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 챕터 구성 로맨틱 코미디
방황하며 성장하는 젊은 그려

별안간 노르웨이 오슬로에 가고 싶어졌다. <미드나잇 인 파리>나 <라라랜드>처럼 도시를 비추는 영화들을 가만히 보다 보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기분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노르웨이 감독 요아킴 트리에가 오슬로를 배경으로 만든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요아킴은 전작들처럼 노르웨이 젊은 세대의 일상과 성찰을 그려내는데, 한국 극장에서 노르웨이 영화를 접하기란 흔치 않았던 터라 풍경과 말씨만으로도 이미 생경하고 신선한 몰입감을 주는 듯하다.

‘별안간’. 주인공 율리에를 정의하려다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다. 그저 똑똑함을 인정받는 게 좋아서 다녔던 의대에서는 외과가 ‘목수’같다며 심리학으로 별안간 진로를 바꾸더니, 돌연 자신에게 미적 감각이 있는 것 같다며 학자금 대출을 받아 포토그래퍼 길에 들어선다. 그런 율리에는 연애에서도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직업을 쉽게 바꿨듯 연애 상대도 쉽게 바꾸는데, 그러다 파티에서 만난 나이 많은 만화가 악셀과 ‘별안간’ 안정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속 한 장면. /갈무리<br>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속 한 장면. /갈무리

‘별안간’이란 단어가 재밌게 느껴졌다. 아주 갑작스럽고 짧은 순간(瞥眼間)이라 분절된 별개 구간처럼 느껴지지만, 그 또한 인과의 연속성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 일부다.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시작점과 끝에 두고 12개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율리에 일상과 심리 변화를 추적하는 하나하나의 챕터는 독립된 단편 느낌을 풍기지만 이어보면 제각각 인과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인 이 영화는 얼핏 보면 율리에 연애사 에세이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어보면 각 챕터는 율리에가 보인 감정 변곡점이자 율리에만의 성장점에 더 가깝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속 한 장면. /갈무리

율리에는 직업이든 연애 상대든 자신의 감정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택해왔지만 ‘내 인생인데 조연인 것 같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른 전후까지도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른 채 성찰하고 또 방황하는 모습에서 ‘삶의 조연’같다는 말은 농도 짙은 진심일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관통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기조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정답 없이 흘러가는 율리에 삶은 정해진 단계대로 인생을 살던 중년 악셀과 필연적으로 부딪힌다. 그렇게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누구나 최악이 된다. 원제에도 있는 ‘최악의 사람’이란 타인이 정의하는 율리에가 아니라, 삶에서도 연애에서도 방황하는 자신을 두고 하는 율리에의 자조적인 비하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라 ‘율리에’ 하나다.

에필로그가 비추는 율리에는 이전과 사뭇 다른 인상을 하고 있다. 인생 조연에서 주연으로 올라섰는지, 진짜 되고 싶은 모습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런 단서는 없지만, 이전보다는 방황이 줄었으리라 막연히 넘겨짚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의대생 율리에가 12개 챕터를 달려와 지금 율리에에 다다른 것처럼 에필로그 이후에도 그녀의 챕터는 계속 달려나갈 것이다. ‘계속하다 보면 뭐든 되겠지’라는 마음이 모토가 되는 시대. 지금 품은 열정이나 사랑에 ‘별안간’ 마음이 달아나더라도, 달라진 마음 때문에 스스로 상처받을지라도, 별안간 최악이 되어버릴지라도, 우리는 우리 챕터를 넘기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전이섬 작가 (마산영화구락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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