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륭 시인의 글(5월 28일 자 10면)을 읽으며, 문득 저 기억 속의 힘없는 몇몇 노인을 떠올린다. 행동이 거슬린다고 젊은이들한테 행패를 당하고도 어디 하소연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노인들이다. 이런 글에도 잘못 걸려들면 젊은 사람한테 괜히 낭패만 당할 수 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는 게 좋을 거라는 주변 지인들이 있다. 말 같지 않은 말은 그냥 흘리는 게 상책이고 글 같지 않은 글은 무시하는 게 약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잘못 걸려들어 낭패를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젊은이가 구체적으로 '노산 선생의 3·15 폄하문제'를 분석 해명한 대상을, 실명만 밝히지 않았을 뿐 누구라는 걸 알 정도로 분명하게 거론하고, 엉뚱하게 그 내용을 소설로, 그것도 사이비소설로 몰아가기까지 하니 말이다. 거기다가 감수한 분에게도 누를 끼치고 있다.

내가 가만있으면 이 젊은이의 주장은 그만 진실이 되고 말 것이다. 노산 선생이 오늘날 이런 처지에 이르게 된 것도 처음 누군가에 의해 노산 선생이 3·15를 폄하했다는 말이 나왔을 때, 그 말의 진원지를 살펴 그렇지 않다고 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이 3·15 위세에 눌려 아무 반론을 하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노산 선생이 3·15의 반역으로 몰려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그냥 있으면 이 젊은이 말대로 사이비 소설가로 낙인 찍혀 매장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내가 분석한 노산 선생의 3·15 언급은 사실 그대로인 실제적인 내용이다. 그것을 소설 즉 허구, 그것도 사이비소설이라며 이렇게 몰고 간 논증의 원인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젊은이는 이 자료를 '일부 지역문인들이 시대에 편승해 얄팍하게 내놓은 사이비 소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시대'라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여서 시대 타령이 나오는지도 궁금하다. 이 젊은이의 글을 보니 이 글이야말로 전형적인 소설로 보인다.

하나하나 그 허구를 짚어 나가보자. 이 글의 감수자의 어디에 "마산시민은 정신이 '우둔해' 읽지 못한다는 소설" 구절이 있는가. '마산시민은 정신이 우둔하다(이 부분 도민일보 기사)'라고 언급한 것은 이 자료가 나온 훨씬 뒤인 가고파 출판기념회에서다. '무모한 흥분',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는 분석 자료에서 분명히 제대로 밝히고 있다. 당시 상황이 '마산사건' 내지 '마산사태'로 보도되는 상황에서 나온 언급이다. 파출소가 불타고 도시가 난장판이 되고 양민이 무참하게 회생되는 상황이다. 이 정도의 언급으로 자제를 당부하는 것이 왜 잘못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산 선생 정도의 원로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고 언급이라고 생각한다.

또 '불합리 불합법이 빚은 불상사'라는 언급에 대해서이다. 이 문장을 그대로 3·15에 덮어씌워서는 안 된다. '불합리 불합법'은 정부 측의 책임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로 하여 빚어진 사태를 '불상사'로 언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젊은이는 그냥 한 문장으로 묶어 3·15 자체를 '불합리 불합법이 빚은 불상사'로 몰아가는 억지를 쓰고 있다. '의거'로 규정되기 전인데도 '3·15의거'라고 우기면서다. 또 김팔봉 소설가처럼 왜 언급하지 않았느냐고, 그것도 무슨 이유가 되는 것처럼 한다. 어째서 김팔봉 식 언급은 옹호되고 '불합리 불합법'을 저질러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한 노산의 언급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마산 시민을 '우둔'하다고 하면 왜 안 되는가. 얼마든지 성찰적 반어는 쓸 수 있지 않은가. 가고파의 서정성과 3·15의 의거 정신이 융합하여 잘 사는 도시로 만들자는 말은 합당한 말이지 왜 '한심하기 짝이 없는가'. '해방 후에 한결같이 권력 편에 섰다'니 그렇게 두루뭉수리 덮어씌우지 말고 구체적으로 행적이 있으면 그 증거를 밝혀야 한다. 그대에게도 두루뭉수리 진보좌파라 몰아간다면 승복하겠는가.

3·15와 4·19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을 옹호했다니 이 부분도 증거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5·16이후 민주공화당 창당 작업에 참여했다'니 이 부분도 마찬가지다. 또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미화 찬양'했다는 데 이것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우리가 볼 때 노산 선생은 균형을 유지한 문인으로서의 애국적 삶을 살았다고 본다.

   

왜 '뽀샵질'이 거기에 나오는가. 뽀샵은 컴퓨터상의 사진편집 기술인 '포토숍'을 말하는데, 변형이 가능한 기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실이 아닌 것을 소설처럼 변형하고 있다는 말 같은데, 이런 말 놀음을 구사하는 그대야말로 전형적인 사이비 소설가고 '뽀샵질'의 대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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