는 했지만 살림살이는 부족했다. 그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사현장에서 일명 ‘노가다’를 했다. 

“제 일도 중요하지만, 늘 우리 가족이 우선입니다. 제가 밀양미술협회 지부장까지 맡기도 했지만, 그런 틀 의식하지 않고 생활비 충당하기 위해 뛰어들었지요. 제 키가 165cm밖에 안 되고 보기에도 왜소해 보이잖아요. 하지만 흙 빚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팔심이 엄청나게 좋아요. 그 덕에 공사장 일도 체구 좋은 사람 못지않게 거뜬히 해냈지요.”

현재 자녀들의 하숙비며 등록금이며 돈 들어갈 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산불진화대 일도 하고 있다. 이 일은 10월부터 봄 되기 전까지 한다. 이 기간에는 일주일에 평일 하루만 휴무다. 유일하게 도자기를 빚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생활에 만족하고, 또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인다.“제가 작품 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을 때 아내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어요. 전시회를 열면 한복 곱게 차려입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그래요. 나가서 돈 벌어오라는 이야기도 안 해요. 저 스스로 하는 겁니다. 예술도 집안이 평안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들 뒷바라지도 천년만년 아닌 대학 졸업 때까지만 하면 되니까요. 제 나이 60살 정도 되는데 그때 작품 활동에 전념해도 전혀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어릴 적, 그리고 사업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이 떠나지 않은 옛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은 나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춘광도예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자신의 작업공간까지 있으니, 그는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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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균 선생./본인 제공 사진

흙 좋고 물 좋은 도자기 고장 

오늘날 ‘도자기’ 하면 경기도 이천, 경남 김해 같은 곳이 자주 거론된다. 옛 시간으로 거슬러 가면 ‘밀양 도자기’이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 교과서에 ‘밀양 대표 특산물-도자기’가 언급될 정도였다.

이 고장에서는 주로 생활자기를 만들었다. 1939년 만들어진 ‘밀양도자기’라는 회사가 대표적이다. 1970년대에는 일하는 사람이 600~700명에 이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곳에서 만든 그릇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밀양도자기에서 만든 잔에 물을 따르면 옥구슬 소리가 난다’는 말도 있었다. 손주균 선생이 영광의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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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직접 제작한 가마를 보여주고 있다./본인 제공 사진

“밀양 가곡동 쪽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밀양도자기’라는 큰 공장이 있었지요. 1950년대에는 주로 변기를 만들었고, 그 이후부터 생활자기를 본격적으로 내놓았다고 해요. 한 달에 그릇 100만 개 이상 만들고, 공장 안에 물이 바로 들어오고 그랬어요. 저도 생생히 기억하죠. 공장 일대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많았어요. 어떤 집은 할아버지·아들·며느리가 전부 생활자기 만드는 사람들이었어요. 이들 기술자는 공장일 뿐만 아니라, 별도로 자기를 만들어서 내놓기도 했고요.”

그러던 것이 1980년 후반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손 선생은 이 대목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잘 될 때만 생각하고 기술 재투자를 안 한 거지요. 생활자기는 디자인이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쪽에 투자 안 하고 구식 그대로만 고집하니 갈수록 판매가 어려워지는 거지요. 값싼 중국산에 더 이상 경쟁이 안 되는 겁니다. 1990년대에 60~70년 된 역사의 회사가 경매에 넘어가는데도 신경 쓰는 사람 하나 없고…. 지금 ‘밀양본차이나’라는 이름으로 그래도 50명 넘는 사람들이 명맥은 잇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는 생활자기든, 순수 작품이든, 밀양 도자기라는 큰 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밀양은 흙과 물이 좋은 고장입니다. 지금도 경기도 이천에서는 우리 흙 퍼가서 도자기를 만들고 그래요. 손 놓고 있는 예전 기술자들을 다시 모을 수 있으면 그 브랜드를 다시 살릴 수 있을 텐데…. 밀양 도자기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 나마 계속 보태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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