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병듦과 죽음
뿌린 대로 거두는 삶의 이치 깨달아야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악하게 사는 사람이 더 잘산다고. 슬프게도 이 말이 맞는 말 같을 때가 있다. 우리네 삶에서 '잘산다'는 말의 의미를 재화(財貨)의 축적에 맞출 때 타당성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닌 것이다.

재화의 기본은 돈이다. 금은보화도 돈으로 환산될 수 있고, 땅이며 건물 또한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 화폐가 생긴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래(古來)로부터 돈만 있으면 가지지 못할 것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목숨까지 돈으로 사고팔았다. 전래동화 <심청전>만 봐도 심청이가 눈먼 아비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자신의 목숨을 팔아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 않았던가.

오늘날에는 종합병원 화장실이나 지하철 공중화장실에 불법 브로커들이 스티커를 붙여 놓고는 신장 등 사람 장기를 사고팔기도 하는 세상이다. 불치의 암에 걸렸어도 돈이 있으면 살고 돈이 없으면 죽는다는 말이 떠돈 지도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놈의 돈이라는 게 필요한 만큼 무한정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은행에서 돈을 마구 찍어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줬으면 좋겠지만 돈이란 게 찍어내면 찍어낼수록 그 가치가 사라져버려 더욱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은행은 이 품귀현상의 돈을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아 이윤을 남기며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늘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돈이니 사람들은 폭력과 사기, 권력을 남용해서라도 남보다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돈만 있으면 행복도 당연히 따라온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돈에 눈이 멀어 사는 동안 내내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느라 젊음을 투자하고 인생을 몽땅 돈에 투자한다. 그런데 어찌하랴. 돈을 위해 젊음과 인생을 투자했건만 늙어서 되돌아오는 수익이란 게 고작 병듦과 죽음이었으니 말이다. 사람 대부분은 병듦과 죽음을 늦추고자 그동안 모아둔 돈을 다시 소비해야만 한다. 인생을 전부 투자해 얻은 돈을 인생을 잠시 연장하기 위해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늙고 병들어서 맞이하는 최종의 투자회수금인 죽음이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회한만 은행의 이자처럼 쌓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삶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업(業)'만이 남는다고 가르친다. 업(業)이란 사람이 짓고 살았던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고 살았던 삶의 과정이기도 하다. 업은 씨앗과 같아서 '인(因)'이 되고, 반드시 '과(果)'가 따르는 것이니 콩을 심어 콩을 거두게 되고 팥을 심어 팥을 거두게 되는 자연적 이치이다.

영영 삶의 과보(果報)가 오지 않을 것 같아도 씨를 뿌렸으니 반드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할 이유가 된다.

/도정 승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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