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2차 세계대전 초기 배경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40만 군인들 철수 작전 그려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 중 9번
친구의 헌신적인 우정에 보답

영화 곳곳 삽입 작은 위로 전해
실제 추모곡으로도 자주 쓰여

2014년, 당시 지휘자 김대진은 수원시립 교향악단을 이끌고 교향악 축제에 참여한다. 이날의 메인 레퍼토리는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으로 2019년에는 창원시향을 이끌어 같은 곡을 연주한 바 있다. 성공적인 연주가 끝나고 앙코르를 시작하려는 때, 이례적으로 마이크를 건네받고는 관객을 향해 소식을 전한다. "어제, 뜻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로 희생당한 많은 분을 추모하고…" 

연도를 보아 그 불의의 그 사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다. 모두의 심장을 쥐어흔들던 슬픔과 분노, 그리고 막연하고도 애가 끊어지는 기다림의 순간. '제발 한 아이라도 더' 그리고 이때 연주했던 곡은 영국 작곡가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수수께끼 변주곡(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 36 'Enigma')' 중 '님로드(Nimrod)'다. 그렇게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 또 한 번 젊은이들의 목숨이 스러졌다. 삶의 상실로 인한 슬픔에 젊고 늙음이 어디 있겠냐만 아직 피기도 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이 더욱 허망타.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며 느낀 것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에겐 위로조차도 분노요 망연함이라는 것이다. 하니 그저 명복을 빌밖에.
 

2017년 작 '덩케르크'. /스틸 컷
2017년 작 '덩케르크'. /스틸 컷

◇장엄한 선율 = 영화 <덩케르크>는 1940년 2차 세계대전 초기, 사상 최대의 철수 작전을 배경으로 한다. 거친 바람과 몰아치는 파도에 접한 광활한 모래사장, 수많은 군인이 바다를 향해 줄을 지어 섰다. 벨기에와 프랑스의 연안 덩케르크다. 

줄이 바다 쪽인 것은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 쫓겨 철수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미 인접 지역은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포위된 상태로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전 최대한 많은 인원을 철수, 아니 목숨을 살려야 한다. 모두를 구해내야 한다고는 하지만 명분일 뿐 실상은 3만 명 정도의 인원만이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구조를 기다리는 이들의 수는 40만 명에 달한다. 목숨이기에 국적을 불문해야겠지만 일단은 자국민이 우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여러 시점에서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으로 교차하며 흘러간다. 먼저 잔교(배를 접안시키기 위해 세운 시설)에 늘어선 긴 줄과 함께 비친 일주일(One Week)이란 자막, 그렇게 생존을 위한 그 정도 기간만큼의 사투가 벌어진다. 오직 고향을 향하는 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밀려오는 공포의 시간은 더디기만 하다. 그러다 만난 폭격에 잔교가 무너지고 희생자가 나오지만 그저 치워둬야만 할 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다 상황은 어떤가? 거친 파도에 전함 움직임은 느려지고 게다가 독일 잠수함들의 어뢰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른다. 간신히 도착한 배에 올라 빵과 차로 주린 배를 채우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도 잠시, 어뢰를 맞은 배는 침몰하고 다시 사지로 내몰리는 병사들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후퇴의 가장 큰 걸림돌인 적기와 대항하기 위해 출격한 전투기 3대. 그들의 움직임은 전투를 마치고 복귀할 수 있는 한 시간(One Hour)의 흐름에 맞춰져 있고 그만큼 영국과 덩케르크는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이미 대장기는 격추되었고 2호기마저 바다에 빠져 오직 한 명의 파일럿만이 고군분투다. 그리고 등장하는 또 다른 이들, 전함으로 부족하기에 투입된 민간인 어선과 요트들이다. 그들의 시간은 하루(One Day)에 맞춰져 흘러가며 이미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도슨의 배 역시 덩케르크로 향한다. 그렇게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해야 한다는 신념의 영웅들. 비록 다른 상황에서 위험과 맞서지만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연결되어 구원의 손길이 되고, 알지 못할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생명을 얻고, 그 이가 다시 누군가를 구원하고….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 

혼신의 노력으로 철수 작전을 벌이고는 있지만 도무지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때 덩케르크 해안을 향해 다가오는 배들. 비록 전함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지만 한 척이 아니다. 조국의 젊은이들, 아니 위태로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은 의연하다. 이 장면을 배경으로 흐르는 선율은 장엄하면서도 숭고하다. 영국이 자랑하는 작곡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 곡은 영화의 마지막, 위기에 처한 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끝까지 싸운 비행기가 이제 연료를 잃어 표류하듯 적의 진영으로 날아 불시착하는 장면에도 등장하여 비장함을 더한다.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가 영화의 장엄함을 더한다. /스틸 컷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가 영화의 장엄함을 더한다. /스틸 컷

◇엘가의 14개 변주 = 1899년의 어느 날, 엘가는 문득 떠오른 악상을 피아노에 싣고 있었다. 이때 아내 캐롤라인이 이 선율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그녀를 향한 사랑에 진심이었던 엘가는 행복하게 해 줄 요량에 이내 여러 변주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평생을 엘가의 '뮤즈'였던 아내와의 일화가 또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를 보강하여 정돈, 오케스트레이션하며 '창작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수수께끼'라는 부제를 달았다. 현재는 '수수께끼 변주곡'이라는 제목이 더욱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왜 수수께끼일까? 얼핏 신비롭고도 대단한 퍼즐이 숨겨진 듯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용을 안다면 엘가라는 인물이 지닌 성품과 위트가 드러나는 듯 소박하여 정겹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친구나 지인들의 성향이나 특징, 그리고 그들과의 추억을 떠올려 그려냈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정겨운 이들을 떠올리며 음악화하는 따뜻한 순간을. 그렇게 엘가는 주제에 이은 14개의 변주를 완성, 악상과 함께 인물의 이니셜이나 별명, 혹은 간단한 언어유희로 힌트를 제공한다. 

먼저 제1변주의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붙여진 이니셜로 보자면 'C.A.E'다. 사랑꾼답게 아내인 '캐롤라인 앨리스 엘가'를 가장 앞에 둔 것인데 역시나 낭만적이고도 애절한 선율로 가득하다. 

2변주는 'H.D.S.P'다. 이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휴 데이비드 스튜어트 파월'의 이니셜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위를 빠르게 지나며 손가락을 풀던 그의 버릇을 16분음표로 익살스럽게 묘사했다. 

8변주는 느긋한 성품의 '위니프레드 노버리'를 위한 것으로 'W.N'의 이니셜이 붙었다. 그리고 마지막 변주인 14번의 이니셜은 'E.D.U'인데 엘가 자신을 가리킨다. 아내가 불러주던 애칭을 이니셜로 표기한 것으로 피날레다운 찬란함과 웅혼함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유명하며 영화에 사용되기도 한 제9변주 '님로드'에 숨겨진 수수께끼는 무엇일까? 님로드는 성경의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이자 사냥꾼의 대명사로 14개의 변주 중 가장 심한 비틀기이기에 해답 찾기에 가장 크게 애를 먹었을 듯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엘가의 오랜 친구이자 노벨로 출판사의 음악 담당 편집자였던 '오거스터스 제거'. 도대체 어떤 연관일까? 앞서 이야기했듯 님로드는 사냥꾼의 대명사인데 사냥꾼이 독일어로 J?ger다. 이에 제거(Jeager)의 이름을 발음상 독일어로 해석한다면 사냥꾼이라는 데 착안한, 알고 보면 간단하고도 익살스러운 발음 힌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난스러운 힌트와 달리 들려오는 악상은 너무도 숭고하다. 이는 제거로 인해 받았던 영감을 발현한 것으로, 창작의 고통 속에서 방황할 때 힘이 되어 주던 친구에게 바치는 음악적 헌사인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조국에 도착한 젊은이들은 기뻐하지 못한다. 승전을 위하여가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하여 사투를 벌이다 왔기에 죄책감에 휩싸인 그들, 그들은 패잔병이었던 것이다. 몸을 실은 기차의 창문을 두드려 대자 마치 질책처럼 느껴져 고개마저 들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질타가 아니라 살아 돌아와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승리. 한 할아버지가 배에서 내린 병사들을 향해 차와 먹을 것을 건네며 수고했다고 격려하자 병사가 죄송한 듯 묻는다. 

"살아 돌아왔을 뿐인데요?" 

이때 할아버지는 대답한다. 

"그걸로 됐어. (That's enough)"

/심광도 시민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