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자랑이 된 로댕의 조각품
우리도 민주열사 명예회복 작업을

3·15의거 특별법이 국회 법안심사 과정에서 부딪힌 가장 큰 난관은 '4·19 중복보상'이라는 정부의 오해와 반대였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3·15의거가 대한민국 최초의 유혈 민주화 운동으로, 3·15 부정선거 당일 대한민국 최초로 1만여 명 시민이 경찰 진압에 맞서 싸웠고, 12명의 시민 학생이 총탄에 숨졌다는 사실을 국회나 정부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것이다. 4월 11일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으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실은 우리 도시에서조차 김주열 열사 외에는 3·15의거 때 총탄에 맞서 싸우다 숨진 열사들이 역사의 조명 밖에 놓여 있었다. 강융기, 김삼웅, 김영길, 김영준, 김영호, 김용실, 김종술, 김평호, 김효덕, 오성원, 전의규 열사가 그들이다. 마산과 창원, 함안, 창녕 등 경남 전역뿐 아니라 전북 남원, 평북 신의주 출신도 있었다. 창신중, 마산동중, 마산공고, 마산고, 마산상고 등 시내 중고교 재학생과 졸업생, 그리고 젊은 노동자나 시민이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젊디젊은 나이에 산화한 열두 분 열사의 짧은 행장(行狀), 숨지기 전 가족에게 남긴 한마디는 지금 읽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3·15 특별법에 따라 내년 1월부터 3년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이 진행되지만, 우리 시민들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예컨대, 3·15 희생자와 참여자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열두 분 열사의 기념 조형물을 함께 만드는 것이다.

이번 특별법이 반대투표 하나 없이 21대 국회 들어 가장 높은 찬성률로 통과된 것은 여야 국회의원들이 역사적 진실을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3·15 부정선거 당일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가 있었다고 하지만,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가 침묵했을 때 이토록 수많은 시민의 총탄에 맞선 항거는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기 때문이다. 3·15 당일 의거, 그리고 4월 11일 이후 사흘간의 '2차 마산의거'가 4·19의 도화선에 그친 것이 아니라 1960년 대한민국 민주혁명의 전반부였다는 사실을 여야 의원들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3월 15일 당일에만 10명의 시민·학생·노동자가 총탄에 숨졌을 만큼 마산시민들의 항거는 치열했다. 그중 한 사람인 김주열 열사 시신이 마산부두에 떠오른 4월 11일, 그리고 12일과 13일까지 사흘에 걸친 마산의 남녀 고교, 경남대(당시 해인대)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도 3·15 당일 못지않게 엄청났다.

프랑스 조각가 로댕은 백년전쟁 당시 시민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칼레의 시민들을 기념하는 조각을 남겼다. 이 동상 하나로 도버해협의 바닷가 도시 '칼레' 이름이 유명해졌다.

마침 우리 마산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세계 3대 조각가'로 공인받은 문신 선생의 고향이다. 문신 선생이 생존해 계셨다면 3·15의거 현장에 세계적 거장의 역작을 세울 수 있었겠지만, 이제라도 열두 열사의 불꽃 같았던 삶, 남은 가족들의 아픔과 신산(辛酸), 시민들의 땀과 눈물을 담은 세계적 동상을 함께 만들면 어떨까? 시민들이 열망하는 국립현대미술관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3·15의거가 얼마나 위대한 역사였는지 보여줘야 할 때다. 국립3·15민주묘지의 부조상도 힘차지만, 맨주먹으로 시대의 최전선에 섰던 열혈 시민 학생들의 의연한 결기를 생생히 되살릴 동상이 절실하다. '칼레의 시민'이 프랑스의 자랑이듯, '3·15의거 12열사' 동상은 우리 도시의 자부심이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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